1980년 5월17일 24시를 기하여, 5월18일 아침 7시에 딱 잠에서 깨어나니깐 계엄령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렸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군복과 군화를 신은 한7명의 군인들이 저희집에 들이닥쳤거든요. 셔터문을 요란스럽게 누가 두들겨더라구요. 그러니까 인제, 가끔 그런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후배들이 찾아왔을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남편이 그냥 맨발로 런닝셔츠 바람으로 문을 열고 나갔는데, 무조건 들어와서 조별로 나눠가지고 화장실이며 마루바닥이며 뭐, 저기 농이며 또는 다락이며 할것없이 샅샅이 수색을 하고는, 그래서 제가 무슨일이냐고 이렇게 ?아갔더니 한사람이 권총을 남편 옆얼굴에다 딱 대고 있더라구요. 저는 인제 더 망연자실 했죠. 그러면서 이제 무슨일이냐고 악을 쓰고 그래도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이렇게 돌아보질 않더라구요. 저번에 학생들 모임에서 학교가 만일에 휴교령이 내리면은 학교에서 모이자, 또는 학교가 또 저지 당하면 도청에서 모이자, 하는 일련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로 향했습니다. 학교 정문 앞에를 보니까 군인들이 공수부대가 칼 위에다가 대검을 착검을 하고 앞테가 한 양쪽으로 한 다섯명, 열명씩 이렇게 해가지고 양쪽으로 쭉 있고, 뒤에 전차가 서 있고. 당시의 전대 정문앞에 나와 있는 2-3백명 학생들은 자, 어떤 형태가 됐든 우리가 공부하는 캠퍼스기 때문에 일단 학교로 들어가자. 당신들이 뭐냐. 당신들이 먼저 학교에서 물러가라, 이 학교는 우리학교다 이제. 그런것으로 변질이 됐죠. 그때는 뭐 구호를 외친다던가 그런게 없고 왜 당신들이 여기 들어와서 큰소리를 치느냐, 하니깐 거기서 2-30명이 모이니까 막 밀치고 들어가야 한다니깐 군인들이 막고 못들어가게, 교문을. 그러니깐 그 사람들이 그러더라구요. 밀어내. 계엄군들은 해산하러 오고 저희들은 골목으로 ?어지고 이러는 과정에 곤봉과 군화발에 짓밟혀가지고 피투성이 된 채로 끌려가는 학생들 숫자가 점점 늘어나게 되죠. 그래서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과정에 뭐 누구라 할것도 없이 자 우리가 여기서 저 계엄군들하고 이렇게 싸울 필요가 뭐 있겠느냐. 이러한 만행을 결국 우리가 시민들에게 알리자. 가자 도청앞으로. 구호소리가 막 나고 동양 터미널 쪽에서 막 소리가 들리고 시끄럽고 그런데 무슨 일인가 하고 나가봤었죠. 나가보니까 학생시위대가 굉장히 격렬하게 하여튼 막 악을 쓰면서 구호도 별로 통일되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식으로 나오더라구요. 학생들에 대해서 이제 최류탄을 경찰은 이제 쏘고 있고 학생들은 투석정으로 맞서고, 이렇게 하고 있었는데, 에 열세여가지고, 학생들이 열세여가지고 막 밀려가고 있었어요. 어느순간 그때 2시경인가 되니까 공수부대들이 딱 경찰들 대치해서 앞에 서더라구요. 저희들 앞에. 헌데인제 공수부대들은 말 그대로 민첩하게 생겼습니다. 군복에다가 엠오씩스 들고 곤봉하나 긴거들고 그외에는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커먼허니 딱 서가지고 막으니까 감히 겁나서 누가 접근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 군인들이 와가지고 대치를 한 20분정도 흘렀습니다. 이쪽에서는 시민들쪽에서는 계속 이제 시민쪽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물러가라, 물러가라 백여미터 거기는 가까이는 감히 접근을 못하고 그런데 갑자기 군인들이 하나둘셋, 명령을 내리는가 하더니 그 다이렉트 군인들이 엄청난 속도로 시위군중을 곤봉을 휘두르며 달려온겁니다. 총을 뒤에다 가로로 맸습니다. 뒤에 매고 앞에 곤봉들고 ?아오는 겁니다. 골목으로 한참 들어오는 골목인데 거기를 하나가 학생 하나가 ?겨 들어온거예요. ?겨 들어오니까 이 친구가 그 안쪽으로 골목 안으로 들어가서 한 50미터나 들어가서 문을 열고 박차고 들어가서 아마 그 집에 숨었는데 요 위에서 보니까 이렇게 내려다 보이는거죠. 근데 잠시 후에 두명이 일인조가 되가지고, 계엄군들이 이렇게 뒤를 따라왔어요. 막 달려서 따라왔는데 그 집에 들어가가지고 그대로 신발 신은채 방에까지 들어가가지고 막 들어갔는데 뭐 그냥 알수가 있죠. 그니까 잡아 붙들어 매더만 뭐 그자리에서 엄청나게 두드려 패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실신하다시피. 그 집 할머니가 지키고 있다가 왜 그러냐고 왜그러냐고 하니깐 할머니도 뒤로 벌렁, 뿌리쳐 버리니까 나자빠져 버리고. 이런상황이 계속 벌어지니까 거기서 검문당하다 도망가는 소리, ?아가면서 악쓰고 ?아가는 소리. 이런 것들이 건물내 다 있었어요. 막 내다보도 못하고 담넘어서 내다볼라면 막 아무나대고 계엄군들이 막 욕해버리고. 어른이고 애도 가릴것도 없이. 죽여버린다고 내다보지 말라고. 그리고 잡으면은 당시에는 머리들이 상당히 길었을거예요. 왼손으로 머리를 잡고 이 참나무봉으로 선문을 쳐요. 탁 치면 앞으로 사람이 탁 숨어 꼬끄라지죠. 그러면 머리가 아프니까 머리를 또 쳐요. 계엄군이 이발하고 있는 남자를 ?아와서 정말 머리를 쳐서, 왜 우리가 그 머리가 이렇게 깨진 것을 박이 터졌다고 하는지 표현을 하는지 직감했거든요. 정말 핏물이 온 얼굴을 덮는 것을 정말 30초 내에 봤거든요. 치자마자. 이건 진압이 아니라요. 아마 전쟁터에서 적군을 잡아 죽이고 족치는 그런 이상이였을거예요. 인간이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여학생 한사람을 공수부대들이 이렇게 희롱을 하더라구요. 대검을 뽑아들고 교복 위 가슴께를 대검으로 푹푹 찌르면서 희롱을 하니까 어떤 할머니 한분이 아이고, 내새끼야. 하면서 왜그러냐고, 그걸 말릴려고 하니까 그 할머니를 공수부대가 워커발로 차 가지고 땅바닥에 쓰러뜨린 다음에 뭐, 지근지근 밟는다고 그러죠. 그걸 보고 있던 시민들이 저를 포함해서 돌을 던지면서 물러나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공수부대원이 그 여학생 가슴을 대검으로 찔러버리더라구요. 그때 두분의 여자가 지나가시는데 한사람은 검은 투피스를 입고 한사람은 연분홍 한복을 입고 둘이 같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뒤에서 ?아가는 군인이 가서 무조건 곤봉으로 쳐버리니까 팔이, 그러니까 오른손이죠 내가 봤을 때 오른손이 뚝 부러져가지고 덜렁덜렁 해버리는 그런 광경을 봤을 때 다시 또 격분하게 됐었던 거예요. 사람을 때리면은 때리고 그냥 말고 그런게 아니라 때리면 쓰러질거 아닙니까. 발로 차고 그러면은 쓰러져서 기절할 정도가 힘이 떨어져가지고 그러면 질질 끌고가는 겁니다. 끌고가서 옷을 벗기고 그래가지고 눕혀놨다가 짐짝같이 싣고가고 그러는거예요. 그러니 사람이 애통 안하게 생겼습니까. 그걸 보고 있으니까 엄청난 공포감이 들어오는 거죠. 아, 저기서 내가 여기서 내려갔다가는 붙잡혀서는 저렇게 당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고.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대요. 그렇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 잔인무도하게 할 수 있을까 싶어지고. 인간이 저렇게 무서운 호랑으로 적마로 돌변할 수 있는가 싶어지고. 어떤 부분에선 제가 막 그 학교 다니면서, 저는요 상무대 가서 무용도 해주고 그랬다니깐요. 그랬더니 그게 너무 막 아깝고 내가 바보같이 그놈들 앞에서 왜 춤을 췄을까. 내가 그런데 가서 왜 김치를 담아줬을까. 그런 그 후회, 그리고 도대체 전두환 이놈이 어떤 놈인가.



그 다음날은 아침에 나와보니까 철도 옆에 보면 철조망이 다 있고 조그만 하수구가 있어요. 덮개가 안된 것으로. 철망에 가 피묻은 옷들이 걸쳐져 있고 그 육각방망이, 진압봉 방망이가 그렇게 튼튼한 방망이가 부러진 것도 있고. 웅성웅성 하고 계엄군들이 와서 하는 이유자체를 그렇게 하는 이유자체를 모르니까. 그 맘편히 대답해주는 사람도 없고 그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굉장히 산만했었죠. 죄 많은 사람만 잡을 것이지, 왜 그런단가. 왜 데모는 한단가 이런식의 얘기들이였죠. 월요일날이라 학교를 갔습니다. 학교에 가니깐 벌써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지만 학생들 분위기가 달라요.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 공부할 분위기도 아니고 시민들은 다 죽어가고 젊은놈들 다 죽여가는데 공부나 하고 있어야만 하냐는 그런 불평들 봤어요. 우리가 지금 이런 상황에서 공부가 되겠느냐. 이제 앞으로 니가 이런일에는 적극적으로 이렇게 대학생 형들과 함께 동참을 해야된다. 고 공수부대들이 알고 대동고등학교 진압한다고 카도록 센터에 있었던 그 계엄군들이 대동고등학교 앞으로 진격을 해 온 것이였죠. 걔, 뭐 애들이 막 내려갈려고 그래요. 그래서 튀어 나가가지고 그 앞에 팔을 쫙 벌리고 있었었어요. 느그들 지금 가면은 개죽음인데 너희들 나갈수가 없다. 그러니까 정 가고 싶은 사람들은 나를 밟고 가라고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부정불의를 보면은 좌시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평소에 저희들을 갈쳤는데 왜 막냐고 항의성 얘기도 하고 여러가지 얘기들 나옵니다. 그러지만은 내보낼수는 없었어요. 그때 상황에서. 나가면은 바로 죽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가지고 모두 담임선생님 말씀에 그대로 순응을 해서 애들이 모두 피한 모습을 보고 앉아 있는데 너무 허전하기도 하고 가슴이 뛰고 불안해 불어요. 그 앉아 있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갔던 것이죠. 사람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한겁니다. 그러니까 그 가운데에 처음에는 3-4백명 이렇게 앉아 있었는데 점차 숫자가 많아지고 거기에 보니까 과거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뭐, 할머니들도 있고 할아버지들도 있고 뭐, 아가씨들도 있고 뭐, 학생들 꼬마들도 데리고 와서 할머니들이 같이 손잡고 거기 앉아 있는 거예요. 인제 그냥 노래부르고 구호외치고 그렇게 하다가 인제 그 돌맹이 주워서 던지고 이렇게 했는데 너무나 잔혹하게 나오니까 저희 서점에 모여든 그 후배들이나 학생들 한테서도 우리들도 이제 송곳이라도 갖고 나가자 또 여자들은 송곳이 없으면 옷핀으로라도 갖고 나가자. 그 덤프트럭이 모래나 자갈을 싣고 오고 골재를 싣고 다녔거든요. 그런 차들이 이렇게 가다가 누가 시켜서 한것도 아니고 학생들이 시켰는지도 모르죠. 여기 자갈 좀 내려주라고. 딱 보면은 자갈을 한 차를 퍼준게 아니라 저 짝 쪼끔 보면은 덤프트럭이 있으니깐 주르르 가요. 가면은 많이 쏟아지잖아요. 그러면 그걸 가지고 던지고. 또 기사들이, 나부터도 그랬으니까 문열어놓고 있다가 도망치면 급하잖아요. 군애들이 ?아오면 그 보면 빨리 차타요. 그러면은 차로 백미터 이백미터만 붕 가버려도 안잡히잖아요. 상황이 주어진대로 나는 했거든요. 그 상황에 맞춰서. 돌을 던져야 될 상황이면 돌을 던지고 악을 써야될 상황이면 악을 쓰고. 도망가야 될 상황이면 도망가고. 그렇기 때문에 목적은 저들을, 저들을 ?아야 된다는거. 목적은 하나 있었어요. 군인들을 어떻게든지 하여튼 광주시내에서 더러운 피 묻히지 않고 저 군인들을 내몰아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광주에서 시민들의 목숨을 빼앗는 군인들을 내보내고 싶었어요. 다른 소망은 없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시민들은 완전히 위축이 돼가지고 진짜 거 항의도 해봐야 뭐 되지도 않고 또 모을 돌맹이도 안되고 욕으로도 안되고, 힘으로도 안되고 절망한 상태였죠. 절망한 상태였는데 진짜 큰 힘이 되준 것은 자동차 경적울리며 들어가던 것. 저 유동 사거리에서 그러니깐 금동 끝쪽이죠. 도청 맞은편 끝쪽인데 차량들이 시내버스, 그 쭉 택시들 수백대가 불을 켜고, 쌍라이트를 켜고 빵빵빵빵 하면서 계속 오는 거예요. 계엄군차인 줄 알았죠,그게. 그러니까 이제 계엄군 차가 아니고 버스고, 택시고 하니까 환호가 터지고 난리가 났죠. 그러니까 이건 뭐, 아마 그때 그 자리에서 있어봤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란 것은 막 눈물이 줄줄 나는 거예요. 야, 우리는 도저히 계엄군을 이길 수가 없다, 하는 생각을 가졌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그 운전기사들이 그렇게 많은 숫자가 시내버스 앞에 서고 그 다음에 자동차가 화물트럭 뒤에 서고 막 박수를 치면서 열광을 하고 정말 목이 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 힘든줄을 모르고 사람이 그 어떤 에너지 같은 것들이 전혀 자기도 느끼지 못한 그런 에너지들이 막 나오는 거예요. 그 주택가에서 와 하는 함성이 들리더라구요. 근데 그때 인제 9시 뉴스가 한 10분정도 진행됐던 그 순간인데 밖에서 이러이러한 소리가 들리는데 무슨일이냐 그랬더니 광주에서는 폭도들이 날뛰고 있고 시민들은 전혀 하나 다친사람이 없으며 군인들만 많이 다쳤다. 계엄군 쪽에서 정부쪽에서 이야기만 계속 그런식으로 보도를 하니깐 방송 그거는 아니다. 우리 시민들은 전부다 이렇게 맞아 죽고 있는데 너희들은 뭐하냐, 그러면서 니들은 차라리 그게 낫다 해가지고 거기다 불을 지른 거예요. 엠비씨에다가. 사람들이 모여서 야 엠비씨에 불지르자 엠비씨에 불지르자 하니깐 쌓다가 어그러진 합판도 갖다 놓고 막 신문지도 갖다 놓고 불을 지르고 있는데 사람들이 후다닥 후다닥 내려오고. 광주시내가 불길이 솟고 그날 같이로 광주시내가 소란한 때는 없을 거예요.



이제 새벽녘이 되서 신협부근에 우리가 당도했을 때 벌써 그때 당시 이제 지금은 없어졌습니다만은, 그 분수대 주변에 시신 두구가 피를 흘린 채 발견됐었어요. 금남 저기 오니깐은 손수레, 그러니깐 리어카에다가 시신 두구를 싣고 태극기로 딱 덮어가지고 이렇게 밀고 들어오는데 참..시신은 그때 처음 봤잖아요. 많이 죽였다, 죽었다 이런 소리는 들었어도 눈으로 직접 목격한 건 처음이잖아요. 정말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는, 딱 피가 딱 거꾸로 솟대요 이제. 이제는 한번 붙어보자. 그 시신을 본 많은 시민들이 도청 앞으로 운집하기 시작했어요. 적어도 아홉시 경에는 몇만을 이미 넘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수대를 주변으로 이미 그때 계엄군들은 포진하고 시위대가 더이상 도청앞으로 접근할 수 없도록 이미 대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심지어 시위하는데 그 뒷 조에서 아, 우리가 이러고만 있을게 아니라 우리 그, 저 지사하고 만나서 협상도 좀 하고 합시다, 하는 목소리가 몇마디 나왔다고. 근데 그러니까 앞에서 그럽시다. 그래서 인자 거기서 몇가지 적었다고. 받아줄 건 받아주고 내가 못할거 있고 이렇게 협상했다고. 그러니까 거기서 지사보고 이 시위대 앞에 와서 그걸 발표해주라 그랬다고. 그래서 지사가 나왔어요. 근데 뭐 스피커가 잘 안돼가지고 못나와 버렸다고. 그래서 지사가 와야 되는데 안나타나는 상태가 된 상태에서 자꾸 이제 시위대와 공수부대 간에 간격이 좁아지는겨, 이게. 좁혀져 가요. 조금씩 조금씩 이 사람들이 군인들이 조금씩 조금씩 뒤로 밀려나는 상황이였고 계속 이렇게 이렇게, 요만큼 왔다가 또 다시 요쪽에서 군인들이 다시 오고 어쩌구 하다보니까 그 자리를 사수하고 계속 반복하고 있었어요. 근데 갑자기 아마 그때 도청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왔을 겁니다. 한시 딱 되니까 갑자기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거야. 옥상에 있는 스피커에서. 거기 곡만 나오지 가사가 나온는건 아니고, 딱 순간적으로 보니까 한시 정각이더라고. 가사가 있게 울려퍼지는 거예요. 그러더니 그 가사가 나오면서 총소리가 많이 나옵니다. 설마설마했죠. 그래도, 그래도 설마 우리한테 총이야 쏠라디. 이런 설마하는 감정도 있는데 옆에 금남로 양쪽으로 사람들도 많이 있었어요. 근데 사람들이 막 도망가더라구요. 총소리가 나면서. 설마설마 하다가 아차, 하고 인자 쏘는갑다고 막 돌려서 짐칸으로 뛰어내릴라고 몸을 돌리는 순간에 맞았어요. 그 탄력으로 그대로 짐칸으로 뒤로 떨어져 버렸죠. 시민들이 싹 흩어지니까 그 장갑차에서 그 탄 박스를 내려줘요. 인제 그러면서 그때 아마 중대장이였을거 같은데 제가 이름은 기억 못하고 야, 이 개새끼들아 조준사격 안해. 개립시장 이쪽 뒷편으로 오니까 엄마들이, 물 그러니깐 타올에다 물을 묻혀갖고 목에다 딱 걸어주면서 딸기 있잖아요. 딸기를 따다가 주고, 콜라를 갖다가 우리한테 주면서 딸기를 하나 갖다가 제가 지금도 딸기를 안먹어요. 그 딸기를 갖다가 입에다 넣어서 딱 먹는 순간에 무에 빵 하고 쐈는데 나 차 운전해줬던 기사가 그 자리에서 직사해버린 거예요. 그러면서 동시에 막 금남역에서 사람들이 확 흩어지고 그런 모습이 이제 옆에서 보였었는데 그래서 한 일이십분 숨어있다가 이제 정말로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우리가 하고 있다, 이제 이런 생각이 드는거죠. 절망적이고. 그런데 놀라운게 다시 광주시민들이 그 금낙역 탑돌센터 앞으로 다시 나오는거예요. 나와가지고 노래를 이렇게 부른 겁니다. 푸앙, 하고 쏘고 쓰러지니깐 또 총을 안 쏘고 있어요. 이제 다른 사람들이 양쪽에 있다가 시체가 있었을거 아니고 부상자도 있었을거 아니예요, 이래 끌어내더라고. 끌어내더라고. 끌어냈단말야. 그런데 다시 똑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는 거야. 쓰러지면은 싹 순간 흩어져요. 순간 흩어졌다가 아마 언젠가 다른 다큐멘터리에서 보니깐 그 큰 고래라던가 나오면은 그 떼지어 다니는 물고기들이 싹 흩어졌다가 또 모이고 하는 그런 모습 보이더만요. 그래서 한분이 쓰러지면 순간적으로 싹 흩어졌다가 사람들은 모여서 그 시신을 떠밑고 가는 분도 있고 그대로 웅성웅성 다시 모여요. 그러다 또 갖다 땅 하고 갈기면 흩어지고. 그때 그 이 마음속에 그 좌절감에서 다시 금남로로 사람들이 나오니깐 나도 이제 금남로로 다시 나가게 되면서 같이 노래부르고 그때에 뭐 이루말할수가 없었습니다. 막 그 눈물이 나오기도 하고 막 그 분노감, 응 저것들 죽여야 된다고 하는 이런 생각. 그 도청 앞에서 그 총소리를 듣고 난 뒤로부터는 사람들이 내 눈으로 봐서도 저건 이상하다 할 정도로 사람들이 엄청 감정적으로 고조가 돼 버렸고 말 그대로 트럭을 탄다거나 이런 버스를 탄다거나 하면은 이제 막 몽둥이 내놓고 때리고 이것, 우리 이렇게 해서는 죽는다 우리도 살기 위해서 무기를 들자. 총총총. 이제 저놈들이 총을 발사하면 우리도 총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총을 받아야겠다. 나도 이제 총을 들고 싸워야 되겠다. 우리도 무기를 들자. 이렇게 있어갔고 우리 다 죽는다.



총을 싣고 광주로 이렇게 들어왔는데 저희들이 가져온 무기는 이제 칼윈,에이알오,엠원. 구식무기들이죠. 이 무기들을 가지고 광주도 들어 왔는데 저희 일행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총들을 광주인근 곳곳에서 이렇게 가져왔더라구요. 공원에서 총기를 나눠줬어요. 트럭한놈을 가져온 것을 저희가 나눠줬어요. 난 누구하고 같이 나눠준지도 몰라요. 그 가서 좌우지간에 총도 한번도 쏴보지도 않고 사용도 안해본 놈이 군대갔다온 사람한테 단 삼십분 배워서 총을 나눠주고 쓰는 방법 다 가르쳐줬어요. 근데 그 총을 받아 다 줄서가지고 대기하고 있는 겁니다. 제 차레가 와서 총 주세요, 그랬더니 나를 보고 머리가 짧으니까 아, 너 이 쬐까난 놈이 뭔 총을 받으려 하느냐. 아니, 나 교련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나 이 총 쏠수있다고. 진짜 쏠 수 있느냐 그래서 아, 나 총 쏠수있다고 해가지고 총을 이렇게 한자루를 제가 받았어요. 받았는데 뭔 총을 받았냐면 엠오원 소총을 받았습니다. 엠오원 소총을 탁 받으니깐 너무 무거운거에요. 아 이게 너무 들기가 힘들어. 그래서 내가 다시 트럭에 있는 그 청년한테 아저씨 나 총이 너무 무거워서 저요, 이거 쏠수가 없어요. 그랬더니 권총을 주더라고 권총을. 그땐 뭐 어떤 지휘체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리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만 군대를 갖다온 사람들 중심으로 해가지고 대응방법을 논의하고 저들을 어떻게 광주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이런것들을 그러니까 원래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거기서 이루어진거죠. 저녁에는 우리 동네를 지켜야 될 것 아니냐 이렇게 됐었죠. 그래서 거기서 29일날부터는 이제 우리도 무기를 휴대를 하고 지역을 배치를 시키고 저는 그 사개조를 왔다갔다 하면서 서로 격려도 해야되고 하니까 참 이제 무섭지만서도 어떻게 보면 무섭긴 하죠. 근데 거기에 몰두해야 하거든요. 무섭다는 생각보다도 어떻게 지켜야 되느냐. 안전을 지켜야 되냐,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는데 조용해요. 그런데 상원이하고 같이 갔습니다. 기림동으로. 상원이, 아 이상하다. 왜 이렇게 조용하대. 그런데 마침 트럭이 몇대가 지나가요. 왜 이렇게 조용합니까, 이랬더니 그 청년이 아니, 계엄군들 후퇴해버렸습니다. 도청 비었다는 거예요. 이제 저희들이 들어가고 나니까 시민들이 여기저기서 많은 시민들이 나와가지고 이제 그 승리의 환호성을 울렸죠. 야, 우리가 이겼다. 저 잔인한 공수부대를 우리가 몰아냈다. 너무너무 기뻤지요. 뭐, 내 생애에 그렇게 기쁜날은 없었지요. 아직까지는 그렇게. 모르겠어요. 나 우리 아들 태어났어도 그렇게 안 기쁘더라구요. 그때부터 질서가 잡혀가는 거예요. 이제 고등학생들 저희들이 이렇게 완장을 차고 질서유지, 질서유지 이렇게 함성을 지르면 사람들이 다 거기에 이렇게 따라주고. 특히 금남로쪽 상가들 다 문을 열고 또 문을 열고 좀 활기찼었어요 사람들이. 활기차고 그 다시 일상적인 이런 생활로 돌아가고 그런거죠. 아주 분위기들이나 뭐 무지 평화롭구요 우리가 가면 광주시민들 다 일제히 그냥 박수치고 양동 아줌마들이나 된동 아줌마들이나 의미할 것 없이 그냥 밖에 나와있는 사람들 서로 고생한다고 그냥 거 가서 막 그냥 물같은 것도 바가지로 물건 퍼서주고 먹고 활동을 해야한다면서 그렇게 주고. 동네 구별마다 아줌마들이 길가에다 솥단지 걸어놓고 불때가지고 우선 거기서 어떻게 차려줄 수가 없으니깐 주먹밥만 소금만 쳐가지고 거기서 해서 차에다가 막 실려주고 나눠주고. 어머니들이 자꾸 밥먹으라 해갖고 금방 먹고 왔습니다 하면은 아쉬워하는 그런 분위기였죠. 그러니까 더 주고 싶어하는. 주는데 저희들이 안 받잖아요. 그게 어머니들 마음에서 이놈들아 더 묵고 해야제, 하면서 그렇게 안타깝게 말씀하시고. 뭐 아까운 것이 없었어 그때. 아까운 것이 없이 그냥 있으면 다 주고 싶었어. 시위차량 타고 다니면은 고생한다고 밥 올려주고 뭐 박수쳐주고 얼라들 손잡아주고 근데 시위했다는 것보다 많이 뿌듯해요, 제가 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진짜 국민을 위해서 광주시민을 위해서 진짜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 하고 있는가보다 그러니 내가 진짜 장한 일을 하고 있구나, 그래서 마음이 뿌듯한 것이죠. 이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군인들 상대로 하는 것이 이거 잘한일인가 하는 내가 해도 되는 일인가 하는 이런 약간 꺼리는 마음, 마음 속에 하나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들이나 그 어른들이 그렇게 자발적으로 갖다 주고 뭐 막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그런 마음들이 사라졌죠. 아 그래도 내가 하고 있는 요러고 하고 있는 것들이 우리가 요러고 하고 있는 것들이 나쁜일은 아니구나 하는.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신나죠. 엄청 신이 났었죠. 우리가 진짜 무슨 국가를 위해서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서 참 뭔가를 하고 있다는 그 뿌듯한 느낌이 대단했었죠. 정신없이 한거죠. 만약에 그런 새로운 몸에서 느껴지는 그런것들이 없었으면 일 한다는 것이 어렵죠. 그러니까 저희들이 가니까 그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그리고 무장한 시민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죠. 왜, 도청은 하나의 상징이였으니까요. 또 사실 그런 해방감에 만취되어 가지고 시민 궐기를 할때는 정말로 말그대로 엄청난 분위기였습니다. 저희들이 느낄때도요. 눈물을 흘릴 정도니까요. 그 뭐랍니까, 애국가를 부를때는 그 가슴에 꽉, 그 저기 벅차오른다고 할까, 뭐라고 합니까, 목에 가 뭣이 꽉 맺히잖아요. 막 눈물도 날라고 하고. 그랬어요. 그니까. 눈물도 날라고 하고 모든 사람들이 같이 이렇게 하잖아요. 전부 같이, 똑같이 노래 애국가 부르고 그러니까 벅차더라구요, 벅차. 정말 다들 울고 그러죠. 저도 많이 무진장 울고 굉장히 평상시 부를때 느낌하고는 완전히 다르죠. 거기 자기 감정들이 이렇게 들어가면서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굉장히 절실하게 느껴지고 의미가 다시 생각이 되고. 같이 구호를 외치고 무슨? 했을 때 시민들이 호응해주고 그러면 전체가 나를 나뿐만 아니라 그 분수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랑 또 시민전체가 하나가 된 듯한 느낌. 그니까 저는 하나된다. 그 하나된다 라는게 듣기에는 하나된다라는 실감을 사실 못했었어요. 근데 바로 이게 하나되는 것이구나. 그 젊은 여성들이 와가지고 자기들이 도울 수 있겠는게 뭐가 있겠는냐고 자기들이 자청해서 왔는데 특별히 도울 일이 없으니까 나중에는 그 부상당해가지고 굉장히 고통당한 그런 부상자들을 위해서 자기들이 간병을 자처도 하고 또는 소변이나 대변 보는 것도 수발 다하고 음식물도 해다가 먹이기도 하고. 병원 문이 이렇게 그냥 아주 정말 미어지게 그렇게 나도 헌혈을 하겠다 하고 막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들은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노인이고 좀 병약한 사람들은 좀 안되겠어서 아이고, 저기 들어가시야겠다고 그러면 무슨 소리냐 피라도 내가 이렇게 빼서 그 부상자들을 치료해줘야지 내가 광주시민이고 일륜도덕에 맞는 행위지. 엄마가 그랬대. 여학생이였는데 엄마가 다들 저렇게 하는데 너도 나가서 뭔가 할일이 있는가 가보고 와라, 궁금하니께 밖에 소식도 알아와 보고 너도 뭔가 할일이 있나 가보고 와라. 그래서 엄마가 그래서 나왔다고 그러더라고 그 학생은. 언니는 왜 왔어요 그래서 아니, 뭔가 해야할 일이 있을거 같아서 와서 하고 있다. 그게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난, 누가 너는 뭘해라 너는 뭘해라 이렇게 지정을 해서 누가 시킨일이 아니고 그 상황에서 보고 내가 광주시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해야될 일이 무엇인가를 느끼면 그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즉 공수부대 애들한테 맞아죽은 그리고 총에 의해서 죽은 그 시신들 수습을 해야될거 아닙니까, 근데 누가 누구에게 지시를 하거나 부탁한 사실도 없는데 어디선가 관이 오고 어디선가 태극기가 오고 그 다음에 누군가 그 시민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염을 하고 입관을 하고 이런것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겁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배려를 이렇게도, 이렇게까지 이렇게 깊고 높게 할 수 있겠구나 이런것들이 전부 우리모두 공유하게 된 겁니다. 또 무엇을 이렇게 그 사람 그 생각으로 하는게 아니라 뭔 신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움직여 진 것 같았어요. 그 일을 할때는 내가 왜 이래야 되는지 내가 왜 이렇게까지 돌아다녀야 되는지 그리고 내가 또 왜 이런데 밤에 이런 창고같은 강당에서 등 붙이고 있는지를 목적이 없어져 버린다고. 내가 의식을 못해요. 왜 있는지를, 시간 가는지를 모르고. 그 흥분속에서 그리고 좌절감 속에서.



제가 YWCA에서 대자보를 줄때에 대자보 초안을 선배분들이 써서 줍니다. 그걸 따라서 배껴서 이렇게 쓰는데 어느 한분이 야, 인제 이 전두환 이 계엄군들이 이렇게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에 대해서 그 미국이 부산항에 함대를 파견했다. 그래서 이것을 견제하려고 한다. 이제 우리의 승리는 눈앞에 있다. 아, 그러면서 좋아가지고 그 내용을 빨리 급보로 해가지고 속보로 해가지고 썼습니다. 그래, 전두환이 너는 이제 죽었다. 그러는거죠. 너는 죽었다. 미국함대가 우릴 도우러왔다.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고 미국은 민주주의 국간데 우릴 이대로 가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미국이 들어올 것이다. 그때까지도 미국에 환상을 하고 있었죠. 미국이 가만히 있지를 않을 것이다. 자국민들을 저렇게 학살한 이 군사정권을 미국이 도와줄 수가 없다. 전부 사람들은 그때 당시에는 굉장해갔고 이제 전두환이 이거 이제 견딜 수 없게 물러날 것이다. 그런줄만 알았어요. 근데 이제 방송을 들어보면은 방송에선 전혀 안나오지 외곽으로 통하는 전화선은 다 끊어있지. 또 중앙방송에서는 폭도라고 계속 매도를 하지. 방송조차도 안되, 아예 안나오니깐요. 광주에서 그렇게 해도. 근데 해방을 맞았지만은 그런 광주의 어떤 상황이 전혀 외곽으로 알려지지 않은 겁니다. 계엄군들이 다, 헌병들이 계엄군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외부로는 개미새끼 한마리 나갈수가 없다고 그랬었어요. 그러고 있다가 도청 앞으로 왔는데 우리 오빠가 한 얘기가 있었어요. 나한테 죽지만 마라고 그랬어요 우리 오빠가. 너 죽지만 마라. 그러나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지금 서울을 갈라고 해도 빠져나갈 수가 없다고 그랬어요. 광주에서는 갇혀버렸어요. 이제 시위하는게 갇혀버렸어요. 외곽으로 알려야 겠다는 생각 때문에 나갈라다가 못나가고 난 광주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때 우리 미니버스 탄 사람들만 다시 들어왔는데 그 나머지 사람들이 거기 통과 못했을거야. 다. 이것이 광주에서만 이렇게 할일은 아닐 것이다. 서울에서 할걸로 생각했거든요. 그때는. 다른 딴 지역에서도 이렇게 할 것이다. 광주만의, 방송은 자꾸 그래도 지금 광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우리가 계속 버티고 계속 하다보면은 서울에서도 할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할 것이다. 우리하고 다 마음이 같을 것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어가지고 그런 기대도 많이 가졌습니다. 솔직히. 전국에서 이렇게 시위가 일어나기를. 전남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우리를 관심깊게 지켜보고 지원해줄거다 이런것들이 있었어죠. 그러니까 일말의 뭐, 기대감, 희망, 공포, 이런것들이 수시로 변화하고 교차하고 이랬었었죠. 3일날, 4일날, 5일날 지나면서 부터 이제는 긴장해서 그런 얘기는 안나오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지 않느냐, 서로 격려를 하면서 위로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죠. 날짜가 갈수록 긴박한 상태가 됐었죠. 나가서 트럭타고 나가갔고 공수부대랑 접전을 하고 그런것이 아니고 사방데서 죽고 쓰러지고, 총맞아 죽었단 소리가 들어옵니다 이제. 또 헬기는 이제는 공중 높이 보이지도 않아요 헬기소리만 들리지. 거기서 유입물들 해산하라, 폭도들은 해산하라. 곧 군인들이 진압에 나선다. 당신들이 이렇게까지 저항을 하게 되면 당신들에게 남겨진 것은 죽음뿐이 없다. 그런 유입물들이 계속 뿌려집니다.



그래서 계엄당국에서 80년 5월26일 12시까지 도청을 비우고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무력으로 진압하겠다. 그래서 그 내용을 도청에 있는 사람들한테 다 알렸습니다. 이렇게 계엄군이 무력진압을 하겠다고 최후 통첩을 해왔기 때문에 집에 갈 사람들은 가거라, 그리고 끝까지 계엄군하고 계엄군에게 저항을 할 사람들은 남아도 좋다. 도청을 비우고 우리 해산하자, 이창기군이 그런 이야기고 아무런 보장도 없이 이대로 갈순없다. 우리는 여기서 죽겠다. 그 당시에 들어간 사람들을 나는 비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들어가라고 했으니까. 살고자 하면 들어가시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우린 여기 남아 있으면 오늘 저녁에 여기가 우리의 무덤이 될거니까. 그런생각을 했어요. 원망스럽다 이런것들은 뭐 별로 없었어요. 기왕에 나는 죽겠다라고 생각했고 또 그런사람들은 산다고 생각한 사람들이고. 죽으면 광주시민 다 죽는거 아니고 소수만 죽잖아요. 그날 저녁에 거기 있는 사람만 죽으니까. 당신들이라도 살아서 다음에 뭐 제대로 얘기해주겠지. 뭐 그때는 그랬지. 십년이 갈지 백년이 갈지 그야 모르지만은 언젠가는 이 얘기가 나오겠지. 그렇게 생각했죠, 뭐. 거기에 당시에 있었던 시민 대다수는 이것을 지킬 수 있다는 어떤 힘보다는 무너진다는 것은 뻔히 알고 있습니다. 안된다는걸 알아요. 당한다는걸. 그러니까 이제 저희들한테도 그렇게 나가라고 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나왔구요. 또 사실 시민군들 중에서도 고등학생이나 이런사람들은 너 총놓고 나가라. 우리 광주는 우리같은 사람들이 지킬란다. 그리고 또 젊은 사람들이라던가 연약한 사람들은 이미 여고생들 같은 경우 자원봉사 해가지고 밥해준다고 해와준 사람들, 다 나가라고 했습니다. 들어간 친구들도 있고 실제로도 많이 남았어요. 많이 남아가지고 가라고 해도 저 갔다고 또 와이서 가라고 하면 도청으로 들어간 이런 친구도 있고. 도청서 가라면 또 와이어 온 친구도 있고.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잖아요. 근데 갈수가 없잖아요. 가면 배신자죠. 그 사람들 죽게끔 죽어가는걸 지켜주지 못했으면은 같이 죽어야죠. 그러면 이제 우리가 거기에서 몇몇사람들끼리 하는 얘기가 우리가 죽으면 누가 씻겨줄 사람도 없을건데 목욕이나 하자. 어차피 죽으면 맞이해야 돼, 어차피. 그리고 목욕하고, 목욕하고 속옷 싹 갈아입고 그리고 차분하게 거기서 맞이하고 있었어요. 왜 저라고 두렵지 않겠습니까. 두렵기도 많이 했었고 진압군이 들어온다 했을때는 내가 이대로 죽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었고. 그리고 밥을 다 먹고 난 연우에 그 YWCA안에 강당이 있었던 이 철제의자입니다. 이 철제의자를 전부 모아가지고 현관에다 바리게이트를 쳤습니다. 산더미같이 바리게이트를 쳤어요. 그리고 이제 하도 졸리길래 YWCA 그 뒷편에 조그만 식당방이 있었습니다. 그 식당방에 가서 보니까 사람들이 칼잠을 전부 이렇게 하고 자고 있어요. 저도 그 틈바구니에 눈좀 붙여야겠기에 하도 피곤하니까. 근데 이제 저희들도 지칠대로 지쳐버린 것이 20일 벌써 일주일이란 시간이 가니까 제대로 못먹어 지친게 이제 설마 올라디, 설마. 그러고는 자버린거죠. 잠자고 있었지. 참으로 이상하죠, 어떻게 보면. 죽음에 이른 현장이 도처에 널려있는 그런 상황인데 아무생각이 안들고 너무 피곤하니까 피곤이 몰려와서 잠을 잤던거죠. 총을 옆에다 품고 이렇게 칼잠을 막 눈을 붙였을까 말까 하는 순간에 싸이렌이 왱 울리면서 광주시민여러분, 광주시민여러분, 계엄군이 도청으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모이십시오. 그 갸날프게 어둠을 뚫고 흘러오는 그 시민여러분 우리 다 죽습니다. 공수부대가 오늘밤 도청을 함락합니다.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하고 외치고 다니는 그 소리를 광주시민 들은 사람마다 전부 가슴이 찢어졌을 것입니다. 기절할 정도로 가슴이 찢어질라 그러더라고. 그 말소리 음성소리가 여자소린데 여자가 세상이 이 폭탄 속에 그 방송을 하고 갈때 너는 영웅이다. 너는 어쨌든 죽지말고 살아라. 그 생각이 들더랑게. 그런가 하면 섬광이 번뜩번뜩하고 정말 그 차갑, 밤이니까 새벽이니까, 그 탱크가 장갑차가 굴러오는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문창 틈으로 들어보니까 소대별로 해가지고 사지걸음으로 올라가요. 올라가서 12 그때 거의 되어가지고 총소리가 나기 시작해요. 그래, 이건 공포탄이다. 이거 공포탄일 것이다. 계엄군이 이렇게 딱 들어와요. 하얀띠를 딱 두르고. 외곽에서 딱 소음이 들잖아요. 총소리가 막 다다다나고. 계속. 그런데 이제 거의 다 들어오구나 하는데 앞에 담을 딱 이렇게 타고 돌더라구요. 두명이. 총이 이렇게 딱 나오더라구요. 총이. 총이 딱 이렇게 올라오길래 이제 머리가 보여야지 쏴버릴거 아닙니까. 머리가 보이는게 아니라 손이 나오더라구요. 그러다 보니 그냥 쏴버리더라고. 그래가지고 막 사방에서 총소리가 났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깐 이 계엄군들이 적어도 광주중심부로 진입하는 모든 도로에 군인들이 다 들어왔더라고. 그것도 이렇게 엠오16 소총 자동상태 해놓고 계속 발사를 하면서. 얼마나 총소리가 콩볶듯이 나더니 그 시간이 바로 계엄군이 광주시 전체와 도청과 사직공원을 무력진압을, 무력정복을 하는 그 총소리예요, 그렇게 고막을 울렸죠. 얼마나 다다다다. 와 이제 진짜 죽는다고 받아들였는데 아까 조금전에 그 잽히기 전에 왔다갔다 하고 새벽에 그때 그 밀려들어오는 그 공포에 대한 것은 그때 그렇게 많이 느꼈습니다. 내 인생에서 최고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계엄군 들어온다 생각한 그 순간부터는 진짜 엄청난 그 시각, 짧은시간이지만은 그 공포, 그 순간은 나중에 진압되고 느껴보니깐은 그동안에 있었던 날짜보다 더 길었던 거 같아요. 시간이 빨리가서 날이 빨리 샜으면 좋겠더라구요. 날이 환해지면은 시민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러면 계엄군들이 진입을 못할 것이다. 그런 기대감. 아마 제 생에서 그 몇시간에 밤이 제일 길었던 것 같아요. 전투가 시작되서 전투를 하면서도 빨리 날새기를 기다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