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이 많은 우리의 감시선들이 산업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밀수행위를 단속하고 있다. 한나라의 밀수행위가 성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나라의 경제발전을 저해할뿐만 아니라 자립경제 터전을 허무는 것이다.

1965년 2월19일부터 1966년 1월15일까지의 밀수사범 검거실적을 보면 총건수 2168건에다 검거인원이 2511명, 압수금액이 3억원을 넘고 압수선박이 40척, 그리고 나이롱 선원수첩 취소자가 395명이였다. 그동안 압수된 밀수선박들은 거의 휘발유 엔진으로써 최고 시속 20내지 30노트나 되므로 우리 경비정으로써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실정이였다. 한편 여태까지의 밀수행위 상황을 살펴보면 최학태, 윤의용등을 비롯한 많은 밀수범들은 밀수전과범들로써 516이후 일부는 검거되고 일부는 도피중에 있다가 제3공화국 수립 경축대사령에 의해서 사면되자 다시 밀수망을 조직하고 밀수 쾌속정까지 신주한 후에 소위 해상밀수 특수대를 조직해서 일본 대마도의 이즈하라를 내왕하면서 연간 200만달러 상당의 조잡한 일제 물건을 마구 사들여서 한국의 산업발전을 저해해 왔던 것이다.

1966년 1월8일 14시 30분 부산 제1부두에 정박 대기중인 해군함정 PC2C55함인 목포함에 서주연 단장을 비롯한 일행 13명이 승선, 그 임무수행에 나섰다. 이번에 임무는 공동규제 수역, 또는 전관수역내에서 어로작업을 빙자해서 물물교환에 의한 밀수행위가 성행하고 있다는 통설에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였다. 승함한 수사관 일행은 우선 항로에 대한 브리핑을 들으면서 부산항을 출발했다. 한때 밀수우범지로 악명 높았던 청학동 7반과 9반, 신선대 영도등을 두루 살피며 10노트의 시속으로 대마도 해면을 향해서 달렸다. 목포함 승조원의 절도있고 명활한 활동을 취하면서 약간의 부식과 기념품을 증정했다. 조사단은 대마도 근해에 배치되어 있다는 수산진흥원 지도선을 무전으로 호출, 약 15해리를 향해, 부산과 대마도 간의 공동규제 수역까지 이르렀으나 대치되어 있으리라는 지도선을 만나지 못해서 끝내 아쉬운 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대마도 앞을 떠나서 서해쪽으로 가기로 했다. 부산에서 대마도 북단까지 65해리. 밀수의 본거지인 이즈하라까지는 78해리로써 밀수 쾌속정으로 불과 세시간이면 이즈하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즈하라에는 수습이상회, 동서무역, 일한상회 등, 도합 여덟개 상사가 일한 변칙무역이라는 미명하에 밀수행위를 감행해온 것이다. 대한 밀수액은 놀라웁게도 대마도 연간 예산의 절반을 점하고 있다는 것이며 또 얼마만한 예산을 소비했는지 그 천문학적 숫자는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년 6월19일 밀수사범 특별합동수사반이 발족한지 불과 두달남짓해서 이 대마도의 밀수행위를 봉쇄하고 이제는 이즈하라 항구에는 밀수선 해광호 한척만이 발이 묶여 있을 뿐이다. 지난해 8월 밀수선 영덕호가 일본 대마도 근처에서 우리 감시선에 의해서 격침당한 일도 있었다. 아무리 봐도 대마도는 우리 영토라는 단장의 유무를 들으면서 항해를 계속했다.

잔잔한 바다 위에 고요가 깔리기 시작할 무렵 한 척의 우리나라 어선을 발견했으나 상어 십여마리 밖에 잡지 못했다는 것이였다. 시속 전관수역내 서남방향으로 67해리를 항해해서 1월9일 4시경 상백도 근해에 이르기까지 일본어선의 어로작업은 발견치 못했으며 상어와 잡어를 잡고 있는 우리 어선만이 드문드문 보였을 뿐이다. 다시 난오도 근해에 배치돼 있는 무등산호와의 교신을 꾀했으나 응신이 없어 항해는 그대로 계속됐다. 1월9일 새벽 6시반경 68해리를 항해해서 추자군도 근해에 이르렀을때도 피아간 조업중인 어선은 없었고 망망한 대해 뿐이였다. 그래서 계속 66해리를 항해, 항도를 경유해서 이날 13시경 북위 34도 52분 동경 124도 45분 지점인 흑산도 근해 공동규제 수역내서 우리 지도선 조풍호를 만났다. 이 조풍호 선장으로부터 여러가지 상황설명을 들었다. 선장의 말은 이 배가 지도선으로써 작년 12월19일부터 주로 서해와 제주해상에 해로지도임무를 맡고 나왔으나 전관수역내서 일본어선을 목격한 사실은 전혀 없으며 각 도에서 파견되어 있는 지도선으로부터도 그와 같은 보고를 해온일이 없다는 것이였다. 서해일대는 현시기로 봐서 성어기가 아닌 까닭같다는 등에 현황을 청표했는데 이 조풍호는 농림부 소속 지도선으로써 매일 3회이상 즉 9시, 12시, 16시에 당일에 상황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날 23시 30분경 북위33도 44분 동경 125도 해상에서 약 30여척의 우리어선단이 야간어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풍호와 헤어져서 남쪽으로 항해하고 있을때인 10일 0시경부터 거칠기 시작한 파도는 3.5미터로 높아지자 시속을 8해리로 낮추고 서행, 10일 10시30분경 제주항 천미터 선방에 이르러서 수사반 일부는 제주도 어민으로부터 제주도 주위 전관수역과 공동규제 수역 내에서의 어로작업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하고 제주항에 상륙시켰다. 이 걷잡을 수 없는 풍랑을 헤치며 다음임무 수행을 위해서 동해쪽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11일 새벽1시경, 124해리를 항해해서 홍도 남방 15해리 근해에 이르렀으나 역시 일본어선은 발견치 못했으며 그대로 동북방향으로 북상해 갔다. 11일 아침 9시 방어진에 퉁요 후, 간포항에 보트로 방어진 어업협동 조합에 상륙했다. 어업협동조합에서는 조합이사장으로부터 여러가지 상황설명을 들었다. 설명내용에 의하면은 일본어선이 왕왕 전관수역내에서 어로작업을 했다는 것이며 10일에도 간포항 동방 8.9해리 해상인 전관수역 내에서 일본어선이 어로작업한다는 보고를 받은바 있다는 것이였다. 우리는 그곳 어민의 출어를 위한 준비를 잠깐 둘러본 후 일본어선이 출연한다는 지점으로 향해서 출발했다. 그러나 드문드문 우리어선의 작업밖에 볼 수 없었다. 1월11일 13시 20분경 북위 35도 47분 동경 129도 48분 해상에서 우리의 어로지도선인 수산진흥원 소속 북한산 호를 만나 일본어선의 작업현장을 문의했으나 목격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였다. 우리 수사반은 다시 간포 구룡포간에 공동규제 수역을 내왕하면서 기하에 어선을 탐색한 바 약 30여척의 우리나라 어선만이 어로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날 11일 15시경 북위 35도 42분 동경 129도 46분에 공동규제수역 해상에서 일본어선 니꼬마로외 7척의 어로작업에만 전념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그리고 우리어선도 가끔 보였다. 이날 19시 30분경 일흔일곱시간 750해리의 항해를 끝내고 무사히 부산항에 귀향했다. 다음날인 1월13일 11시35분경 단원중 이상원 수사관과 이명길 경감, 치안국 항공대 부산기지대 소속 항공기 세스나 화랑호에 탑승하고 우선 동해지구 답사에 출발했다. 같은날 13시 5분 간포동방 15해리 해상에서 일본 수산진흥원 소속 지도선 한척이 구룡포 방면으로 북상중에 있음을 발견했을뿐 그외 일본어선은 발견치 못했다. 다만 간포동방에서 우리어선 30여척이 출항중에 있음을 발견했다. 역시 이날 13시 38분경, 대마도 남단 18해리 지점인 공동규제수역 해상에서 일본어선 8척을 발견했으며 전관수역내에서의 일본어선에 어로작업상황은 발견치 못했다. 같은 날 14시 25분 부산기지에 귀착했다. 이상 답사한 바에 의거 비하어선간의 밀수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판단해보면은 첫째, 공동규제 수역은 내해가 아닌 대해므로 항상 파도가 있어 30내지 50톤급의 어선은 접선하기가 곤란하며 둘째로 일본어선의 대부분은 회사소속 어선이 많으므로 출하시 밀수품을 적선하기가 어려우며 셋째, 사전에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이 없이 마지못한 어선간의 물물교환이란 기대할 수 없으며 넷째, 피하 어선간의 거리가 수해리씩 간격을 두고 있을뿐만 아니라 쌍방의 지도선이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다는 점, 다섯째로 밀수전용선 40척을 검거, 압수한 현단계로썬 소위 특공대에 의한 밀수선이 아닌 일반어선으로써는 밀수가 곤란하다는 점 등에 비추어서 공동규제수역내에서의 양국어선간에 밀수행위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