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개발 통한 기술혁신 없이는 산업경제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오늘날, 과학기술은 우리나라 경제자립을 위해서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쇄도 요청에 의해서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께서 미국을 방문하셨을 때,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과 합의해서 두 나라 정부가 공동주관하는 종합적인 과학기술연구소를 한국에 설치할 것에 합의했습니다. 그해 7월 린든 대통령의 과학기술고문 호닉 박사 일행이 내한했습니다. 중대한 사명을 띠고 한국에 온 호닉 박사는 우선 청와대로 박대통령을 예방했습니다. 이어서 원자력연구소를 비롯한 각계 산업계 등 관계기관과 접촉. 연구소 설립을 위한 기술지원 방안을 조사했습니다. 같은 해 9월,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 전문가들이 내한, 연구소 설치에 관한 기본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이처럼 빈틈없는 계획 수립을 위해서 세밀한 조사와 협의를 거듭한 끝에 1966년 2월 한미 양국정부는 연구소 설립 운영에 제반 지원을 위한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1966년 2월 3일 설립자이신 박 대통령이 최형섭 박사를 소장으로 임명하고 11명의 인사로 이사회를 구성함으로서 비영리독립기관인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역사적인 발족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국내의 산업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국내 산업이 필요로 하는 산업기술의 연구 개발과 각종 기술 지원을 함으로써 산업기술 개발에 기여하기 위해서 과학 기술 및 공업경제에 관한 시험 연구와 조사를 종합적으로 수행하고, 그 성과를 보급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적 설정에 따라서 연구소에서는 먼저 산업실태조사를 실시, 연구 활동의 범위를 정하고 이에 필요한 연구요원의 자격 요건과 소요시설을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에 의해서 국내외서 연구요원이 충원 돼 훈련받고 있으며, 건물과 연구기기의 설치를 위한 세부적인 계획이 마련돼서 산업계가 필요로 하는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간 것입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는 산업과 직결된 연구를 하기 위해서 우선 한국산업의 당면 문제점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 과제를 선정하고자 자매연구소인 바텔기념연구소의 협조를 얻어서 1966년 11월부터 1967년 6월까지 8개월 동안 산업실태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이 조사에는 한국 측 전문가 57명과 바텔 측 전문가 23명이 혼연 되서 전국에 약 600개 업체를 대상으로 16개 분야에 걸쳐서 조사했습니다. 조사결과 판명된 분야별 문제점과 해결해야 할 연구과제는 조사 보고서에 작성돼서 연구소의 연구 요원과 건물 및 연구기기 설치 등을 위한 기본 자료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산업실태 조사와 연구요원의 충원 결과에 따라서 우선 재료 및 금속공업, 식품, 화학 공업, 전자 및 기계공업 등으로부터 연구가 착수됐으며 연구사업 별로 설치된 연구실이 현재까지 19개 설치됐고 앞으로 더 증설될 것입니다. 서울의 동부 홍릉에 자리 잡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설립이후 곧 부지 수입을 착수해서 국립임업시험장 구내 8만여 평을 확보, 1966년 10월 6일 설립자이신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서 내외 귀빈을 모시고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시설의 종합계획을 보면 우선 약 600여명을 수용 할 수 있는 제1, 제2 연구동, 본관, 공작 공장, 중앙기계공장 등 연구시설 만평과 아파트를 비롯한 주거시설 이천평 등 만이천여평의 건설을 1969년까지 완성합니다. 1967년 가을에 준공된 공관은 소규모 집회와 단기간 머무르게 될 과학기술자들의 숙소로 사용됩니다. 그 연구요원들에게 제공되는 주거시설 중 아파트는 이미 완공돼 입주했고 30평, 25평, 20평의 3종으로 구분돼서 총 40세대를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현대적인 시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밖에도 3동의 독립주택과 6동의 연립주택, 그리고 독신자를 위한 기숙사 외에 매점과 오락실을 갖춘 휴게실도 이미 완공됐습니다. 대부분 박사급으로 구성된 주요연구요원을 보면, 1969년 현재 국내에서 16명, 국외에서 21명, 계 37명이고 1970년까지 입소키로 계약에 서명한 분은 국외에서 10명으로, 총계가 국내에서 16명, 국외로 31명 계 47명으로서 국내 34%, 국외 66%의 비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박대통령께서는 1967년 12월 연구관들을 청와대에서 접견, 경제발전을 위해서 헌신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1970년까지 약 500명이 될 연구소의 총 인원계획을 보면 연구 및 기술직이 1966년에 15명에서 연차적으로 58명, 141명, 215명, 268명으로 계획돼 있고 행정 및 기타가 35명에서 90명, 132명, 192명, 226명으로 늘어나게 돼 있습니다. 국학연구에 의한 재정적 자립을 목표로 하고 있는 연구소 자금계획을 보면 1968년 현재까지 건설과 운영 기금을 위한 정부출연금 28억 원, 건설 자재와 연구기기 도입을 위한 AID 자금 720만 불, 합계 47억 원이 확보됐고 그밖에 연구기기 도입을 위한 AID 차관 200만 불이 있습니다. 연구소 소유 외자의 도입 역시 조세감면 규제법에 의한 면세 등 많은 편의를 받고 있습니다. 외자에 의해서 도입된 연구기기는 현재 계획대로 속속 입하 설치 되서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시작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한편 연구요원들은 이미 그들의 연구업무에 착수 수시로 산업일선의 기술자들을 방문해서 기술적인 문제를 토의하고 연구소의 설립 목적을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동시에 국내외 각 대학 연구기관 및 학회와 협조해서 심포지엄, 세미나 등을 개최해 연구 성과의 상호교류, 산업계와의 밀접한 연락을 유지하며 그 보급을 기하고 또한 연구개발에 관련된 인재양성과 훈련에도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연구소는 1968년 9월 미국 바텔기념연구소에서 국제심포지엄을 또 서울에서는 전자공업 세미나를 가진 바 있습니다. 또한 과학기술의 선진국과의 교류를 위해서는 바텔기념연구소와 자매관계를 맺은 한편 책임 연구원들은 최소한 3년에 한 번씩 해외에 나가 새로운 지식 기술의 습득 기회를 갖게 하고 있습니다. 한편 1967년 이후 수탁 연구 활동에 착수, 현재까지 80여건의 연구위탁을 받아 활발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산업발전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종합적인 연구개발 기관으로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지난 2년 반 동안 각계의 협조로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돼서 장차의 본격적인 연구 사업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이제 갓 출발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우리산업과 경제발전에 기여하게 될 때 우리도 선진국의 대열에 서게 될 것이며 잘 사는 국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