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대회 이렇게. 제 1편 대회유치 및 조직위 동정. 19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에서 외친 서울은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또한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1988년 제 24회 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는 투표결과를 발표하자 세계 언론들은 예상을 뒤엎는 서울의 승리를 기적이라고 평했습니다. 서울 52, 나고야 27은 우리들에게 승리 이상의 민족적 자부와 감격을 안겨주었다. 그러면 여기서 서울올림픽대회의 유치과정을 살펴보자. 1979년 10월 8일. 박영수 서울시장이 국내외 기자회견을 통해 제 24회 올림픽대회를 서울에 유치할 것을 정식 발표하면서부터 표면화됐다. 이에 앞서 올림픽 유치문제가 정식 거론된 것은 1979년 4월부터이며 공식발표 이후 10.26사태로 인한 정국의 혼미로 한때 서울올림픽 유치결정이 표류하고 있었으나, 전두환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확고한 방침이 확정됨으로써 본격적인 유치활동에 나섰던 것이다. 여기서 역대 올림픽대회의 개최현황을 보면 서울 올림픽대회가 열리기까지 23회를 기록하고 있으며 1916년과 1940년, 1944년은 1, 2차 세계대전으로 대회가 유산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의 올림픽 참가현황은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대회에 참가한 이래, 정식으로 태극기를 앞세운 대회참가는 1948년 런던대회에서부터였으며 21회 몬트리올 대회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다. 1981년 12월 21일,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한국인의 평화의지와 화합과 번영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사명감을 짊어지고 재단법인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가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조직위원회 발족경위는 1981년 10월 31일,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및 지원위원회 설치안이 확정된 이래 11월 2일, 조직위원회 발기인 총회. 11월 26일, 조직위원회 설립등기. 12월 21일, 현판식이 있었고. 12월 31일,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지원법이 재정, 공포됐다. 발족 당시의 조직위 직책은 위원장, 사무총장, 1, 2차장, 기획실, 3과, 6기획위원으로 되어있었으며 대회 종료 시까지 21회의 직책개편이 있었다. 그리고 정부, 국회, 민간인의 지원기관이 각각 설치됐다. 1982년 4월 10일,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아시아지역 순방길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그는 조직위의 준비상황을 보고받는 한편, 주경기장의 건설상황과 그 밖의 경기장을 시찰했다. 이어 레바논 가브리엘 IOC 위원 등, 전문운영위원들이 올림픽대회 준비상황을 협의하기 위해 한국을 다녀갔다. 대한체육회 제 10차 이사회 및 대한올림픽위원회 제 7차 상임위원회 합동회의에서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에 조상호 대한체육회 회장을 선출하고, 5월 25일 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를 발족시켰다. 9월 14일, 국제경기연맹연합회 토마스 켈러 회장이 조직위를 방문했다. 그리고 10월 24일에는 IOC 사무총장 모니크 벨리우 일행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에 앞서 9월 30일에는 올림픽유치 기념주화를 발행했다. 3월 18일 모로코 벤젤룬 IOC위원 일행이 조직위를 방문하고 경기장 등 시설을 둘러봤다. 조직위는 4월 1일부터 올림픽복권을 발행하기로 하고 한국주택은행과 업무대행계약을 체결했다. 7월 11일, 2대 조직위원장에 노태우 당시 내무부장관이 취임했다. 9월 22일, 쉐이크 파하드 IOC 위원이 조직위를 방문했다. 그리고 서독의 다우매 NOC위원장도 10월 5일 조직위를 방문했다. 조직위는 그간 현상공모한 마스코트 대상물 4,344건 가운데에서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호랑이를 마스코트 대상물로 확정했고 서울올림픽 휘장은 지명공모의 방법으로 서울대학교 양승춘 교수의 작품을 확정했다. 4월 14일, IOC 집행위원 일행이 한국을 방문하고 준비상황을 둘러보았다. (안 들림) 노력과 함께 최우선적으로 북한의 서울올림픽 참가를 위해 노력을 경주했다. 4월까지 판문점에서 3차에 걸쳐 남북체육회담을 열었으나 북한 측의 억지 주장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5월 24일,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안전을 이유로 한 일부국가들의 개최지 변경 논의와 관련해 결코 개최지 변경은 있을 수 없다고 천명했다. 11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제 4차 ANOC 총회는 전 회원국의 참가를 선언했으며,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이 서울올림픽대회에 참가할 것을 시사했다. 조직위는 1월 31일, 마스코트 호돌이의 응용동작을 제작, 발표했다. 마스코트의 형태전개는 스포츠, 대회보조, 민속주제, 그림문자의 네 부분으로 나뉘어 제작됐다. 3월 2일,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위한 범민족올림픽추진 중앙협의회가 발족됐다. 3월 29일, 올림픽기금 25억 원 조성을 목표로 한 기념우표 8종이 처음으로 발행됐다. 4월 29일, 조직위는 서울대 조영제 교수가 제작한 공식 포스터 시연을 시사위원회의 심의를 걸쳐 채택했다. 계속해서 경기, 문화, 행사, 예술 포스터 등이 제작됐다. 6월 5일, 스포츠 픽토그램 27종이 제작되어 선을 보였다. 이 픽토그램은 각국의 언어차이에서 오는 의사전달의 불편을 극복하고 서울올림픽대회의 고유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제작되었다. 6월 5일, 동베른에서 개최된 제 90차 IOC 총회에 노태우 조직위원장이 참석하여 15개 항목별로 서울올림픽 준비상황에 대한 공식보고서를 제출했다. 90차 총회는 89차 특별총회의 결의에 따라 IOC헌장을 계승하고 서울올림픽 때부터 각 NOC에 초청장을 IOC 명의로 발송할 것이며, 각 NOC는 4개월 이내에 참가여부를 회신하도록 의무화했다. 10월 6일, 영국의 필립 공이 조직위를 방문, 대회준비상황을 청취하고 경기장 등 올림픽 시설을 둘러보았다. 9월 11일, 올림픽 기념품 전시회의 문을 열었다. 9월 24일까지 계속된 이 전시회에는 많은 내외인사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7월, 홍보안내센터 123개가 설치된 데 이어 10월 29일, 서울 남산의 서울타워에 상설홍보전시관이 개관돼 1987년 10월 20일까지 운영됐다. 2월 7일, 조직위원회는 집행위원회 총회를 열고 집행위원의 정수를 20인에서 25인 이내로 위원회 수를 50인 이내에서 55인 이내로 하는 제 7차 정관회정을 의결했다. 2월 10일, 관계기관 각종회의를 개최, 서울올림픽과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 대비한 공동 대처방안을 협의했다. 박세직 조직위원장 직무대행은 ANOC 총회에 즈음해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ANOC 서울총회를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서 그동안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는 KOC와 체육부 등 이하 장관과 긴밀히 협조를 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4월 21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개막된 제 5차 ANOC 총회에는 ANOC 총회사상 최대 규모인 152개 NOC에서 모두 771명의 대표단이 참석, 성황을 이뤘다. 이날 노태우 조직위원장은 ANOC 총회의 참가자들을 위해 만찬을 베풀었다. 조직위는 6일간의 총회기간에 서울올림픽대회의 준비상황을 152개 NOC에 상세히 전달, 최다 NOC 참가 시작의 기틀이 되기도 했다. ANOC 총회에 참석했던 바스케스 라나 ANOC 회장은 만찬을 베풀고 서울의 노력에 보답했다. 조직위의 국제체육기구와의 협력관계는 폭넓게 전개됐다. IOC 총회, IOC 집행위원회, 기타 체육관계 회의에도 참석. 최다참가 목표달성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5월 7일, 조직위 집행위원회 및 위원총회에서 박세직 위원장 직무대행 겸 체육부장관을 제 3대 위원장으로 선출했으며 노태우 위원장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이어 위원장 이, 취임식이 있었다. 5월 15일, 대법원장이 올림픽회관 조직위를 방문, 박세직 위원장의 영접을 받았다. 6월 4일에는 각 신문, 통신사 관리인단이 올림픽회관의 조직위를 방문했다. 6월 5일에는 국무위원, 6월 13일에는 감사원장 일행, 6월 18일 국정자문위원장, 7월 2일에는 외교사절단 일행, 8월 4일에는 (안 들림) 체육부장이 조직위를 방문했다. 서울아시아경기대회를 계기로 총 46회에 걸쳐 연 인원 1,800여명이 참가한 ASOIF 국제스포츠회의가 9월 15일부터 10월 5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됐다. 9월 16일과 17일, 제 5차 하계올림픽종목 연맹연합회 총회도 개최됐다. 그리고 11월 11일에는 88대회를 위한 세계 방송인 회의가 있었다. 12월 5일, 제 4대 김옥진 사무총장이 취임했다. 1월 26일, 평화의 문 기공식이 올림픽공원 내의 건립현장에서 거행됐다. 이 평화의 문은 서울올림픽대회를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세우기로 했다. 조직위는 각종 협의회와 위원회를 구성하여 분야별로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고 안건을 협의했다. 대회 경기분야의 준비와 운영에 관한 의견을 듣고 협조를 구하는 목적으로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과 김운용 조직위 부위원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고 35명으로 구성된 대회 운영협의회가 1월 30일 발족됐다. 한국과 외교관계가 없는 동독의 에발트 체육장이 3월 4일, 올림픽회관을 방문하고 대회 준비상황을 점검하는 한편, 올림픽 참가에 대한 현안 문제들에 대한 대책에 관하여 설명을 들었다. 슐츠 미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하는 기간, 올림픽회관의 조직위를 방문하고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다짐했다. 4월 6일, 올림픽 조직위에 관한 세미나가 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밖에도 올림픽에 관한 세미나가 수시로 열려 관심을 끌었다. 조직위는 대회준비업무를 보다 능률화하고 신속, 정확을 기하기 위해 컴퓨터 사무자동화기기를 활용했다. 이 기기를 널리 익히기위한 전시회가 4월 23일,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4월 27일, 국제스포츠기자연맹 회원들을 위한 위원장주최 만찬이 신라호텔에서 있었다. 박세직 조직위원장은 5월 10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개최된 제 92차 IOC총회에서 조직위의 각 분야별 준비상황을 소상히 보고했다. 우정의 사절단이 서울올림픽대회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큰 몫을 했다. 4월 16일, 대회순방을 마친 사절단 일행이 회관을 방문했다. 6월 22일, 루마니아의 시페르코 IOC 위원이 조직위를 방문했다. 10월 8일, 제 4차 남북체육회담이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됐다. 이 회담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은 KOC가 탁구 양궁 여자배구 축구의 예선 1개조 경기를 북한에 넘겨주는 등 중재안을 냈으나 한국의 김종하 KOC 위원장은 이를 수락한 반면, 북한의 김일수는 전문으로 공동주최안을 역제의해왔다. 조직위는 1986년 3월, 미국의 NBC와 서울올림픽 미국지역 방영권 계약을 체결한데 이어 4월 4일, KBS와도 주관방송사로써 조직위와 세부계약서를 체결했다. 조직위는 청소년회관을 지어 청소년의 체육문화시설의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10월 15일, 청소년체육문화시설 기공식을 거행했다. 10월 31일, 스포츠과학학술 세미나가 열려 서울올림픽때에 개최되는 스포츠과학학술대회에 대비했다. 11월 4일, 한국과 미국의 우의를 다지는 한미 우정의 마라톤주자가 회관을 도착, 관계인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1월 11일, 박세직 조직위원장은 조직위를 방문한 앤 공주를 접견하고 환담했다.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11월 17일 조직위를 방문, 조직위 관계자들과 여담을 나눴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자신이 증정한 동상을 제막하고 이어 환영연에 참석, 서울올림픽대회의 성공을 다시한번 다짐했다. 서울올림픽의 해, 1988년이 밝았다. 1981년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후 7년간 88올림픽을 향한 국민들의 열망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서울올림픽의 해를 맞이해서 오늘 친애하는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임직원 여러분과 함께 시무식을 갖게되어서 여러모로 기쁘게 생각을 합니다.” 세계에 흩어져 살고있는 한민족 동포들의 성원이 줄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동포들이 후원회를 조직하여 성금기탁과 함께 성공을 염원하는 기념품들을 보내왔다. 1월 15일, 대만거주한인후원회는 목제호랑이상을 조직위에 기증해왔다. 1월 17일, 성공올림픽을 위한 기도회가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있었다.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도 1월 25일, 성공올림픽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조직위를 방문했다. 1월 26일, 올림픽 성공 다짐대회가 개최됐다. 각계인사의 성원과 서울올림픽을 기원하는 전 국민의 염원이 그 발길을 올림픽회관으로 옮겨놓게 하고 있었다. 민정당 대표위원도 조직위를 방문했다. 5월 31일,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올림픽회관을 방문, 문제를 협의했다. 특히 사마란치 위원장은 서울올림픽을 위해 새로 설계된 성화봉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6월 1일, 올림픽수영경기장 개관을 기념하는 국제수영대회가 열렸다. 올림픽공원안에 위치한 이 수영장은 평영풀, 다이빙풀, 연습용풀을 갖추고 있으며 만명을 수용하는 초 현대식 수영장이다. 여러나라에서 출전한 선수들은 화려한 개막식에 이어 불꽃튀는 열전에 들어갔다. 6월 13일, 이현재 국무총리가 조직위를 방문하고 격려했다. 6월 16일, 재일거류민단 후원회에서 올림픽 성금을 기탁했다. 재일거류민단 후원회는 2차에 걸쳐 524억원을 성금으로 보내와 조직위 수입으로 기록됐다. 제 34차 위원총회가 6월 28일 개최되어 제 24회 서울올림픽의 운영계획을 보고받았다. 7월 22일,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하는 법회가 열려 불제자들의 정성을 보탰다. 8월 12일, 노태우 대통령이 조직위를 방문, 서울올림픽 최종준비상황을 보고받고 격려했으며, 사람 대표도 정당을 초월한 범국민적인 격려를 보냈다. 북한은 올림픽을 겨우 10여일 앞두고 서울올림픽에 불참할 것이라고 밝혀, 전 세계를 실망시켰다. 9월 12일, 올림픽기념조형물 평화의 문이 준공되어 그 위용을 드러냈다. 동서의 화합과 전진의 의미를 담고있는 평화의 문에는 이념과 민족 및 종교의 벽을 넘어 전쟁과 폭력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전체 인류가 평화롭게 살기를 갈망하는 평화의 불이 영원히 보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