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대회 이렇게, 제 2편 대회준비. 서울올림픽대회의 조직위원회는 대회준비계획의 모체가 되는 종합계획을 기본으로 시행계획을 수립, 모든 사업과 행사를 단계적으로 수행했다. 당시 종합계획 수립에 참여했던 이획임 씨의 말을 들어본다. “이획임 : 이러한 계획과정을 대체적으로 두 가지 원칙 하에서 추진됐습니다. 하나는 기능중심, 다시 말하면 인력, 물자, 입장권 등록 이러한 어떤 기능중심으로 계획수립이 이루어졌고요. 그 후반기 대회 다가올수록 현장중심, 예를 들면 경기장, 선수촌, 본부호텔 등 이러한 장소 중심으로 계획수립이 이루어졌습니다.” 올림픽대회 업무 추진을 위한 단계별 기본일정은 1단계 기본계획수립, 2단계 세부계획수립, 3단계 대회운영준비, 4단계 대회운영, 5단계 사후처리로 구분, 시행됐다. 인력과 자금과 장소는 대회운영의 기본 3대 요소이다. 먼저 조직위원회는 대회운영에 적정한 인력계획을 세웠다. 대회에 투입된 전체 인원은 조직위원회 직원 1,435명, 자원봉사요원 27,221명, 지원요원 18,281명, 단기 고용요원 2,775명 등 총 49,712명이다. 서울올림픽대회 소요자금은 대회직접투자사업 1조 1,084억 원, 여건조성사업 1조 2,742억 원 등 총 2조 3,826억 원으로 책정됐고, 이 자금은 정부부담 1조 2,854억 원, 조직위 기금 5,890억 원, 민간자본 5,082억 원으로 돼있다. 서울올림픽대회가 결정된 이후 서울종합운동장에 주경기장 건설이 더욱 활발해졌다. 조직위에 83년에 확정된 시설종합계획은 경기장 34개, 연습장 72개로 잡았다. 경기장은 21개를 기준시설로 13개는 신설, 연습장은 모두 기존시설을 활용하기로 했다. 1984년 9월 29일, 드디어 주경기장이 준공됐다. 한국인의 혼이 깃든 거대한 백자모양의 경기장이 잠실벌 한복판에 우뚝, 그 웅장을 드러낸 것이다. 이날을 기념하는 체육행사가 이 자리에서 벌어져 그 감격을 더해주었다. 주경기장의 준공과 더불어 서울종합운동장은 육상, 수영, 농구, 복싱, 야구경기장과 함께 종합운동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강동구 둔촌동 일대의 260여만 평방미터에 조성되는 올림픽 공원이 1984년 4월 24일 착공됐다. 대회설계와 토지매입 등 건설 업무를 서울시가 맡았고, 단지 내에 역도, 펜싱, 체조, 테니스, 사이클 경기장을 배치하기로 했다. 1986년 5월 28일 올림픽 공원이 준공됐다. 이 공원에는 뒤에 건설된 수영장을 포함해 6대 경기장이 들어섰다. 6천명을 수용하는 사이클 경기장, 4천명을 수용하는 지상3층의 역도 경기장, 7천명을 수용하는 지하1층, 지상3층의 펜싱 경기장, 센터코트 1면과 경기장 17면을 갖춘 테니스 경기장, 만 5천명을 수용하는 지하1층, 지상3층의 체조 경기장이 첫 선을 보였다. 올림픽 공원 준공과 때를 같이해서 올림픽 회관도 준공됐다. 미사리 한강 조정, 카누 경기장이 1986년 6월, 공사비 103억 원으로 준공됐다. 그리고 만 명을 수용하는 한양대 배구경기장이 뒤이어 준공됐다. 승마 경기장이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일원 109만 900평방미터에 건설됐으며, 부산 요트 경기장이 수영만에 대우의 민자로 건립됐다. 기존 경기시설로는 유도와 태권도는 장충체육관, 양궁은 화랑양궁장, 탁구는 서울대 체육관, 사격은 태릉국제사격장, 핸드볼은 수원 실내체육관, 하키는 성남 공설운동장, 레슬링은 상무체육관을 각기 이용하기로 했다. 1984년 7월 28일, 제 23회 LA올림픽이 개막됐다. 세계 140개국이 참가했으나 소련 등 동구권 14개국 보복불참으로 미흡한 대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을 앞둔 한국에게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큰 경험이며 중간점검의 계기가 됐다. 조직위는 대규모 참관단을 파견, 대회진행사항을 빠짐없이 살펴보았다. 한국 선수들은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그리고 6개의 금메달을 따는 개가를 올려 세계 10위에 껑충 올랐다. 이것은 제 24회 서울올림픽대회의 밝은 전망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화려한 폐회식이 시작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LA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LA올림픽 파견 한국선수단이 개선했다. 온 국민들은 이들을 열렬히 환영했으며 차기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에 대한 자신감에 들떴다. 아시안 게임이 임박해지면서 조직위원회는 그 준비에 바빴다. 선수촌이 완성된 데 이어 1986년 9월 5일, 20병상 규모의 선수촌 병원이 개원됐다. 아시안 게임에 투입되는 자원봉사자 17,411명에 대한 교육도 실시됐고, 임원과 운영요원의 유니폼이 선정, 발표됐다. 그리고 아시안 게임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개?폐회식 연습이 반복해 실시됐고 테러방지훈련도 아울러 실시됐다. 아시안 게임 사상 가장 많은 27개국의 선수단 등 8,400명이 공항으로 입국할 것에 대비, 조직위 영접단은 김포공항에 8개의 안내카운터를 설치, 운영했다. 대회성화는 1986년 9월 12일 오전 11시, 경주 화랑교육원에서 태양열로 채화되어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경기장으로 봉송됐다. 9월 20일 오후, 늦여름비가 내리는 가운데 영원한 전진을 다짐하는 30여개 스포츠 축제가 기적의 한강변에서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개회식은 식전공연, 공식행사, 식후공연으로 구분, 진행됐다. 개회식은 27개국, 3,300여 선수, 임원과 10만 관중이 거대한 올림픽 주경기장을 메운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 내외, 나카소네 일본 수상 등 내외귀빈, OCA 세이크 파하드 회장 등 스포츠 지도자들이 자리를 차지한 가운데 2시간 동안 진행됐다. 비둘기가 하늘을 누비고 성화가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화려한 식후공연이 시작됐다. 경기는 20일 오후 4시부터 부산과 대전에서의 축구 예선 4게임으로 시작됐다. 서울아시아경기대회의 특징은 대회자체의 성공적인 개최는 물론이고 시설이용에 있어서나 대회운영 모두가 서울올림픽대회의 종합적이며 최종적인 점검의 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의가 있다. 한국선수들은 전 종목의 경기에서 기대이상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제일 좋은 성적은 앞으로 열릴 서울올림픽대회에 기필코 이어지리라는 확신을 국민 모두의 가슴속에 깊이깊이 심어주었다. 대회 아시아 경기사상 처음으로 한국이 금메달 레이스에서 일본을 제치고 올림픽 개최국답게 금 1개 차로 10억의 중국에 따라붙었다. 10월 5일 오후 7시에 시작된 폐회식에서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가 등장, 북경 아시아경기대회 마스코트 슝마오와 인사를 나누었다. 영원한 전진을 다짐하는 역사적인 서울아시아경기대회는 88년 서울에서, 90년 북경에서 다시 만나자는 기약과 함께 성대히 그 막을 내렸다. 대회기간 중에는 선수촌에 각종 편의시설이 개설되어 선수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은행, 우체국, 전신전화국, 쇼핑센터, 전자오락실, 탁구장, 사우나, 수영장이 문을 열고 서비스를 제공 인기를 끌었다. 서울아시아경기대회를 경축하는 갖가지 문화예술축전도 열렸다. 이러한 행사는 한국의 문화예술을 세계에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 서울올림픽을 1년 앞둔 1987년, 조직위 준비작업은 착착 진행됐다. “1년이 더 흐르면 금년을 올림픽 준비의 완료의 해로 선언하고, 모든 준비과제가 늦어도 금년 안으로 완결되고 종결되도록 총력을 기울이겠습니다.” 1987년 2월, 개?폐회식 군사제작 및 운영에 대한 심의조정과 자문기구로써 개?폐회식 식전 전문위원회를 구성한 조직위는 대관작성, 현장답사 등을 통해 기본방향을 확정 시켰다. 보다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경기력 향상에 꾸준히 노력해온 서울올림픽 대표선수단은 선수 개개인의 장단점을 비교, 분석, 보완하는 스포츠 과학이 도입돼, 서울올림픽에서의 좋은 성적을 기대하며 훈련에 열중했다. 또한 88 서울올림픽을 훌륭하게 치르기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관심 속에 88응원격려대회가 각계각층의 참여로 열려 올림픽 개최에 1년여를 남기고 그 열기를 더해갔다. 서울시는 매월 15일을 호돌이의 날로 정하고 거리청소 등 올림픽을 맞을 각종 행사를 벌였다. 시민들은 정성들여 도로변에 꽃을 심어 서울거리를 보다 아름답게 꾸몄다. 건물정비 등 도심재개발사업도 실시했다. 그리고 거리에서는 질서캠페인이 벌어져 올림픽을 맞이할 시민의식을 한층 일깨워주었다. 경기운영 준비도 차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당시 경기조정관이었던 문동원 씨의 말을 들어본다. “문동원 : 경기를 준비하는 데는 경기일정을 작성하고, 경기양지부를 준비하고 혹은 이 각 경기장이 국제연맹에 의하여 준비가 되도록 하는 기술적인 사항도 있지만, 경기운영 요원이라던지 심판요원을 확보하고 양산하는 게, 게다가 시상식 같은 분야에서 이제 할 수 있는 모든 시나리오를 짜고 하는 이러한 분야들을 전부 다 포함된다고 말씀을 드릴수가 있습니다.” 제 91차 IOC총회에서 확정된 대회경기종목은 서울대회에서 처음으로 채택된 탁구, 테니스를 포함한 정식종목 23개와 시범종목, 시범경기, 전시종목, 전시경기 등으로 돼있다. 대회를 앞두고 경기기술규정집이 발간됐고, 88년 2월에 경기일정책자가 발간됐다. 핸드볼, 축구를 비롯한 각종 경기 대진 추첨이 있었다. 이렇게 조 추첨이 있어야 일정이 확정되는데 경기일정은 종목별 국제경기연맹과 합의해야 했으며 동 합의안을 IOC에 제출하여 승인을 얻어 확정했다. 많은 경기종목들의 경기일정은 서로 연관되어 있어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참가선수 등록은 예비참가 신청양식 접수, 참가신청 NOC와 긴밀한 연락, 신청서 접수, 등록카드 발급 등 4단계로 나누어 시행됐다. 경기운영요원은 각 경기단체장에게 인접한 경기본부장, 각 경기단체에서 추천한 경기부서요원, 협력학교 학생인 보조요원 등 25,209명을 확보했다. 그리고 경기용 기구는 기장사업과 임차확보 및 기진, 구매확보의 순으로 조달됐다. 서울올림픽에 사용된 경기용 기구는 모두 896개 품목이었으며, 그 가운데 72%에 해당되는 647개 품목이 국산품이었다. 국기들 제작은 정확한 자료수집과 규격별, 소요처 별, 용도별, 재질별로 기준치를 작성해서 참가국기, 태극기, 엠블렘기 등 26,300매를 제작했다. 시상메달확정은 1987년 4월, 조폐공사가 제출한 작품을 디자인 전문위원회에서 수정 보완하여 IOC 집행위에서 최종 승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메달제작은 금메달이 정식종목 525개, 시범 전시종목 55개. 은메달이 정식종목 515개, 시범 전시종목 55개. 동메달이 정식종목 505개, 시범 전시종목 78개이고 참가기준메달이 선수촌 15,000개, 본부호텔 3,000개, 심판 및 기술대표단 2,400개 등이다. 그리고 상장 6천부, 참가증 23,000부를 각각 제작했다. 유니폼상영은 대회운영요원들의 직종과 기능을 쉽게 구분하게 하고, 소속감과 책임감을 느끼게 하며, 활동적인 색조감을 제공, 텔레비전 등 매체를 통한 시각적인 조화와 통일감을 부여했다. 유니폼 지급 대상인원은 73,741명으로 확정됐다. 당시 유니폼 제작에 참여했던 김광수 유니폼과장의 말을 들어본다. “김광수 : 유니폼 사업의 기본 방향은 디자인이 단순하고 제작배분 능률을 높이고 실용적인 색상과 소재의 선택으로 활용도를 높였습니다. 디자인 명예의 백천범 교수하고 심안숙 교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디자인 심의와 확정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지난해 심의위원회를 구성했는데, 각계 미술계, 학계, 그리고 디자인계, 그리고 언론계, 조직위원회 관계관들로 하여금 심의, 조정하였습니다.” 조직위원회는 한국 의료시험검사소에 유니폼의 재질과 완성된 유니폼의 검사를 실시토록 했다. 유니폼은 지급 대상자별로 정확한 신체치수를 재어 품목별, 규격별 제작수량을 확정했다. 유니폼 배분은 유니폼 배부센터에서 배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올림픽공원 옆에 세워진 선수촌과 기자촌이 완성되면서 선수촌 시장의 초대 조직위원장을 역임한 김영식 씨가 선임됐다. 선수촌 시장은 상징적인 존재로써 NOC 대표단과 내외귀빈을 맞이하는 일을 했다. 1986년에 착공된 선수촌과 기자촌은 선수촌이 6층에서 24층까지의 아파트 86평 3,692세대, 기자촌이 36동, 1,848세대의 아파트로 건설됐고, 1988년 6월에 완공을 보았다. 조직위원회는 선수, 기자들이 기거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최선의 배려를 기울였다. 올림픽공원에서 2km 떨어진 문정지구에 세워진 56개동 4,494세대의 올림픽패밀리 타운도 1988년 5월에 완공됐다. 본부호텔의 운영요원들은 본부호텔 운영단 발단식을 갖고, 절대안정과 원활한 대회운영에 기여할 것을 다짐했다. 귀빈을 위한 숙박시설로는 본부호텔은 신라호텔과 그 밖의 지정호텔을 활용하기로 했고, 본부호텔의 업무추진상황을 평가단이 수시로 점검했다. 개?폐회식 연습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여기에 쓰여진 여러 가지 도구가 전문 기능인들 손에 의해 정성들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주경기장의 분위기를 고조시킬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연습과 실험을 반복해나갔다. 개?폐회식 행사에 참가했던 당시 개?폐회식 국장 이기하 씨의 말을 들어본다. “이기하 : 서울올림픽대회에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찬사 속에서 대단히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86년도 아시안게임의 경험과 부분적으로 추진된 모든 계획과 또 기능적으로 운영되어오던 (안 들림) 유지되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운영계획에 의해서 많은 예행연습과 그 다음 종합연습과 이런 것들에 의해서 이어가지고 거기에서 (안 들림) 잘못된 것이 도출되면 이런 것을 수정하고, 수정하고 해서 이 대회를 잘 이끌어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개?폐회식의 공연행사에는 개회식 15개 작품, 폐회식 9개 작품에 15,798명이 출연했다. 조직위는 출연자의 연습을 능률적으로 지도, 관리하여 최고수준의 행사공연을 보여주기 위하여 연습계획을 수립, 시행했다. 1단계는 기초연습으로 1987년 11월부터 1988년 2월까지 40시간, 제 2단계는 작품별 안무연습으로 3월부터 5월까지였다. 제 3단계는 6월부터 8월까지 작품별 연결연습이었고, 4단계는 8월 23일부터 9월 16일까지의 종합연습으로 정식행사, 공연행사, 특수효과, 음악 등 전문분야의 합동연습이었다. 개?폐회식 행사 작품 제작에 참여한 각계 전문 인사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서울올림픽 공식노래 손에 손잡고가 제작됐다. 이 노래는 한국의 보컬그룹인 코리아나가 불러 1988년 7월부터 각국 언론과 방송매체를 통해 보급이 시작됐다. 서울올림픽대회 100일을 앞둔 1988년 6월 9일, 조직위원회 전 직원들은 올림픽 성공다짐대회를 열어 다시 한 번 그 결의를 굳혔다. 대회를 앞두고 조직위원회 편성이 대회운영체제로 전환됐다. 대회운영조직의 구성은 경기나 행사본부 중심의 운영체제가 될 수 있도록 하되, 대회준비와 운영상의 종합 지원 및 정책사항 결정 등을 위해서 집행회의, 운영회의, 조정회의 등을 운영, 종합지원과 중앙통제가 가능하도록 이원적 조직으로 방향을 설정했으며 기능부서와 대회운영과 직접 관계가 없는 부서를 기존 사무처로 전속, 운영본부장 산하로 편성했다. 종목별 경기본부가 개설되어 대회경기를 진행했다. 경기본부 인력은 25,209명이었다. 조직위는 각 종목별로 경기본부를 설치, 27개 종목별 경기본부운영요원을 확보, 27개 경기본부에 배정했다. 각 경기본부 발단식이 줄을 이어 계속됐으며, 운영요원들의 결의를 가일층 굳게 다져나갔다. 대회준비는 이렇게 단계적으로 하나하나 착실하게 추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