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당시 남한의 경제사정은 공업지대인 북한과의 유통이 막혀서 거의 마비상태였고 지리적으로 농업생산지대인데도 비료공장 하나 없었다. 그나마 48년 5월 4일에는 북한이 남한에 대한 송전을 완전히 끊음으로서 산업시설의 가동이 마비됐다. 그 당시 국군은 구식무기로 경무장한 7개 보병사단을 주축으로 38선 경비와 후방치안을 맡고 있었다. 달구지를 수송수단으로 이용했던 당시의 한국군 중화기는 몇 문의 박격포뿐이었다. 공군력도 L4와 같은 연습용 경비행기 22대가 고작이었다. 서해안을 낀 38선 인근에 옹진반도에는 공산군의 도발이 잦아 주민들 스스로가 죽창을 들고 향토방위에 나섰으며 이곳을 지키던 한국군 17연대는 인민군 귀순병들을 통해서 38선 북쪽의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자구책 강구에 분주했다. 1949년 6월에는 한국에 주둔한 미군이 철수 했다. 6.25 1년 전의 일이었다. 해가 바뀐 1950년 1월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에치슨 국무장관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발표했다. 이 지도에서 보듯이 극동 방위선은 일본과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을 그어놓고 한국을 그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한편 북한에서는 야암을 틈타 38선 쪽으로 부대이동을 단행했다. 주민들이 후방으로 소개된 가운데 농촌도 완전 전투태세로 바뀌었다. 1개 군단으로 편성 공격 편제로 바꾼 북한 공산군의 6월 18일자로 총사령관 김일성의 정찰명령 1호가 떨어졌다. 6.25당시 귀순한 인민군 총좌 이학구의 증언과 압수한 원문 명령서에 따르면 한국군의 배치상황을 소상히 밝히고 공격준비를 완료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그들은 1949년도 판 5만분의 1지도를 사용했다. 6.25 개전 직전에 북한 공산군 배치현황을 보면 배후에 전차연대와 사단 38선에 14돌격 연대와 7개의 돌격사단을 배치하고 있다. 이로써 북괴의 남침준비 태세는 완료됐다. 1950년 5월에 창경원, 그 무렵 남한에서는 공산분자와 공비들의 준동이 멈춰진 가운데 5.30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당시 평양측은 조만식 선생과 간첩 김삼용, 이주하의 교환을 제의 위장 평화 공세를 취했다. 군 병력 3분의 1은 휴가 중이었고 농촌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