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경험하지 못한 40대 이하의 연령층이 오늘날 한국 전체인구의 8할이나 된다고 한다. 최초 유엔군으로서 첫 번째 참전한 것은 스미스부대였다. 수원남쪽 오산에 진을 친 스미스 부대가 공산군을 맞아 싸웠으나 무장과 병력 등 모든 면에서 적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일본에 있던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돼 7월 12일 유엔기를 인수받고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대전 피난민들은 대전에서도 짐을 풀수가 없어 다시 남쪽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고 이지역민들 역시 피난민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7월 19일과 20일에 있었던 대전 시가전 3900명의 미 24사단은 이 전투에서 30%의 병력 손실을 보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때 딘 소장이 적에게 포로가 됐다. 8월에 접어들면서 한반도 전역에 대부분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아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주축으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는 상황이 됐다. 더 이상 물러날래야 물러설 수도 없는 대구지역 대전을 거쳐 대구에 까지 후퇴한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겨야 했고 조병옥 내무장관은 대구 사수의 결의를 다짐했다. 여기는 부산 유엔군 병력이 속속 들어왔다. 미국 호주 영국 벨기에 캐나다 등 16개국이 참전했고 의료봉사와 물자 지원 등 다른 원조 국가를 합치면 40여 개국에 이른다. 이제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붉은 침략군에 짓밟힌 수도 서울 이따금씩 전차가 움직일 뿐 텅빈 광화문 네거리 그리고 남대문과 독립문 스탈린과 김일성을 그린 현수막이 6.25가 그들의 합작품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인민 해방 전쟁이라면서 스탈린 초상을 들고 광란함은 무슨 의미인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서울 시민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침략전을 찬성한다고 나서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폭격으로 파괴된 각종 수송수단을 강제 노동으로 수리 복구하고 공산당에 협조를 하지 않거나 미움을 산 경우에는 인민재판 등을 통해서 무자비하게 학살되곤 했다. 북괴군은 나이어린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전쟁터로 끌고 갔다. 방아쇠만 당길 줄 알도록 훈련해서 싸움터로 내몰았으니 전쟁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