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미명 인천 앞바다 유엔군 함선 261척이 참가한 상륙작전이 예정대로 진척돼 최초목표인 월미도를 공격했다. 28분 만에 월미도를 점령한 유엔군은 이날 오후 그 주력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인천 시가를 손안에 넣게 되었다. 이때 인천 지역에는 공산군 2000여 병력이 한사코 버텼으나 9월 16일 새벽 인천을 둘러싸고 있는 주요지점을 국군과 유엔군이 모두 차지했다. 유엔군은 상륙 후 24시간 만에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인천이 수복될 때 붉은 치하에서 숨어살던 시민들은 목청이 터지도록 만세를 부르며 상륙군을 환영했다. 부상한 적병도 치료해주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경인가도를 누비며 서울로 진격했다. 17일에는 김포비행장을 점령하고 19일 영등포에 돌입했다. 9월 20일 아군은 한강을 건넜다. 전황이 급전하는 사이 한미해병은 서대문의 북괴군 주저항선을 강타하고 시가전을 벌이면서 소탕작전을 펼쳤다. 전세가 역전되자 낙동강 전선에 적 주력은 퇴로가 끊길 것이 두려워 9월 23일에 총 퇴각 명령을 내렸고 서울에는 잔당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27일 아침 한국 해병 용사들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28일에는 서울 수복을 자축하는 행사가 베풀어졌으니 실암 된지 98일 만에 수도 서울을 탈환한 것이었다. 숱한 고초를 겪으면서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 혈육은 이미 생사를 달리하고 통곡 또 통곡뿐이었다. 긴 역사 속에 조상의 유산을 간직해온 민족의 수도 서울은 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과연 이 전쟁은 누가 무엇을 위해 일으킨 만행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