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한 유엔군과 국군은 전열을 정비해 다시 반격을 개시했다. 한강에서 접전을 벌인 끝에 3월 14일 서울을 재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국군은 중앙청에 다시 태극기를 개양했다. 4월 30일에는 또다시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하였다. 1951년 7월 10일 개성 전세가 불리하게 된 북한과 중공군은 이보다 앞서 유엔주제 소련대표 말리크를 통해 휴전을 제안케 했고 유엔군이 여기에 응함으로써 이날 개성에서 첫 휴전 회담이 열리게 됐다. 휴전회담이 열리고 있는 중에도 쌍방의 공방전은 치열하기만 했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는 가운데 휴전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들이기도 했다. 한차례 출격에서 무려 60만 톤의 폭탄이 떨어지고 22만발의 포탄세례가 퍼부어진 백마고지 전투의 경우는 전후 20여 차례에 걸쳐 주인을 달리했다는 사실로서도 당시의 전투상황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해를 두 번씩이나 넘긴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38선 근처를 군사분계선으로 하는 휴전협정이 조인된 가운데 전쟁은 정전이란 이름으로 결말을 보게 됐다. 동서 640리 155마일에 걸친 휴전선이 그어지고 그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지금까지도 이곳의 상황은 변함이 없다. 북한 공산군에 의해 저질러진 6.25전쟁 한때 한반도 전역에 20분의 19까지를 침공해왔으나 곧 유엔군의 반격으로 압록강 까지 북진 통일이 눈앞에 온 것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겪은 후 휴전선이 그어지기 까지 3년 1개월 전쟁은 참으로 많은 것을 앗아갔다. 6.25 동란의 결산은 과연 무엇인가. 전쟁은 한없는 슬픔만을 깊은 상처로 남겨놓았다. 피난민 240만 명 월남가족 514만 명 전쟁미망인만도 20만 명이 넘었다. 이 미망인은 지금 몇 살이나 되었을까 전쟁고아는 10만 명. 이들이 살았으면 50대는 되었으리라 남북을 합친 군인 300만 명이 전사했거나 부상당했다. 전 국민은 거지가 된 가운데 민간인 사망 37만 명에 23만 명이 부상당하고 78만 7천명이 납북되거나 행방불명 됐다. 전쟁의 포화는 멈추었으나 전쟁 그 자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정전이란 이름으로 그저 쉬고 있을 뿐이다. 만약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재래식 전쟁이든 핵전쟁이든 또한 승자든 패자든 전면전 상황 아래서는 국가 전체의 생존 자체가 붕괴될 뿐이다. 현대의 거대도시화와 고층화 산업시설의 집단화로 인해 전후복구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생존의 장 자체가 파괴되고 말 것이다. 6.25를 잊으면 역사를 잃는 것이다. 역사를 잃는다는 것은 진리를 잊는 것이요, 교훈을 잃는 것이다. 그 비극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6.25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