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남과 북을 가로지른 159마일의 휴전선 2차 대전 후 세계열강들이 한반도에 그어놓은 38선으로 인하여 민족의 비극은 잉태됐으며,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국토는 초토로 화했다. 여기에 비무장지대에 나뒹구는 전쟁의 잔해들이 사상 유래 없는 민족의 비애를 증언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집단은 전면적인 무력남침을 감행했다. 당시 전쟁에 대한 대비가 없었던 한국군은 맨주먹으로 맞서 싸워야했으며 사흘 만에 서울을 유린당하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유엔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즉각 유엔군을 한국에 파견하여 침략자를 저지, 격퇴했다. 그런데 중공군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전황은 1진 1퇴를 거듭하여 한반도는 파괴와 살상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3년의 전쟁은 오직 38선을 휴전선으로 바꿔놓았을 뿐, 엄청난 피해와 희생을 남긴채 끝이 났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전후의 혼란과 폐허에서 떨치고 일어나 60년대 초부터 국가재건의 힘찬 진군을 시작했다. 바다를 메워 옥토를 마련했으며, 강물을 막아 댐을 건설하고, 농경지를 정리하여 농업의 기계화를 실현했으며, 산업도로를 고속화하는 등 국토건설의 대역사를 힘차게 추진했다. 포탄으로 얼룩졌던 황량한 들판에는 공장들이 수풀처럼 들어섰다. 10년의 세월, 지도자를 중심으로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 땀 흘린 보람으로 60년대 말부터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마침내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북한의 김일성 집단은 1953년 휴전이후 한동안 전쟁복구에 여념이 없어 잠잠하더니 6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또 다시 대남도발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연속적인 북한군의 휴전선 남방 침입사건, 대한민국 후방에 대한 끊임없는 무장공비의 침투사건, 동, 서해에서의 계속적인 한국어선단에 대한 포격 및 납북사건, 빈번한 북한군의 유엔군 측 초소 습격사건, 한국 후방의 철도 화물 폭파 등 주요시설물에 대한 파괴, 서울의 국립묘지 현충원 폭파 및 청와대 특공습격 등 대한민국 요인 암살기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의 북한 측 경비병의 거듭되는 폭행사건, 울진, 삼척지구에서의 대규모 북한 무장군 침투사건, 완도군 남쪽해상에서 북한무장 간첩선의 기습으로 인한 한국형 경비정 침몰사건, 군산, 흑산도, 영덕, 격렬 비열도, 거문도, 거진 해안의 무장간첩선 침투사건, 연평도해안에서의 한국해군 방송선 납북사건 등 북한 측의 대남도발은 날이 갈수록 격심해졌다. 더욱이 1970년에 들어서면서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회갑을 서울에서라는 구호를 공공연하게 선전했으며, 김일성은 북한이 전쟁준비를 완료했다고 공언했다. 이러한 사태는 그것이 방치될 경우 언제 또다시 한반도가 전쟁에 휩쓸리는 불행을 초래할지 알 수 없게 됐다. 게다가 당시 월남전에 지친 미국은 아세아로부터의 후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