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격변하는 내외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월 15일 광복 25주년 경축사를 통해 평화통일을 위한 새로운 정책구상을 내외에 천명했다. 박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국토통일이 아무리 절실한 민족의 지상명령이라 하더라도 동족의 유해를 강요하는 전쟁만은 피해야하며 통일의 길이 아무리 험난하다 할지라도 꾸준한 인내와 최대한의 양식을 발휘하여 평화적으로 해결지어야 한다는 것을 밝혔다. “박정희 : 북괴에 대하여 더 이상 무고한 북한 동포들의 인생을 희생시키면서 전쟁준비에 광분하는 개악을 범하지 말고 보다 선의의 경쟁, 즉 다시 말하자면 민주주의와 공산독재의 그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살게 할 수 있으며, 더 잘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할 건설과 개발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용의는 없는가. 하는 것을 묻고 싶은 것입니다.” 1971년 8월 15일, 대한적자사 최두선 총재는 박 대통령의 8.15 선언을 후연하고자 남북이산가족을 찾아주기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북한 측에 제의했다. “최두선 : 남북 간에 가족찾기 운동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가까운 시일 안에 남북적십자사 대표가 한 자리에 마주앉아 회담할 것을 제의한다.” 1945년 한반도가 38선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진 후 500만 명이 넘는 북한 동포들이 자유를 찾아 남하했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산가족의 비극을 남북 간의 간극이 해소 드물어서 (안 들림) 이것이 빠른 시일 내에 기록적이고도 현실화해서 적어도 1천만 남북 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확인하고 이북으로 소식을 알려주며 (안 들림) 다시 만나는 것을 발설하는 가족찾기 운동만이라도 우선 정기화해야한다고 봅니다. 돌이켜보면 1964년 10월 동경올림픽 때 북한육상선수로 출전한 딸 심근단과 서울에서 달려간 그녀의 아버지와의 15분간의 극적 상봉. 또한 1971년 삿포로 동계올림픽 때 북한 스케이트 선수로 출전한 누이 한필화와 서울의 오빠가 국제전화로 목소리만 들은 채 서로 만나지 못한 가슴 아픈 순간을 우리는 기억한다. 대한적자사의 8.12제의에 이어 북한 측은 남북이산가족을 찾아주는 적십자 사업에 가족이 아닌 친우까지도 포함시켜야한다는 조건을 들고 나옴으로서 북한 측의 의도가 정치적 목적을 명백히 시사하기는 했지만 회담제의 자체는 이를 수락한다는 것을 평양방송을 통해 알려왔다. 이렇게 해서 남북쌍방 적십자 간에 8월 20일부터 5차례의 파견원 접촉이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이루어졌다. 남북한 적십자인원들끼리 처음으로 상견하는 자리에 북한 측은 적십자 인들마저 커다란 김일성 배지를 달고나왔다. 파견원 접촉을 통해 남북적십자 쌍방은 9월 20일부터 판문점에서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을 개최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파견원 접촉에서의 합의에 따라 1971년 9월 20일 역사적인 제 1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이 판문점에서 개최됐으며 이로서 분단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대표들이 한자리에 마주앉게 됐다. 1차 예비회담에서의 합의에 따라 9월 22일 판문점에는 상설연락사무소가 설치되고 쌍방 연락사무소간을 잇는 남북 직통전화가 가설되어 온 국민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그러나 회담이 거듭됨에 따라 적십자회담에 임하는 북한 측은 그들의 정치적인 저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북한 측은 남북의 각계각층 대표들을 모두 참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적십자회담을 정치적인 대중 집회로 전환시키고자 기도하는가 하면, 적십자 사업내용을 인도적 문제를 떠난 정치적 문제로 변질시키려고 하는 등 고의로 적십자원칙을 외면함으로서 결과적으로 가족찾기 운동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의 진행을 가로막았다. 대한민국은 모처럼 마련된 남북한 간의 대화가 북한 측의 정치적 의도로 말미암아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71년 11월부터 적십자회담과는 별도로 정치적 차원에서 전반적인 남북관계 개선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남북고위인사의 비밀 회담을 북한 측에 제의했다. 이에 따라 1972년 5월 2일, 박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김영주 등과 회담을 갖고 상후 무력도발을 중지하고 상대방을 비방하지 않으며, 민족적 단결을 도모한다는데 합의를 보았다. 이어 5월 29일에는 북한 측의 박성철이가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 3일간 서울에 체류하면서 이후락 부장의 평양 방문 시 논의된 남북추진위원회 조절에 관하여 원칙적으로 합의를 하고 이를 남북공동성명으로 채택, 발표한다는데 합의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