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체류하는 동안 한국 측 대표단은 북한 측의 관례에 따라 극히 제한된 몇 군데를 볼 수 있었는데, 여기는 북한에서 제일가는 외국인 전용상점. 대한민국 농촌의 공판장보다도 초라한 상점에 전시된 엉성한 물건들이 북한의 생활수준을 말해주고 있었으며, 따라서 북한 측이 왜 한국대표단의 자유 활동을 거부했는지 그 이유를 실감하게 했다. 한국 대표들은 평양 어디에서나 김일성 우상화의 실체를 목격할 수 있었다. 김일성의 생가를 성역화 해놓은 것을 보았으며, 그가 쓰던 물건은 물론이고 그의 조상들까지도 종교적인 예우로 떠받들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입구에 김일성 동상을 높이 세워놓은 소위 혁명박물관. 김일성 우상화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갖가지 조작품들이 진열돼있다. 평양시내를 굽이쳐 흐르는 대동강물은 옛 그대로인데 4반세기의 세월 속에 한편을 이어받은 대기의 후예가 이토록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한민족 고유의 전통이나 풍속을 찾아볼 수 없는 이질화된 북한 땅. 거리마다 전쟁분위기의 고취와 김일성 우상화, 그리고 노력동원 등의 현수막이 어지럽게 나붙어 살벌하기만 하다. 1차 평양회담에 이어 1972년 9월 12일, 서울에서 개최되는 제 2차 남북적십자본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북한 측 대표 일행 54명이 판문점에 도착, 한국 측 대표의 답례를 받았다. 통일로를 거쳐 서울로 이어지는 도로 변변에는 수많은 인근주민들이 손을 흔들어 환영했다. 서울, 거리를 메운 환영인파, 이것은 한국 측 대표들을 맞이할 때에 평양시민들의 무표정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한민족의 전통적인 미덕인 인정마저 메말라버린 북한주민들과는 달리 서울시민들은 따뜻한 정과 부푼 기대 속에 북한 대표들을 반가이 맞이했다. 회담장소인 조선호텔에 도착한 일행들. 회담은 쌍방수석대표의 연설로 시작됐으며 이산가족대표로 참석한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은 축하 연설에서 “김옥길 : 천만을 헤아리는 남북의 흩어진 가족들은 피를 나눈 부모와 형제, 처자와 친족, 친척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날로 더하여지며 생사조차 알 수 없이 북한에 두고 온 부모님들이 늙으신 부모님들의 모습이 그립고 그리워서 지내는 밤 꿈속에 분명히 뵈었다는 분들도 우리들 중에는 적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북한 측은 자문위원들의 연설을 통해 “자문위원 :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안 들림).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사상관점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인민들을 교양하였기 때문에…….” 북한 측은 적십자회담과는 동떨어진 김일성 선전과 공산당 선전을 공공연히 늘여놓아 한국 국민들을 크게 격분시켰다. 북한 측은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한 적십자회담을 정치선전장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민족사의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는 서울의 고궁. 북한 대표들이 서울에 머무는 동안 한국 측에서는 북한과는 달리 대한민국 어디든 공개하겠다고 호의를 베풀었으나 북한 대표들은 스스로 행동의 제약에 얽매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공식 스케줄에 따른 관광마저도 주저한 것은 한국의 발전된 모습과 개방된 사회를 많이 보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북한 대표들은 대한민국의 전역을 일일생활권으로 이어놓은 고속도로를 보고 놀라워했으며, 새마을 운동으로 근대화된 농촌의 모습 등 모든 것이 지금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바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여기는 현충사. 한민족의 역사를 빛낸 선열들을 모두 외면하고 김일성만을 가장 위대한 인물로 떠받드는 북한 대표들이 이곳을 둘러보며 마음속으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한 북한 측 대표단 일행은 서울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들을 구경했다. 수많은 상품이 쌓인 화려한 백화점을 둘러본 북한 대표들은 모두 외국에서 들여온 물건이라면서 한국 제품임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한다면 믿을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