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처음열린 두 차례의 적십자본회담이 있은 뒤 제 3차 본회담에서부터는 이미 합의, 채택된 의제에 대한 토의에 들어가게 돼있었다. 1972년 10월 24일과 1972년 11월 23일에 평양과 서울에서 열린 제 3차 및 제 4차 남북적십자본회담에서 한국 측은 의제의 순서에 따라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소식을 알리는 사업을 실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의했다. 그러나 북한 측은 적십자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양측이 합의한 의제와도 동떨어진 대한민국의 반공법, 국가보안법 폐지, 반공단체 해제, 반공활동 금지 등을 먼저 실현시켜야 한다는 선결조건을 내세워 본회담 의제에 대한 토의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아 회담은 교착상태로 들어갔다. 북한 측 수석대표 김태회는 “김태회 : 첫째로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현행 반공법규들을 철폐하며, 둘째 모든 반공활동을 금지하고 반공단체들을 해체하며…….” 회담이 교착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제 7차 본회담에서 한국 측의 이범석 수석대표는 “이범석 : 쌍방은 올해 장려사업으로서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들로 추석 성묘방문단을 구성하여 상호 방문토록 한다.” 그러나 북한 측은 이것마저도 거부했다. 적십자본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같은 기간에 다른 한편에서는 1972년 10월 12일 이후 7.4공동합의에 따라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가 판문점과 평양, 서울에서 각각 한차례씩 열렸다. 이 회담에서 쌍방은 남북조절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결정, 채택했다. 이 합의서의 주요내용은 남북 쌍방은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외교의 각 분야에서 쌍방 간의 교류를 실천하는 문제를 협의, 결정하기 위하여 남북조절위원회 안에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외교 분과위원회를 두기로 하며, 각 분과위원회는 남북조절위원회 사업이 진척되는데 따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이 합의서를 결정, 채택하기까지에는 김일성과 직접 면담하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에 따라 1972년 11월 30일 쌍방은 서울에서 남북조절위원회를 정식으로 구성, 발족시키고 1972년 11월 1일 이후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가며 3차례의 본회의를 진행했다. 남북조절위원회에서 한국 측은 사상과 이념, 제도가 극단적으로 다르고 불신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현재의 남북한의 상황에서는 정치적 마찰을 피하면서 잃었던 신뢰를 회복해야 하며, 경제, 사회, 문화 분야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상호교류와 협력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평화통일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합리적인 방안임을 주장하고 이를 위해 남북한 상호간의 사회개방을 하자고 제의했다. 한국 측의 이후락 공동위원장은 “이후락 : 나는 우리 남북쌍방이 이렇게 구체적인 교류와 협력의 (안 들림) 개척함으로서 서로가 서로의 사회를 서로에게 완전히 개방할 것을 새삼 제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북한 측은 한국 측의 상호 사회개방제의를 거부하고 주한미군 철수와 군비축소가 먼저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과 남이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아래로 줄이며 군비를 대폭 축소할 것……. 미군을 포함한 일체 외국군대를 철거시킬 것…….” 북한 측은 이러한 선행조건이 실행되지 않는 한 대화는 더 진전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 측의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북한 측은 남북조절위원회와는 별도로 남북정치협상회의를 들고 나와 여기에서 남북한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함으로서 7.4 남북공동성명의 협의에 따라 구성된 남북조절위원회의 기능을 사실상 부정하는 태도로 나왔다. 결국 북한 측은 남북대화를 이용하여 대한민국의 내부체제와 국방력을 약화시켜서 이른바 남조선 혁명을 달성하는데 기여해보려고 기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 측은 회담을 통해서 그들의 기도가 실현될 수 없음을 알게 됐으며, 더욱이 회담을 계속하게 되면 한반도 상에 평화공존질서가 기정사실화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북한 측은 서울 평양 간의 회담을 통하여 이른바 남북합작 분위기를 조성해서 대한민국의 국론분열을 유도해보고자 했으나, 실제로 나타난 현상은 그와 반대로 한반도 상에 긴장완화 분위기가 북한 자체의 체제의 유지를 위협하게 되어 북한 김일성 집단은 점차로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됐다. 마침내 북한 측은 1973년 8월 28일, 평양방송을 통해 남북조절위원회의 북한 측 공동위원장 김영주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하고 남북조절위원회의 회의에 북한 측은 더 이상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서 남북조절위원회의 운영을 일방적으로 중단시키고 말았다. 여기에서 대한민국은 서울 평양 왕래를 비롯하여 남북한 간에 다방면에 걸친 교류를 실시하여 남북한의 불신감을 해소시키면서 상실되어가는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여 평화적으로 민족의 재통합과 통일을 실현시키려 노력했으나, 북한 측은 대한민국의 안보체제를 약화시켜 이른바 남조선 적화혁명을 위한 여건조성을 기도했다가 이것이 여의치 않자 모처럼 열린 서울 평양간의 문을 다시 굳게 닫아버리고 만 것이다. 북한 측이 대한민국 전복음모에 남북대화를 이용하려고 기도했다는 사실이 여기에 또 다시 입증되고 있다. 북한 측은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뒤에서 휴전선 지하에 기습 남침용 땅굴을 파내려온 것이다. 남북대화를 중단시킨 후 그들은 정규군을 공격형으로 전진배치하고 휴전선 일대에서의 총격사건을 비롯하여 서해5도에 대한 위협적 도발, 동해에서의 한국 경비정 격침, 대한민국 대통령에 대한 저격사건 등 각종 무력 및 폭력 도발을 격화시켜 한반도의 긴장상태를 남북대화 이전보다 더욱 악화시켰으며, 75년 4월 월남 패망직후 중공을 방문한 김일성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잃는 것은 군사분계선이며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라고 호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