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상잔의 비극 6.25 그로부터 33년 그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이 땅에는 그 쓰라린 상처가 우리의 가슴 가슴마다에 깊숙이 남아 있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으로 찾지 못한 저 헤아릴 수 없는 벽보 속에 내 부모 형제는 지금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한국 방송공사가 벌인 이산가족 찾기 운동은 그동안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살아온 혈육의 정을 다시 한 번 온 세계에 메아리치게 했습니다. 얼싸안고 통곡하고 다시 얼싸안고 부둥켜안으며 어쩔 줄을 모르는 저 광경은 온 세상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사이신가요? 네 제 막내 동생이에요. 네 몇 년 만에? 한 30년 됐죠. 30년요...), (아홉 살 때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종사촌이고 할머니고 아무것도 기억 못하구요...), (1.4 후퇴 후에요. 그다음 날 8월 15일쯤에 명절날에 나왔습니다.) 어릴 때 헤어져 얼굴도 모르는데다가 30여 년이 흘러 아버지 어머니가 타계하신 분도 많아 헤어져 산 한은 더욱 북받쳐 올랐습니다. 공산군의 남침으로 야기된 혈육의 이별 부모를 잃고 헤매는 저 어린 형제, 눈보라 치는 흥남부두의 피난길은 1.4 후퇴의 쓰라림을 다시 한 번 웅변하고 있지만, 아직도 수많은 혈육의 재회는 기약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한강 얼음 위를 걷는 피난 행렬에서 부모·형제 처자를 돌볼 겨를이 없어, 열차에 올라 피난길에 올라 흩어지는 가족들이 그 어디에선가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저 폐허 위에 고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남편을 잃고 어린 자식과 남은 저 부인, 어버이를 잃은 어린아이들의 애절한 울부짖음이 지금도 귓전을 울리는 것 같습니다. 성도 바뀌고 이름마저 달라져 흉터만을 확인하고 어릴 때에 헤어진 기억을 더듬어야 겨우 혈육임을 알아 낼 수가 있었습니다. (학교 2학년 다녔지? 언니는 만울 학교 다니고. 또 언니 있지? 정숙이.. 엄마 있고? 진짜 언닌가? 응 너.. 진짜 언닌가? 응), (야 너 저기 여기.. 할머니.. 아버지가 할머니 업고 누나가 나 업고 형 둘하고 갯바닥으로 넘어가서. 맞았어. 잃어버렸어. 무슨 길 어디서 잃어버린 줄 모르지? 몰라. 응? 모른다고. 모르지? 그럼 네가 내 동생 맞아, 수남인데...), (내가 저 순옥이여. 어 그랴, 맞아요? 어야 나 정래다! 정래요? 그래! 그러면 이름도 불렀지? 그래! 맞아요? 그래 아버지 이름 조기사이고. 너 이제 아니? 네 아이고 아버지! 아~ 오빠!), (보고 싶었어요. 얼굴도 모르는 오빠를 정말...) 누가 우리를 이렇게 헤어지게 했습니까? 이번 이산가족 찾기는 7월 7일 현재 천 4백여 가족을 재회시켰습니다. 우리는 지난 71년 8월 12일 남북적십자 회담을 북한 측에 제의한 데 이어 조총련 동포의 모국방문을 허용했으며 중공과 소련 땅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있습니다. 그라나 북한 공산집단은 6천만 동포의 이 아픔도 외면한 체 권력세습강행과 폭력적 적화통일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의 현실적이고 정당한 민족화합, 민주적 통일방안 제의마저 거부함으로써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민족사의 죄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로써 그들을 대화의 광장에 나오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산가족 찾기에 적극 호응해서 한 가족이라도 더 피맺힌 상처와 고통이 아물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