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졌던 혈육을 찾는 절규의 현장. 사람과 벽보가 한 덩어리가 되어 밤낮이 없는 저 만남의 광장에는 상봉의 기대와 안타까움 또 재회의 기쁨과 통곡이 날이 갈수록 더욱 높아가고 있습니다. (네 지금 대구에는요. 37년 만에 어머님과 따님이 만나셨습니다. 근데 어머님을 만난 기쁨도 크시지만요 어머니도 꼭 찾아야 되겠다고 그랬는데요. 듣고 계시죠? 네. 아버지하고 이북에서 넘어오실 때 어떻게 넘어오셨어요? 아버지는 경찰관이기 때문에요 6.25 나기 바로 직전에 나오셨거든요. 그리고 저는 1.4 후퇴 때 나왔구요. 그래서 영 소식을 몰라 처음 만난 거예요. 난 엄마가 돌아가신 줄 알고 포기상태에 있었죠. 그런데 이제 이름도 모르는 부모를 만나는 거 보고 또 자식들 이름도 모르고 이름 성도 모르는 그런 간난 어린애를 헤어진 자식들을 만나는 것을 보고 거기서 내가 용기를 얻어서 신청을 했지요.), (몇 년 만에 만나시는 겁니까? 33년이죠. 33년요? 네! 어디서 어떻게 헤어지셨어요? 6.25 때 개성 살다가요 개성에서 대구로 피난을 했어요. 어머니는 그때 6.25때 저희가 그때 4남매였어요. 밑으로 여동생만 셋이 있었는데요 막내 하나만 등에 업히고 두 동생은 어머니가 데리고 가셨었는데 어머니가 애들이니까 힘들잖아요. 내가 10살 때.. 그래서 어머니가 장사를 나간 다음에 우리가 친척 하나를 만나가지고 고아원에 가게 됐어요. 아버지는 6.25 때 납치당하셨어요.) 군청에 근무하던 아버지가 공산군에 납치되고 무작정 피난길에 나섰다가 뿔뿔이 헤어졌던 모녀가 다시 만났습니다. 당초 7식구가 피난길에 나섰다가 할머니와 두 남매는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목숨을 잃었고 엄마를 놓쳤던 철부지 딸이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의 품에 다시 안겼습니다. 6.25 동란은 조국의 강토를 초토화했을 뿐만 아니라 270만에 달하는 우리 동포들의 생명을 앗아갔고 단란했던 가정을 산산 조각낸 비극을 낳게 했습니다. 어버이를 잃고 어쩔 줄 모르며 추위와 굶주림에 내동댕이쳐진 아들딸들, 조상 대대로 내려온 고향산천과 정든 직장을 버리고 공산당이 싫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줄을 잇는 피난 행렬 어머니의 품을 그리며 애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저 어린아이들의 소원이 바로 지금에야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군에 입대한 사이 피난길에서 홀로 떨어졌던 천영옥 씨가 32년 만에 어머니와 언니를 한꺼번에 만나는 감격을 안았습니다. (TV에 보니까 부모형제 이름 모르는 사람도 다 찾는다는 방송이 나오더라고 그래서 거기에 나도 용기를 갖고 나를 누가 네 살까지 기른 사람이 있을 것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고 그 사람을 나는 찾으려고 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고 내가 땅에서 솟지 않는 이상은 누군가가 나를 네 살까지 기른 사람이 있지 않으냐 그렇게 하고 나는 그 사람을 찾으려고 마음을 먹었지.) 세계의 이목이 여기 여의도에 집중된 가운데 미국의 ABC방송은 한밤에도 집에 돌아갈 줄 모르고 애타게 혈육만을 찾고 있는 이산의 애절한 현장을 전 세계 전파에 실어 보내고 있습니다. 범국민적으로 확산된 이산가족 찾기 운동은 전국의 행정관서 민원실과 적십자사로 확대되어 10만이 넘는 접수자가 쇄도하고 2천이 넘는 가족이 재상봉에 성공했습니다. 혈육을 찾으려는 간절한 소망이 갖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낳게 하는 눈물겨운 광경들, 6.25가 낳은 이 민족적 비극을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해서 한 가족이라도 더 많은 이산가족이 하루라도 더 빨리 만남의 기쁨을 갖도록 힘을 합쳐야 하겠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온 국민은 단합하고 국력 신장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