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제 2의 건국을 꿈꿨던 지금의 공주 땅 웅진. 백제가 웅진을 두 번째 도읍지로 선택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성을 잃고 불과 1달 만에 서둘러 도읍을 옮겨야 했을 만큼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내야 했던 백제. 6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귀족들과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 5명의 왕들 중에 2명이 살해되고 웅진백제는 수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또한 고난의 세월 속에서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과연 웅진 백제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한성시대와 사비시대를 잇는 정치적 혼란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강력한 왕국 백제로 거듭나는 역사 발전의 단계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475년 그해 겨울 숨 가쁜 말발굽 소리가 아차산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그건 바로 7일간의 전투 끝에 한성을 내준 개로왕 일행이었다. 그때 고구려 군사가 그들 앞을 가로 막았다. 그렇게 한성백제는 막을 내렸다. 삼국사기는 개로왕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함께 백제에서 죄를 짓고 달아난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는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하고 침을 세 번 뱉은 후 그 죄를 따져 묻거늘 아차산 밑으로 끌고 가 살해했다. 꺼져가는 조국을 살리기 위해 개로왕의 아우 문주는 신라에서 만 명의 구원군을 이끌고 한성에 도착했다. 하지만 백제는 이미 개로왕의 죽음과 함께 파국을 맞은 상태였다. 이에 문주가 왕에 오르니 그가 바로 백제 22대 문주왕이다. 한성백제가 함락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서둘러 지금의 공주 지역인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야 했던 문주왕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백제가 도읍을 잃은 아픔을 딛고 제2의 건국을 꿈꾸었던 웅진. 서둘러 이곳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고는 하지만 새로운 도읍지를 선정하는 데는 많은 고민이 뒤따랐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에 도성을 함락당한 백제로서는 여전히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고구려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그렇다면 당시 웅진지역은 어떤 전략적인 가치가 있었을까? (유원재 교수 : "백제가 한강유역을 버리고 웅진으로 도읍을 천도하게 되는 원인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침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웅진으로 쫓겨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백제로서는 최대의 현안문제가 국책적인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있는 고구려의 위협을 해소하는 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위협을 해소하는 길은 천연지형의 의해가지고 고구려의 남침을 저지할 수 있는 길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온양지역에까지는 평탄한 분지가 전개됩니다. 온양의 이남지역에서부터는 차령산맥이 솟아나게 되고 그 남쪽으로는 금강이 또 흘러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지형이야말로 백제가 당시 고구려의 저지를 위해서 최대한 적지가 아니었겠나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도읍지가 지정학적인 이유만으로 선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고구려로부터의 남침을 피하려 했다면 도읍지를 좀 더 남쪽으로 옮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웅진 천도의 또 다른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문주왕을 도와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힘이 될 만한 지방 세력들은 없었을까? 그리고 그들 세력의 실체를 무덤양식을 통해 가늠해 볼 수는 없을까? (이남석 교수 : "백제의 묘제에는 유형이 다양합니다만 지역과 시기에 따라서 묘제 형태가 다르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특히 중앙 지배층 묘제와 지방 세력의 묘제가 색다르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앙 묘제 같은 경우는 횡열식 석실분 혹은 기단식 석실분 같은 경우, 기단식 적석총, 이른 시기에 것, 이런 것이 중앙묘제라고 한다면 지방묘제로는 토광묘, 옹관묘, 수혈식 석실분이라는 묘제가 사용 됩니다. 이렇게 묘제가 지역에 따라 혹은 시기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이런 묘제에 의해서 중앙세력, 지방 세력의 구분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먼저 공주 시내 백제시대 무덤 가운데 하나인 웅진동 고분군을 찾아 나섰다. 지난 1979년 발견된 이 고분군은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풀숲으로 우겨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백제시대부터 그 이후인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 무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남았고 백제시대 무덤들은 거의가 송산리 고분과 같은 전형적인 횡혈식 구조였다. 그 차이가 있다면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은 벽돌로 쌓았고 이곳 웅진동 무덤은 돌을 다듬어 사용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귀걸이나 팔찌를 비롯해 다양한 토기들이 나와 이곳에 묻혔던 사람들의 신분이 귀족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웅진동에서 보았던 무덤양식은 인근에 있는 금학동 고분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곳 역시 횡열식 석실분으로 돌을 다듬어 쌓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