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쉰을 넘어 속세에 얽매인 김지미씨. 영화 별아 내 가슴에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1962년 신인배우 김지미씨의 22살 때 모습입니다. 지금도 무슨 행사 때가 되면 일일 행원이다 일일 동장이다 해서 연예인들이 등장하기 일쑤입니다만은 난데없는 일일 교통 경찰관이 된 김지미씨의 밝은 모습에서 우리가 잊었던 밝았었을 우리들 소년기의 출발 시간을 되살립니다. 체조를 하는 듯 한 후라이보이 곽규석씨 뒤로 우리들 그 때 삶의 애환을 싣고 다니던 전차의 모습이 보이고 이미 고인이 된 김희갑씨는 특유의 익살로 서울 한복판 세종로 네거리를 폭소의 바다로 만듭니다. 서울인구가 300만 명이였던 31년 전인 1962년 마이카시대는 꿈꾸지도 못했던 그 때. 전국의 자동차대수가 고작 3만 대였던 그 때인데도 벌써 교통안전 강조기간이 있었고 신문들은 서울을 교통지옥, 교통전쟁의 도시로 내몰았습니다. “그 때 짚차 자가용 가졌으면 대단한거였습니다. 네 그래서 이제 짚차를 사용하는 데 어떤 사람은 속아서 산 사람이 있어요. 그 발동기. 발동기를 갖다가 엔진으로 만들은 차를 타고 왔는데 어찌나 소리가 요란한 지 뚜껑을 열어봤더니 이게 발동기를 갖다가 엔진을 대신 말하자면 발동기나 엔진이나 마찬가지지만 자동차 엔진을 대신 썼어요. 이대엽씨가 그런 차를 타고 왔더라구요. 비싸게 주고 샀어요. 또 그 양반. 그 속아가지고 다시 물렀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만서도 그 차가 없을 때 말이죠. 자가용 구하기 힘들 때는 그 도금봉씨 같은 분은 말이죠. 그 때 시발택시가 많을 때입니다. 시발택시를 자가용으로 아주 세를 내고 타고 다녔어요.” 서울 전쟁을 겪은 40년 전이나 정변을 겪었던 30년 전이나 그래도 서울은 우리의 희망이었습니다. 우마차와 지게꾼과 지친 사람들이 뒤섞여 걷던 서울은 우리들 희망을 걸어야만 하는 곳이었고 그래서 모두들 서울로 서울로 달려들 듯 모여들었습니다. 40년전 서울인구 100만 명. 30년 전 서울인구 300만 명. 그러나 서울은 늦깍이의 모습으로 좀처럼 깨어나질 못했습니다. 해방촌이다 영천이다 모여 살면서 무작정 상경을 토해내는 서울역 앞. 부릴 짐을 무작정 기다리는 지게꾼. 딱새요. 구두 통을 길거리에 받쳐놓고 쉽지 않은 구두손님을 기다리는 구두닦이. 그러다 공 친 걸음으로 서울역 앞 양동 언덕빼기에 자리 잡은 따라지 급식소에서 부풀대로 부푼 국수 한 그릇에 하루 끼니를 의탁하고 다시 지친걸음으로 발길을 돌리던 그 때. 마치 구원의 종소리처럼 서울이 살아있다고 외치는 듯 거리를 휘돌아 다니는 전차소리가 그나마 한순간의 위안이었습니다. 19세기가 끝나가던 1899년 모습을 보인 서울의 전차는 일제와 해방 그리고 6.25, 4.19, 5.16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울분과 탄식, 체념을 말없이 삭여주었던 발이었습니다. 차장으로 불리던 전차 운전사가 오른발로 동그란 기적 단추를 누르면 가로질러 오던 우마차가 놀라 달아나고 전찻길에 못을 놓아 지남철 만들던 아이나 사기그릇 조각을 놓아 연줄에 먹일 사금파리를 만들려던 아이들이 차장아저씨에게 붙들릴 라 줄행랑을 놓기도 했습니다. 원효로에서 효자동, 돈암동에서 마포, 청량리에서 서대문 2원 50전하던 전차표가 없어 하교길은 걷기가 예사였지만 내릴 때 표를 내는 것을 틈타거나 밧줄로 묶인 전차 도르래가 전기 줄에서 탈선한 틈을 타 전차 문이 열리면 후다닥 뺑소니도 쳤고 그러다 세종로에라도 발길이 닿으면 거기에는 언제나 구경거리가 많았습니다. 서울에 모든 구경거리는 세종로에 몰려있었습니다. 지금 태평로에 코리아나 호텔 맞은 편 그때는 중부소방서 망루가 있었고 그 옆 터에는 국군의 날이다 경찰의 날이다 하면은 언제나 사열대가 마련돼 행사의 중심이 되 있었는데 차량대수가 전국적으로 만오천 대를 넘지 못하던 1954년. 40년 전 지금 자동차 600만대의 사백 분의 일밖에 안되던 그 때. 손수레와 우마차, 자전거, 전차, 자동차가 엉켜 다니던 시절. 한 순간의 실수가 평생의 불구자를 만든다. 시쳇말로 5분 먼저가려다 50년 먼저 간다는 뜻의 표어를 내건 교통법규 준수 캠페인은 작은 서울 살던 때나 큰 서울 살던 때나 교통 난리는 변함없음을 씁쓸히 느끼게 합니다. 전차소리 때문은 아니지만 서울이 살아나고 이윽고 서울사람들도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민주당 정권의 장면 총리가 직무실로 쓸 정도로 특급 호텔이었던 반도호텔이나 그 옆에 뉴코리아호텔이 사라지거나 급수를 낮춰야만 할 정도로 빌딩들이 껑충 올라가고 당시 중부소방서 망루가 사유에 가려 망루 역할을 못 할 정도가 됐을 때 쯤에는 서울은 사람과 거리를 급하게 만들어놨습니다. 서울은 속도가 느리고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전차를 애물단지로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