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석조전에 자리하고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이 경기도 과천에 새집을 마련하게 됐다.

1984년 5월 1일 전두환 대통령 각하와 내외 귀빈들은 기공 삽질을 하고 한국 미술계의 오랜 숙원을 위한 길고 험한 대역사의 장도를 축하해 주었다.

이로부터 2년 4개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과천 청계산에 해머 소리는 그치지를 않았다. 그해 가을 주변부지 정리 작업을 완료하고 기초 및 지하 골조작업이 차질 없이 진행됐다.

2만 평의 대지위에 지하1층, 지상3층 연건평 10,272평 야외조각장 만평 규모로 188억 원의 막대한 예산이 투입됐다.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와 미술관 부지 위에도 눈이 소복히 내렸다. 그러나 건설현장엔 겨울이 없었다.

매서운 바람도 공사 열기를 식힐 수는 없었다. 봄이 오면서 작업은 더욱 활기를 띠어 건물 외형에 골조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돼 갔다. 3만 입방미터의 레미콘과 2천6백 톤의 철근, 5백 톤의 철골이 건물 구석구석에 사용됐다.

공사발주에서 준공까지 정부기관인 조달청에서 감리 감독을 시행했으며, 공사감독 및 검사와 회계관계 전문지식을 최대한 활용 품질 높은 자제의 선정, 화재예방 등 건물의 안전도를 높이는 내실 있는 공사로 무려 6억7천만 원의 예산을 절감하기도 했다.

한편 내부에 램프 코아와 벽면 공사도 차곡차곡 진행돼갔다.

고전적 조형 모티브를 설계에 도입, 겉으로 보기엔 전통적 산성 또는 봉화대를 연상시키는 건물 형태를 취함으로써 고전적 조형성을 부여했다.

건물 내·외부의 벽체 공사가 끝날 무렵 벽면과 화강암 사이에 스티로폼을 끼워 넣는 새 공법을 시도해 최고의 단열 효과 및 방습 효과를 올리는데 성공했다.

이십만 재에 해당되는 화강암이 석공들의 손에 의해 갈고, 재이고, 깎이어 건물 곳곳에 사용됐다.

이와 같이 신축 미술관은 돌의 예술품이라 할 만큼 미려한 석재가 많이 이용됐다.

석공들의 정성 어린 손끝에 갈고 닦인 크고 작은 화강암이 벽면의 그 평수를 더해 갈 때마다 미술관은 수려한 빛깔로 변해갔다. 옥외 전시장을 비롯한 그밖에 부대시설 공사도 차질 없이 진행돼 상량식 준비에 한몫을 다하였다.

1985년 11월 15일 약 70%의 공사가 마무리되고 문화공보부 장관을 비롯한 미술계 인사들이 다수 참석한 가운데 상량식을 올렸다. 상량식은 공사의 기폭제 구실을 했다. 그래서 건설은 급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한편 공사 중에 발생하기 쉬운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무재해 100만 시간을 달성하기도 했다.

건물의 웅장한 모습이 나날이 바뀌어 보일쯤 내부에선 각종 내장 공사가 벌어졌다. 타일을 부치는가 하면 각종 기계설비의 설치와 점검이 이루어졌다. 방범, 방염, 방제시설이 본격화되고 동력 공사와 수전설비를 해서 미술관내에 전기가 들어오게 됐다. 또한 방습을 위해 특수 벽지를 붙이고 도색을 했다. 각종 배선이 지나가는 천장 위에 마무리 공사도 있었다. 전기와 기계설비의 점검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안전을 위해 몇 번을 거듭해 갔다. 보일러실에 각종 보일러, 각종 공조실에 공기조화기, 지하 펌프실에 스프링쿨러 펌프와 옥내 소화전 펌프를 비롯한 냉동 기계실에 마무리 공사가 진행됐다.

전시실은 자연채광이 가능하도록 했다. 흑지를 발라 방습 방원에 효과를 높이는 동시에 빛을 차단시키고 작품의 손상을 막기 위해 자외선 투과가 적은 특수 유리를 사용했다. 이러한 천광창의 조성으로 전시장 내 자연광이 스며들게 했으며 건물에 안정감을 주고 에너지 절약 효과도 보게 됐다. 내부에 각종 조명시설도 훌륭하게 설치돼서 자연광과 더불어 항상 알맞는 실내 조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토목, 건축, 기계 및 전기공사가 차곡차곡 마무리되며 미술관에 우람한 자태가 청계산 산자락에 펼쳐 보일쯤 연못을 비롯한 주변 조경 공사가 한창이었다.

옥상 화단에 잔디를 심고 각종 수목을 식재하며 풍요한 햇빛, 녹색 공간이 되도록 모두의 정성이 모아졌다. 야외 조각장을 꾸미기 위한 단장이 한창이었고 어느 조각가의 공든 탑도 그의 염원처럼 돼갔다.

새 미술관의 탄생을 위해 그간 미술계의 따뜻한 손길과 정성이 하나가 됐다. 그중에서도 귀한 작품을 흔쾌히 기증한 분들의 고마움은 새 미술관 역사와 함께 길이 후손에 이어질 것이며, 애쓰다 이미 고인이 된 김세중 관장의 유업 또한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후손들에 의해 잘 보관됐던 귀한 작품들이 새 미술관의 개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덕수궁에 전시됐던 미술품들이 하나씩 포장돼 과천행 화물트럭에 조심스레 실려졌다. 실로 13년 만에 이루어진 나들이다.

1969년 경복궁에서 미술관이 개관된 이후 1973년 덕수궁으로 이전, 다시 과천 새 미술관으로.

1980년 10월 제 29회 국전에 참석하신 대통령 각하의 지시에 의해 미술관 건립이 추진된 지 6년 여 만에 그 결실을 보게 된 것이었다. 때를 같이해 불란서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미술품이 새 미술관에 전시를 위해 도착했다.

도난 방지를 위해 건물 밖과 안에 CCTV와 입체 감지기, 진동 감지기, 열 감지기, 적외선 감지기 등을 각각 24시간 설치 운영, 미술품의 도난방지에 대비했다.

미술에 관한 각종 도서자료가 비치된 도서실, 미술품을 보관 처리하는 훈증실, 각종 회의를 주제하고 시청각 자료를 관람할 수 있는 대극장, 소회의실을 비롯 수장고등이 들어섰고 기계실을 비롯한 전기실 등이 자리를 잡게 됐다. 그밖에 식당을 비롯한 휴게실 등의 부대시설이 불편 없도록 마련됐다.

미술관 내부를 보면 본관 격인 우측 1, 2, 3, 4, 5, 6전시실은 각종 기획전을, 제7전시실은 대여도 가능하며 좌측 1, 2, 3원형 전시실은 조각과 기타 작품들을, 지하엔 아카데미 사무동을 비롯 중앙 램프 코아를 중심으로는 식당을 비롯한 부대시설이 들어섰다.

수준 높은 국내외 전을 열어 현대미술의 향상과 국제 미술의 교류를 도모하기 위한 기획전시.

뛰어난 미술작품을 중심으로 시대별 부문별로 체계 있게 전시해 현대 미술의 전무를 제시할 수 있는 상설전시. 이러한 전시를 위해 396평의 드넓은 원형 공간엔 분주한 일손이 쉴 새 없이 오갔다.

2층 회화 상설전시장.

845평의 전시실에 500여 점의 동양화 서양화가 마무리 전시에 들어갔다.

램프 코아를 돌아들면 356평의 또 다른 원형 전시실엔 100여 점의 상설 조각 작품이 전시됐다.

3층 기념 전시실.

근대 미술사상 뛰어난 작품과 자료를 수집, 상설 전시함으로써 근대미술의 체계를 적립하는데 그 목적을 둔 기념전시실은 539평의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전시작업에 들어갔다.

필명을 높였던 대가들의 글씨를 대할 수 있는 서예실, 정교하고 단아한 예술 세계가 곱게 배어있는 공예 디자인실.

자연과 예술의 조화 환경예술의 극치를 위한 노력도 결실 단계에 들어가 무제, 싹, 끝없는 등의 조각품들이 그 모습을 보이며 청계산 산자락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1986년 8월 25일, 길고 험했던 공사도 막을 내리고 전두환 대통령 내외분를 비롯한 국내외 미술계 인사들이 다소 참석한 가운데 개관 테이프를 끊었다. 정부의 새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건립 계획이 구체화된 지 실로 6년 건축을 시작한 지 2년 4개월 만에 보는 기쁨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참석자들과 함께 관내를 두루 살피며 공사 관계자들을 격려해주기도 했다.

이어 신축 미술관의 개관을 학수고대하던 많은 미술 애호인과 일반에게 공개됐다. 때마침 개관 기념전으로 열린 ‘86서울 아시아 미전’과 ‘와이즈맨 컬렉션전’, ‘프랑스 20세기의 미술전’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 전’ 등이 열려 오늘의 세계 미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음은 물론 신축 미술관의 개관을 더욱 빛내 주었다.

서울 시청에서 미술관까지의 거리는 승용차로 30분 청계산 푸른 숲 속에 서울 대공원을 안고 민족문화의 전당으로써 한국미술사에 찬연히 빛낼 숱한 이야기를 뒤로 한 채 국립 현대 미술관은 그 자체가 한 폭의 예술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