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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건 바로!우리나라 직지와 흥덕사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의 발명국’이란 사실이 세계에 알려진 것은 1972년이다. 프랑스의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일명 『직지』 로 불리는 금속활자본이 바로 고려 말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계는 술렁거렸다. 그 이전까지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직지』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데, 이 책은 구텐베르크가 최초로 찍어낸 금속활자본 『42행 성서』 보다 78년이나 앞선 1377년에 간행되었다. 더불어 현전하지는 않으나 『상정고금예문』이라는 책이 1234년에 이미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인쇄의 역사는 유럽보다도 200년 이상 앞선다.

흥덕사지 참고 이미지
흥덕사지(2001)

『직지』의 발견

『직지』는 1972년 매우 전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파리 국립도서관의 특별연구원이던 박병선의 역할이 컸다. 박병선은 1967년부터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일했는데, 그곳에서 한국 한문 자료를 분류하고 해제하는 작업을 하다가 『직지』를 발견하였다.
박병선은 이 책이 구텐베르크보다 78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도서의 해 기념 도서 전시회’에서 『직지』가 현전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세계적인 공인을 받았다. 이로 인해 구텐베르크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가라는 학설은 뒤집어졌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직지』는 상하 두 권 중 하권인데, 보통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에 의해 약탈당한 것으로 오인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사실은 1886년 한·불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초대 주한대리공사로 부임한 콜랭 드 플랑시가 정식으로 구매해 간 것이다. 플랑시는 이 『직지』를 자신의 모교에 기증했고, 이것이 우여곡절 끝에 경매로 나왔을 때 앙리 베베르가 180프랑에 구입하였다. 이후 『직지』는 앙리 베베르의 유언에 의해 1950년경 파리국립도서관에 기증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직지심체요절 반환요청 참고 이미지
직지심체요절 반환요청(1993)

『직지』는 어떤 책?

국유재산(국유문화재)대장 :보물1132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참고 이미지
국유재산(국유문화재)대장 :보물1132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1999)

『직지』라고 불리는 이 책의 원래 이름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매우 긴 이름이라 간소하게 『직지』라고 부른다. 한때는 『직지심경』 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책의 내용이 부처님의 말씀만 기록한 것이 아니고 이후 고승들의 말씀도 가려 넣었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데에 붙이는 “경(經)” 자를 붙일 수 없다하여 최근에는 『직지심체요절』이라고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
책 제목이 길어 혼란스러울지 모르나 차근차근 풀어보면 “백운화상이 부처와 고승이 한 선에 대한 말씀 중 중요한 것을 가려 뽑아 모아놓은 책” 이란 뜻이다. “직지(直指)” 란 말은 불교의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에서 온 말로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보면,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는 뜻으로 ‘참선 용어’라고 한다.

백운화상은 고려 말 활동하던 승려인 경한의 다른 이름이다. 경한은 정읍 출신으로 어렸을 때 출가하여 중국에 건너갔다. 그는 중국에서 10여 년 간 머물면서 당대 고승이던 지공과 석옥에게 수학하였다. 고려에 돌아온 뒤에는 공민왕 때 국사가 되었으며, 말년에 성불산 성불사에 머물면서 상하 두 권으로 『직지』 를 저술하였다. 『직지』 는 그가 죽은 지 3년 뒤에 제자인 석찬, 달잠, 묘덕의 주도로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 당시 50~100부 정도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흥덕사 발굴

흥덕사는 『직지』 발견 후 관심이 높아졌지만 그 위치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84년 한국토지개발공사에서 청주시 운천동에 택지를 조성하면서 이름없는 절터가 발견되었다.
1985년부터 시작된 발굴과정에서 “…서원부 흥덕사(西原府興德寺)…”라 새겨진 금구(禁口) 조각과 “…황통 10년(皇統十年)… 흥덕사(興德寺)…”라 새겨진 청동불발(靑銅佛鉢) 뚜껑 등이 나왔다. 이로서 이 이름없는 절이 흥덕사란 것이 입증되었고 『직지』에 ‘청주목외 흥덕사’에서 인쇄했다고 하였으므로 이 위치가 바로 『직지』 가 인쇄된 자리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절터는 택지를 조성하면서 반파(半破)되었는데, 발굴 결과 금당지(金堂址), 강당지(講堂址), 서회랑지(西回廊址)의 유구만 확인되었다. 이를 토대로 흥덕사는 남북 중심축에 중문(中門)탑과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金堂), 그리고 정면 4칸, 측면 2칸의 강당(講堂)이 놓이고 금당의 좌우에 정면 12칸, 측면 1칸의 동서회랑이 배치된 단탑가람(單塔伽藍)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로 보아 흥덕사는 늦어도 9세기에 창건되고 고려 말 혹은 조선 초에 화재로 폐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청동소종(靑銅小鐘)·금강저(金剛杵)·청동용두(靑銅龍頭) 등 청동제품이 많이 출토되어 미술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86년에 사적 제315호로 지정, 1987년부터 5년여에 걸쳐 절터를 복원·정비하여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을 다시 짓고, 1992년 고인쇄박물관도 개관했다.

청주흥덕사지 정비사업 계획 참고 이미지
청주흥덕사지 정비사업 계획
(1987)
흥덕사지 정비 보존 참고 이미지
흥덕사지 정비 보존(1987)

한편, 『직지』 는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이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문화유산 가운데 해당 국가에 있지 않은데도 선정된 유일한 예이다. 아직까지 『직지』는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직지의 역사적 가치를 안 뒤부터 파리 국립도서관은 이를 단독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직지심체요절 세계기록유산 등록 신청 내용 건 참고 이미지
직지심체요절 세계기록유산 등록 신청 내용 건(1998)
직지심경 세계기록유산 등록 신청 경과보고 참고 이미지
직지심경 세계기록유산 등록 신청 경과보고(1998)
(집필자 : 김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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