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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700명 태운 프랑스 군함 좌초, “황제가 은혜 잊지 않을 것”

「조선왕조실록」 -  전함 2척 고군산도(古群山島) 인근, 식량·식수 요청

올해는 우리나라와 프랑스가 수교한지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프랑스 양국은 지난해 9월부터 올해 8월까지를 ‘프랑스 내 한국의 해’로, 올해 1월부터 12월까지를 ‘한국 내 프랑스의 해’로 정해 문화예술·체육·관광·과학기술·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지난 2010년 정상회의에서 우호협력 관계를 재확인하고, 21세기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확고히 한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 당시 양국 정상은 이를 위해 수교 130주년인 2016년 ‘한·프랑스 교류의 해’를 갖기로 했다. 이에 따라 지난 23일 장 마르크 에로 프랑스 외무장관과 윤병세 외교부장관 등 양국 각 분야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내 프랑스의 해’ 개막식을 가졌다.

이날 개막식과 함께 국립무용단과 프랑스 사요국립극장이 함께 만든 신작「시간의 나이」가 23~27일까지 해오름극장에서, 국립극단과 오를레앙국립연극센터의 「빛의 제국」이 4~27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초대된 세계적 권위의 제36회 파리도서전이 16일 개막되는 등 양국 문화·예술계 협업공연과 전시회가 잇따라 열리고 있다.

이에 앞서 지난해 9월 양국 정부 요인과 각계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 내 한국의 해’ 개막식에서 황교안 총리는 기념사를 통해 “양국은 인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면서 글로벌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반자가 되었다.”며 “양국의 문화교류와 더불어 상대국 문화에 대한 선호는 새로운 비즈니스와 창조산업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포괄적 동반자 관계로 발전한 우리나라와 프랑스인의 첫 만남은 1886년 조불수호조약(朝佛修好條約) 보다 40년 앞선 1846년이다. 정조 11년인 1787년 프랑스 군함 부솔호와 아스트로랍호가 울릉도 부근 해역을 측량했고, 1801년 신해박해 이후 프랑스 신부들이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양국 국민의 공개적인 첫 만남은 충청도 외연도 주민과 이곳에 온 쎄실 제독이 이끄는 함대이다.

헌종실록 13권 1836년 7월 3일 두 번째 기사는 요즘 기준으로 보아도 놀랄만한 사건이다. 수병 8백70명을 태운 프랑스(이하 실록 표기에 따라 불랑 또는 불란서) 전함(戰艦)이 지금의 충남 보령시 오천면 외연도(外煙島)에 들어와 주민 대표들과 일문일답을 나누고, 기해박해 때 프랑스 신부 3명의 처형이유를 따지는 외교서한을 전달한 것이다.

이날 헌종실록의 첫 번째 기사는 충청감사 조윤철의 장계로 불랑서국 제독 슬서이(Cecille의 한자음 표기)와 섬 주민들이 나눈 대화를 요약한 것이며, 두 번째 기사는 일문일답 원문인데 나름 예의를 갖추고 있으며, 항의서한을 전하는 것임에도, 비교적 우호적이다.

프랑스인 : 귀도(貴島)의 이름은 무엇인가?
조선인 : 우리 섬은 외연도인데, 귀선(貴船)은 어느 나라, 어느 고을에 속해 있는가?
프랑스인 : 이 배는 대불랑서국(大佛朗西國)의 전선으로 황제의 명을 받아 인도와 중국으로 3척이 왔는데, 그중 가장 큰
것으로 원수(元帥)가 타고 있으며, 귀(貴) 고려국에 알릴 일이 있어 왔다.
조선인 : 뱃사람은 몇 명이며, 아픈 사람은 없는가?
프랑스인 : 8백70명으로 아픈 사람은 없다.
조선인 : 어찌 인원이 그렇게 많은가?
프랑스인 : 상선이 아니라 전함(戰艦)이라 승선인원이 많으며, 우리 원수가 귀국 보상(輔相, 고위 대신)에게 전하는 서신을
가져왔다. 번거롭다고 이를 조정에 전하지 않으면 후일 재앙이 있을 것이다.

주민들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묻자 프랑스측은 질문사항을 글로 써 줄 것을 요구했고, 이에 외연도 주민들은 자리에 좌정한 뒤 질문하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프랑스 관계자는 주민 대표 4명을 정해 1층에 대기하면 원수가 나와 직접 답변하겠다고 전했다.

조선인 : 여기는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어서 귀 측이 준 문서를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프랑스인 : 즉각 보낼 것은 없다. 도성에서도 즉각 회신하지는 않을 것이니 기회가 있을 때 보내면 된다.
내년에 다른 전함이 왔을 때 답하면 된다.
조선인 : 무엇 때문에 회신을 내년에 받는가?
프랑스인 : 우리는 5만 리 밖에서 왔다. 다른 것은 염려 말고 서신이나 잘 전해 달라. 우리가 오래 있을수록 여러분에게
누를 끼칠 것이다. 우리 임무는 서신을 전달하는 것까지이다.
조선인 : 우리 섬은 지세가 험하고 물결이 높은데 언제쯤 배를 띄울 수 있나?
프랑스인 : 이 정도 물결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오늘 닻을 올리고 떠나겠다.

이날 첫 번째 기사는 충청감사 조운철의 장계로, 프랑스 수사와 나눈 문답을 주민들의 구술을 듣고 요약한 것인데, 주민들이 기록한 문답원문과는 확실히 다르다. 원수의 요구사항과 서신 내용 중심으로 정리하여 전함의 입경(入境) 이유를 확실히 하고 있다.

대불랑서국 수사제독(水師提督) 슬서이가 자국민이 죄 없이 처형당한 것에 대해 따졌다. 불랑서인 안묵이(Imbert의 한자음 표기), 사사당(Chastan의 한자음 표기), 모인(Maubant의 한자음 표기) 3명은 큰 덕망이 있는 인사들인데, 1839년(기해박해가 있던 해) 뜻밖에도 귀국에서 살해되었다. 귀국은 처형이유를 외국인 입경(入境)금지법을 어겼기 때문이라 했는데, 중국인과 일본인은 함부로 입경해도 강제추방에 그치면서 우리 국민은 왜 살해하였는가? 귀국의 대군자(大君子)가 대불랑서 황제의 인덕을 알리 없지만, 우리나라는 국민이 만만리(滿滿里)를 떠나 있어도 버림받거나 은택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다. 자국민이 범법행위를 하지 않았는데도, 처벌받는다면 이는 곧 우리 황제를 욕보인 것이다. 이에 대해 즉시 답변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니 내년에 우리 전함이 왔을 때 회답하기 바란다. 본수(本帥, 슬서이)는 자국민을 보호하려는 우리 황제의 인덕을 다시 알리며, 우리의 뜻을 전하니 향후 우리 국민을 가혹하게 해치는 일이 있으면, 큰 재앙을 면치 못할 것임을 경고한다.

슬서이 서신에 나오는 안묵이는 프랑스의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마카오에서 활동하다 1836년 천주교 조선대목구 주교가 되었으며, 1801년 신해박해로 와해된 교세를 회복하기 위해 1837년 밀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다가 같은 선교회 소속인 사사당, 모인과 함께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했다.

헌종실록 13권 1846년 7월 15일 첫 번째 기사는 외연도에 왔던 슬서이 서신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것이다. 임금이 불랑국의 글을 보았는가 묻자 영의정 권돈인이 아뢰었다. 글이 자못 공동(恐動, 위협적인 말로 두렵게 함)하는 내용입니다. 또한 외양(外洋, 먼 바다)에 출몰하며, 사술(邪術, 천주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됨)을 빌어 인심을 선동하며 어지럽히는데, 이들은 이른바 영길리(英吉唎, 영국)와 함께 모두 서양의 무리입니다. 항간에 사설(邪說, 그릇된 말)이 자못 많은데, 이는 이 글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백성들이 이 글을 보게 하여 그들의 실상을 알게 해야 합니다. 이에 임금은 1832년 영길리의 일은 중국에 보고했었는데, 지금도 그때와 다를 것이 없다. 중국에 알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권돈인은 반대했다. 영길리 배가 왔을 때는 교역을 요청했었고, 우리도 상세히 조사하였기 때문에 보고했지만, 이번 불랑선은 섬 백성을 위협하고 말끝마다 황제를 빙자하여 공갈을 일삼는데, 이를 어떻게 보고하겠습니까.

여기서 영길리 배는 국가기록원 뉴스레터 제54호(2015년 6월)에서도 소개했던 영국 상선으로 1832년 충청도 홍주 고대도에 들어와 10여일 머물면서 교역을 요구하다 물러갔는데, 이때는 통상요구가 주요 목적인 반면, 불랑국 배는 자국민 처형이유를 따지는 항의서한을 전하기 위해 입경(入境)한 전함이어서 영의정 권돈인의 반응처럼 반감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날 조정은 중국에 보고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바람에 정작 불랑국 항의서한에 대한 대책은 논의조차 못했으나, 1년 후 조선의 답변을 듣기 위해 실제로 위해 불랑국 전함이 왔고, 입경(入境) 중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프랑스 신부 처형에 대한 사과 요구는커녕 오히려 제발 도와 줄 것을 읍소하는 대반전이 일어났다.

헌종실록 14권 1847년 7월 10일 두 번째 기사는 불란서이(佛蘭西夷)의 배 2척이 만경지방에 표류하여 문정역관(問情譯官)을 착출하여 보낸다는 내용이다. 불랑서국 수사총병관(水師總兵官) 납별이(Lapierre의 한자음 표기) 대령이 이끄는 전함이 1년 전 슬서이 제독이 요구한 불랑서 신부처형에 대한 조선 조정의 답변을 듣기 위해 외연도로 향하던 중 지금의 전북 군산시 신시도 근처 갯벌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좌초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헌종실록 14권 1847년 8월 9일 네 번째 기사가 고군산도에 표류한 불란서 전함에 관한 보고이다. 표류한 사람은 모두 불란서인으로 7백인쯤 된다. 2척이 모두 파손되어 종선(從船)을 중국 상해에 보내 큰 배 3척을 삯내어 왔는데, 15일이 걸렸다. 그들이 이른바 회신을 받겠다는 것은 지난해 충청도 홍주 외연도에 정박했던 슬서이가 전한 서신에 대한 것이다. 임금이 소, 돼지와 쌀, 채소를 넉넉히 주어 먼 곳에서 온 사람을 회유하라 명한 바 있고, 그들은 떠날 때 전라도 도신(道臣)에 글을 보냈다.

이틀 후인 8월 11일 세 번째 기사도 불란서 전함에 대한 전라감사 홍희석의 장계이다. 고군산에 왔던 이양선은 이미 떠났습니다. 저들이 전한 서신의 사의(辭意)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미 떠났고 변정(邊情, 변경의 정세)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먼저 서신내용을 베껴 보냅니다. 섬 백성들이 한 달여 동안 물건을 대느라 고생하였는데, 피해가 없도록 각별히 살피겠으며, 갑작스런 사고여서 대응에 미흡함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답서(答書)도 늦어져 미처 전하지 못했고, 저들이 떠나며 남겨 놓은 물건도 있어 뒷날이 염려됩니다.

이날 네 번째 기사는 홍희석 전라감사 장계에 나오는 불란서 서신이다. 불란서국 수사총병관 납별이가 조회(照會, 어떤 사항을 관계기관에 확인함)하기 위해 알립니다. 지난해 슬서이 제독이 전한 서신의 답서를 받아 오는 임무를 본총병(本總兵)이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청국(淸國)에서 임무를 마치고 영광스럽게 개선하던 중 호의(好意)로 답신을 받아가기 위해 슬서이 제독이 지난해 정박했던 그 섬(외연도)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이곳에 좌초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많고 마실 물은 부족하며, 식량의 절반이 바닷물에 침수되었습니다. 먼 나라에서 온 난파선 승선원들에게 물과 양식을 도와주시길 절실히 빕니다. 상해에 배를 임대하러 갈 예정인데, 혹시 귀국에 큰 배가 있어 임대하여 준다면, 하루라도 일찍 떠나가 귀국에 누를 덜 끼칠 것입니다. 배를 빌려 무사히 귀국하면, 배 삯과 음식값을 공도(公道)를 통해 즉시 갚겠습니다. 불란서 황제도 환난에 빠진 백성을 구해 준 귀국의 은혜를 생각할 것이며, 본총병(라피에르 대령)도 귀국과 영구한 화호(和好) 맺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뜻을 고려국 전라도사대인(全羅道使大人)에게 전합니다.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1839년 기해박해를 시작으로 프랑스인 신부 9명과 조선인 천주교도 8천여 명이 처형당한 병인박해,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를 무력으로 점령했던 병인양요, 1886년 5월 3일 조불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하기 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7백여 명의 인원을 구조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감안하면, 그의 서신을 액면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라피에르 대령의 진정성을 믿으며, 그의 말대로 “양국의 영구한 화호”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