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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나는 <타임머신>

사극 『대박』 유감, 조선의 사관은 목숨을 던질지언정 …

『조선왕조실록』 - 두 달밖에 살지 못한 영조의 형이 백대길의 모델

SBS 월화드라마 「대박」(극본 권순규 연출 남건)이 지난 14일 제24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지난 3월 28일 첫 전파를 탄 이후 줄곧 10%대의 시청률을 유지해 온 이 드라마는 숙종시대를 배경으로 왕좌와 사랑을 놓고 잊혀진 왕자 백대길과 영조의 한판 승부를 그린 것으로 영조 4년인 1728년 일어났던 ‘이인좌의 난’을 주요 모티브로 하고 있다.

사극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적절한 픽션 (Fiction) 없이는 대중의 관심을 끌기 어려워 대부분은 팩션(Fact+Fiction) 형식이다. 대박 역시 실존인물들을 주인

무인상 이미지
출처: SBS드라마 「대박」 공식 홈페이지 포스터

공으로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픽션이 많다.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과 함께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백대길은 숙종 19년인 1693년 태어난 영조의 형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극중에서 백대길은 투전판을 전전하는 왈패에서 백성들의 정신적 임금님이 되지만, 「숙종실록」에는 태어 난지 2개월여 만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마지막 회는 대박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클라이맥스인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고 환궁한 영조가 이인좌를 능지처참하고 역모 가담자들은 친지와 사돈의 팔촌까지, 효장세자 독살 배후인 대비를 어조당(魚藻堂)에 유폐시키는 것으로 구성했는데,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적절히 뒤섞어 대미를 마무리 했다.

일반적으로 드라마는 결말에 대한 궁금증이나 반전을 통해 시청률을 높이는데, 사극은 결말이나 주요 등장인물들이 이미 알려져 있어 제작진들이 여간 고민이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결말과 후대의 평가가 다양하게 진행되어 온 이‘인좌의 난’을 소재로 한「대박」역시, 사극의 어려움을 비껴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탄탄한 연출과 배우들의 열연,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 없는 드라마였지만, 그래도 시청자들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굳이 옥의 티를 찾는다면, 주요 등장인물들에 대한 설정과 난(亂)을 평정하는 과정, 사초(史草)에 관한 장면 등이다.
마지막 회에서 난을 평정한 영조는 승지와 사관들은 급히 조정으로 불러들인다.

영조 = 승지와 사관들은 들으라. 역적 이인좌와 관련된 모든 사초를 가져 오라.
신하 = 후세에 직필이 사라질까 두렵사옵니다. 아무리 임금이라도 사초를 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거두어 주옵소서.
영조 = 법, 임금 위에 있는 법도 있더냐. 당장 가져오라.

〔신하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사초(史草), 시정기(時政記) 등의 제목이 붙은 책자를 임금이 한 장씩 뜯어 직접 불에 태운다〕

폭정의 아이콘 연산군도 사초 원문을 보지는 못했다. 1498년 「성종실록」 편찬과정에서 사초를 보려 했으나, 사관들이 극력 반대하면서 발생한 사건이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사관 김일손이 세조의 왕위찬탈 비판(조의제문)을 실록에 실으려 하자 연산군이 진노했고, 실록청 당상들이 한발 물러서 6개 조목을 발췌해 보여주는 것으로 절충했으나, 조의제문을 쓴 김일문의 스승 김종직은 부관참시, 사림파는 대거 숙청당했다. 하물며 영조가 사초를 보는 것도 아니고, 불태우는 모습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조는 사초를 태운 유일한 임금이다. 「영조실록」 1736년 2월 10일 네 번째 기사가 사초를 불태운 경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날 조정은 이이명과 김장집의 신원문제를 다루기 위한 자리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경종의 독살설과 자신의 연루설, 온갖 유언비어까지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듣다 못한 신하들이 차마 민망하여 들을 수가 없다며 그만하시라 만류했다. 이에 호조판서 이정제는 도저히 역사에 남길 수 없다며 사초를 태우자고 제안했다. 결국 다음날 새벽 3시쯤 영조는 사관 허후, 김상덕, 임술, 김태화에게 사초를 가져오게 한 뒤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을 추려내어 불태웠다. 전대미문의 이 사건은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인 ‘이인좌의 난’이 있은 지 8년 후로 아마도 제작진은 여기서 사초를 불태우는 장면을 따 온 것으로 생각된다.

제작진의 노력과 천재성이 엿보이는 대목이긴 하지만, 몇몇 아쉬운 부분도 있다. 우선 사관들의 태도이다. 이날 일은 모두 불에 타 훗날 실록 편찬과정에서 당시 입시했던 신하들의 구술을 기록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관들이 역사적 진실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무기력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25대 472년의 기록을 남기면서 때론 이정제 처럼 불태우자는 자도 있었고, 임금이 잘한 일만 기록하자는 강혼 같은 사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직필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또 한가지 흠을 잡자면, 준비한 소품이다. 이날 영조가 불태운 사초는 시정기(時政記), 사초(史草)의 제목이 붙은 책자와, 천(天)으로 시작되는 또 다른 제목의 책자인데, 시정기는 중앙과 지방이 주고받은 공문서철로 중요 사료 중에 하나였던 만큼 소품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사초는 사관들이 한 장씩 낱장으로 작성하여 모아 두기 때문에 제목까지 붙은 책자로는 존재할 수 없고, 제목이 천(天)으로 시작되는 사초는 아예 없다.

영조와 함께 또 다른 주인공인 백대길의 설정도 사실과는 많이 다르지만, 제작진의 노력과 기발함이 돋보인다. 백대길은 숙종과 숙빈 최 씨 사이에서 영조의 형으로 태어나지만, 궁궐 밖에서 잉태한 출생의 비밀 때문에 죽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영조의 형제는 희빈 장 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경종과 명빈 박 씨가 낳은 연령군이 있으나, 극중 인물인 백대길의 삶과는 너무도 다르다.

「숙종실록」에는 소의(昭儀, 내명부 정이품) 최 씨가 왕자를 생산했으나 2개월여 만에 숨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착안한 것 같다. 1693년 10월 6일 두 번째 기사는 왕자가 태어났는데, 소의 최 씨가 낳았다는 내용이다. 또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새로 태어난 왕자가 졸하였다. 인조 7년 1629년에도 두 살의 대군이 졸서하였는데, 예장을 거행하지 않은 전례가 있다. 이에 준하여 이번에도 예장을 거행하지 말라는 기사이다. 새로 태어난 왕자라고는 표현했지만, 10월 6일 이후로는 왕자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영조의 어머니인 소의(후일 숙빈으로 승급) 최 씨가 낳은 영조의 한 살 많은 형이 이날 숨진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여기서 착안해 탄생시킨 인물이 백성들의 마음속 임금으로 등극한 백대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클라이막스인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방법도 흥미롭다. 드라마에서는 반란군이 서울을 향해 진격해 오자 영조가 군(軍)을 급파해 진압할 것을 명하지만, 백대길은 전투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정규군 대신 게릴라전을 선택한다. 군량미를 불태우고 음식에 약을 타 반란군을 무력화 시킨 뒤 이인좌를 생포하고, 수하들을 보내 영남의 정희량과 호남의 박필현을 진압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병조판서 오명항을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한 정규군을 급파한다. 「영조실록」 1728년 3월 17일 아홉 번째 기사는 오명항을 사로도순무사로 차출했다는 내용이다. 수원부사 송진명이 반란군 동향을 보고하자 임금이 적정이 이러한데도 순토사(巡討使)가 아직도 진(陣)에 도착 못하다니. 늙은 장수가 일을 그르칠까 걱정이라며 조바심을 내자, 이를 듣고 있던 병조판서 오명항이 임금이 욕을 당하면 그 신하는 죽어 마땅하다며 적을 토벌하게 해달라며 자원했다. 임금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즉석에서 오명항을 사로도순무사로, 박창신을 중군으로, 박문수를 종사관으로 임명하며 즉시 출병토록 명했다.

3월 23일 일곱 번째 기사는 과천 용인 수원 직산을 거쳐 안성에 도착한 진압군은 반란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오명항이 대승으로 이끌었다는 내용이다. 관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운 밤이었는데, 반군이 이 틈을 노려 공격했으나, 때마침 불어 닥친 비바람으로 진퇴양난에 빠져 크게 패했다. 이어 관군은 마병(馬兵)과 금어군(禁禦軍) 중에서 정예군을 뽑아 거지나 장사꾼으로 위장하여 정보를 수집한 뒤 공격하여 연승을 거두었으며, 이인좌가 병력을 이끌고 청룡산으로 후퇴했으나 관군이 계속 추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다음날 반란군이 거의 궤멸되었는데도 이인좌가 잡히지 않자 오명항이 장교들로 추격조를 편성해 사방으로 찾아 나섰는데, 지역 주민 신길만과 승려들이 산사에 숨어든 이인좌를 잡아 관군에 넘겼다. 이날 종사관과 장수들은 흥분하여 극형에 처하려 했으나 오명항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며 만류했다. 이름 모를 반군의 머리를 장대에 건 뒤 적괴 이인좌라고 써 붙여 군사들과 백성들을 속여 서울로 압송했다. 이인좌는 하루 남짓한 짧은 공초를 거쳐 27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형을 당했다.

드라마에서는 영남의 정희량과 호남의 박필현을 백대길의 주변인물들이 각각 제압하지만, 실록에서는 도주하다 관군에 잡혀 처형을 당했다. 3월 26일 열 세번째 기사에 의하면 태인현감이던 박필현은 이인좌가 안성에서 체포된 다음날 전주 삼천에서 크게 패해 경상도 상주까지 도주해 아들과 함께 촌가에 숨었으나 이를 발견한 파총(把摠, 종4품 무관) 박동형의 신고로 붙잡혔다. 박필현은 “너 따위 하급 군관들에게 처형당할 내가 아니다”라며 끝까지 허세를 부리며, 서울로 보내 줄 것을 요구하다 26일 상주진 영장(營將) 한속에게 처형당했다. 정희량은 선산부사 박필건이 이끄는 관군과 거창에서 일전을 벌였으나, 휘하 20여명과 생포되어 군진으로 끌려가던 중 진주에서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던 우하형의 칼에 숨졌다.

안성에서 이인좌를 서울로 압송시킨 오명항은 나머지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계속 남진하여 4월 8일 충청도 영동의 추풍령을 넘었으나 반란군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창 함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간다는 계획이었으나 다음날 군졸들이 오랜 야영으로 지쳤을 테니 속히 철군하라는 임금의 명을 받고 발길을 돌렸다. 오명항은 이처럼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우의정에 올랐으나, 5개월여가 지난 그해 9월 10일 사망했다. 「영조실록」은 이날 “대신은 나라의 주석이고 나라의 심복이었는데, 정승이 된지 겨우 다섯 달 만이고, 입에 바른 피가 아직 마르기도 전에 이렇게 가다니 마음 아프고 슬픈 것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는가. 마땅히 찾아가 조문하여야 하나 상가가 강 건너 교외에 있어 갈 수 없으니 도문 밖에서 망조(望弔)라도 해야겠다”고 기록했다.

총 1893권 조선왕조 25대 472년의 기록 중에서 단 네 줄뿐인 왕자의 탄생과 죽음에서 백대길을 탄생시킨「대박」제작진의 창의력과 예술적 발상에 박수를 보낸다. 핵 개발에 대한 국제제재가 한창이던 지난 2006년 이란에서 방송되어 시청률 91%를 기록했던「대장금」, 지난해 중국 전역을 뒤흔든「별에서 온 그대」, 누적관객 1200만 명을 기록했던「광해, 왕이 된 남자」 등이「조선왕조실록」이 모티브가 되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가 남긴 기록들도 언젠가는 훌륭한 창작소재가 될 것이 확실하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도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