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컨텐츠 바로가기

MENU CLOSE


타임머신

인간 이순신 최고의 가장, 유일한 단점이 과음?

「난중일기」 - 1597년 8월 21일 소주 마시고 인사불성 10여 차례나 구토

무공 이순신 장군 부인의 실명이 방수진(方守震)이라는 주장이 발표되면서 때 아닌 실명 논란이 일었다. 지난 8일 노기욱 전남이순신연구소장이 한 세미나에서 이같이 주장했고 이에 대한 학계의 반론, 노 소장의 재반론으로 이어졌고 한 언론이 이를 상세히 보도하면서 확산되었다.

노 소장은 국보 76호로 현충사가 소장중인 ‘이충무공 서간첩(書簡帖)’을 살펴보던 중 한 편지의 상단에 가계의 이름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처() 방수진을 찾았다고 밝혔다. 이 서간첩은 이순신 장군이 현주 현씨 문중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으로 이 중 한 장에 20여 명의 가족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 그동안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는 방연화, 방태평 등으로 소개되었는데, 사료에 근거한 주장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송도해수욕장(1962)

    현충사

  • 해수욕장 전경(1973)

    난중일기

이와 관련, 동아일보는 11일 자에서 학계의 반론을 취재·보도했다. 제장명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은 “명단 가운데 처 방수진과 나란히 외() 변수림이 있는데, 변수림은 외조부이다. 이런 표기방식으로 볼 때 처()는 처 아버지, 즉 장인 정진(鄭震)으로 해석해야 한다.”며 “방수진으로 표기한 것은 보성군수(郡守)였음을 표시하기 위해 성과 이름 사이에 수()를 넣은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김희태 문화재전문위원도 “처는 처부(妻父), 외는 외부(外父)로 봐야 한다. 좀 더 논의해 보아야겠지만, 실명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 소장은 “명단의 다른 사람들은 이름 다음에 벼슬을 표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 앞에 벼슬을 넣었다는 주장은 수용하기 어렵다.”며 “고문서 해석은 있는 그대로 해야 하며, 그런 측면에서 실명으로 봐야 한다.”고 재반박했다.

학계와 언론이 이처럼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은 사료에 근거한 첫 주장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충무공의 위대한 업적에 가려 그동안 사생활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주요 원인으로 풀이된다.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표상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성웅(聖雄)이라는 칭호가 과하지 않은 여러 공적이 있다. 여기에 가리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내면세계가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 발행된 김훈의 「칼의 노래」가 중요 계기가 되었다. 작가의 오랜 취재와 상상력이 더해진 이 소설은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생각을 잘 추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보다 인간 이순신의 내면을 훨씬 더 잘 그려낸 기록이 「난중일기」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1월부터 전사한 1598년 11월까지 장군이 직접 기록한 이 일기에는 치밀한 전략과 철통같은 준비태세도 있지만, 대낮부터 술을 마신 이야기부터 점괘를 보며 답답한 심정을 달래는 모습까지 너무도 평범한 필부의 모습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최근 실명여부로 논란이 된 상주 방씨는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무남독녀로 20세이던 1565년 결혼했다. 그때까지 문과를 준비해 왔던 이순신은 다음해부터 무과로 전향해 식년무과에 급제한 31세까지 10여 년간 무예를 연마했다. 급제하던 해 12월 최악의 유배지로 악명 높은 함경도 삼수의 권관(종9품)이 되었다. 이때부터 전사한 1598년까지 33년 결혼생활 중 방씨와 함께한 기간은 무과를 준비하던 10여 년뿐이었다.

그 때문인지 난중일기에는 곳곳에 부인에 대한 애틋함과 안쓰러움이 배어있다. 방씨의 건강이 좋지 않았는지 난중일기에는 아내의 건강걱정이 많다. 1594년 8월 27일은 아내의 병이 위중하다는 편지가 왔다는 내용이고, 3일 뒤는 병세가 악화되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고 싶지만 나랏일이 이 지경이니 어찌해야 하나 한숨짓는 내용이다. 다음 날도 아내 걱정은 계속되었는데, 밤새 뒤척이던 장군은 날이 밝자마자 아내의 병세를 손수 점쳐보며 답답한 심정을 달랬다. 좋은 괘가 나왔다며 안도하는 장군의 모습은 장삼이사(張三李四)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처럼 정 많고 자상한 남편이었지만, 흠결이 없지는 않다. 난중일기에는 여러 명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덕수 이씨 족보에도 올라있는 해주 오씨는 병마사를 지낸 오수억의 서녀로 훈()과 신()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안타깝게도 두 아들은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전사했다. 난중일기 1593년 8월 13일에는 오씨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장계를 가지고 출발하는 이경복에게 경()의 어미에게 줄 노자와 문서를 넣어 보냈다는 것. 여기서 경은 훈의 아명이라는 주장이 있다. 따라서 이 주장이 맞는다면 노자를 받은 여인이 측실부인 오씨이다. 그해 가을 오씨가 한동안 함께 지내다 부안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가진 아이가 신으로 추정된다. 오씨와는 1597년까지 왕래했다. 따라서 1590년 정읍현감 때 만난 오씨와는 7년 여를 함께한 셈이다.

전란이 소강상태이던 1596년 윤 8월 13일부터 9월 28일까지 45일 동안 호남의 대부분 지역을 순행했는데, 이때도 여인들이 등장한다. 9월 12일 무장현에 도착해 4일을 머물렀는데, 이중 3일 밤을 여진(女眞)과, 3일 후 도착한 광주에서는 귀지(貴之)와 함께 밤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귀지는 당시 광주목사 최철견의 딸이었는데,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 챈 것은 이미 하룻밤을 지낸 다음 날이었다. 새벽부터 술에 취해 있던 최 목사는 장군과 함께한 아침밥상에서도 술만 마셨다. 마음 약한 장군은 최 목사만 혼자 마시게 둘 수 없어 덩달아 함께 마셔 만취했고, 그날 오후가 돼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장군과 절친한 사이로 때마침 이곳에 와 있던 이원익 체찰사에게 최 목사의 비위사실이 적발되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성상납을 한 것. 급한 마음에 딸을 팔아넘긴 못난 아버지의 참담한 심정과 뒤늦게 이를 알고 뜨악했을 장군의 당혹스러움이 느껴진다.

이밖에도 난중일기에는 몇몇 기녀들이 나오지만, 당시의 사회규범이나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의 긴장감과 공포를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난중일기는 그날의 날씨를 먼저 쓰고 본문으로 이어지는데,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날씨 다음으로 술 이야기가 많다고 한다. 1595년 8월 15일 새벽에 망궐례(대궐을 바라보며 올리는 예)가 끝나고 우수사, 가리포첨사 임치첨사 등 여러 장수들과 하루 종일 술을 마셨다.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해 시를 읊었다. 1596년 5월 5일 새벽에 여제(厲祭, 전염병이 돌 때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 아침 식사 후 회령포 만호 등 여러 장수와 술잔을 돌렸다. 술잔이 4차례 돌았을 때 경상수사에게 씨름을 시켰는데, 이날의 장원은 낙안군수 임계형이었다. 이날도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신 장군은 일기 말미에 술 마신 이유를 달았다. 내가 즐겁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장병들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계획했다. 그런데 술을 시작한 계기나 전개과정이 계획한 것으로 보기에는 궁색한 느낌이다.

물론 대부분은 전장의 긴장을 풀기 위한 것이었지만, 술을 워낙 좋아해 혼자 마시다 만취하기도 하고,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어이없는 실수도 많다. 1597년 8월 15일에는 별다른 이유 없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같은 달 21일에는 곽란이 났다. 몸을 차게 해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소주를 마셨다. 결국 인사불성이 되었고 10여 번이나 구토를 해 고통스러웠다. 1596년 3월 5일 해가 뜰 무렵 견내량에 도착해 우수사와 아침부터 술을 시작해 저녁까지 마셨다. 잔뜩 취해 이정충의 장막에 들렀다가 쓰러져 잠들었다. 비가 많이 온다는 보고를 받고 일어났는데, 그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고 말도 못하는 우수사가 무척 웃겼다. 8일 출근해 보니 전라우수사 등 여러 장수들이 와 있어 하루 종일 술을 마셨다. 9일 아침 전라우우후와 강진현감이 돌아간다기에 술을 먹였는데 우우후는 술이 취해 가지 못했다. 오후에는 전라좌수사가 송별식을 하자고 찾아와 대취했고, 방에도 못 들어가 대청에서 잠들었다. 10일 아침부터 비가 내려 어제 함께 마신 좌수사를 다시 불러 술을 마셨는데, 얼마나 마셨는지 꼼짝도 못했다. 장군의 음주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대체로 해장술을 즐겼다.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태산 같았던 장군도 원균에 대해서는 디스 대마왕이었다. 1593년 5월 21일 이영남이 와서 원균의 거짓 공문을 보고했다. 흉포하고 포악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29일 송경락이 보낸 화전(火箭, 화약을 태워 추진력을 얻는 로켓 화살)을 나누어 쓰자 공문을 보냈더니, 그때부터 나를 모함하고 다닌다. 가소롭다. 남해현령 기효근이 배를 옆에 댔는데, 어리고 예쁜 여자를 태우고 있었다. 백성들이 알까 두렵다. 대장(원균)이 그러니 부하들이 그 모양이다. 1595년 11월 1일 김희번이 서울에서 원균의 답서를 가져왔는데, 천지에 원씨 보다 흉포하고 망령된 이는 없을 것이다. 1597년 5월 7일 한산도에 다녀 온 이경신이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흉악한 원균이 데리고 있는 서리(書吏)를 육지에 내보낸 후 그의 부인을 탐하려다 그 부인이 도망쳐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그런 자에게 모함을 당하는 내 운수가 불우할 따름이다. 이순신이 원균을 이긴 것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라는 농담이 있을 만큼, 원균에 대한 감정을 상세히 일기로 남겼다.

  • 송도해수욕장(1962)

치밀한 전략과 철저한 준비로 23전23승의 신화를 쓴 명장이었지만, 가족 앞에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범부였다. 답답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점을 치거나 해몽을 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장군은 주역으로 괘를 풀어보는 척자점을 잘 보았는데, 1594년 7월 14일은 아들 면의 병세가 악화되자 점을 친 것이고, 같은 해 9월 1일은 아내의 병세를 점쳤는데 좋은 괘가 나와 좋아한 내용이다. 1597년 10월 14일은 전날 밤 꿈 이야기이다. 새벽 2시경 말을 타고 언덕을 오르다 떨어졌는데, 면이 달려와 장군을 안아 일으키는 꿈을 꾸었다. 무슨 징조인지 풀어보며 불안해하였는데, 이날 오후 아들 면이 전사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부음을 받았다.

충무공은 53년의 생애 중 22년을 야전에서 지냈다. 여느 가장들처럼 알뜰히 가족을 챙길 수는 없었지만, 난중일기에는 장군의 가족 사랑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곳곳에 배어있다. 지나친 비약이지만,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한 충무공의 구국 일념이 가족의 안위를 지키려는 그만의 방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가족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이다. 각 가정의 평화와 행복이 곧 국가의 안녕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