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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진짜 큰 도적은 임꺽정 아닌, 가렴주구 재상들

「조선왕조실록」 - 빼앗겨도 하소연할 곳 없으니 도적될 밖에…

지난 11월 21일은 90년 전 벽초 홍명희 작가가 대하소설 「임꺽정」을 처음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날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성호사설」의 저자인 이익은 일찍이 조선의 3대 의적으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을 꼽았는데, 홍길동에 이어 두 번째로 소설화되었으며, 훗날 황석영의 「장길산」을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나라 근대 역사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소설은 조선일보에 1928년 1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10년 넘게 연재되다가 일제의 조선일보 폐간조치로 중단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일보가 발행하던 종합잡지 「조광(朝光)」으로 옮겨 연재했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미완의 작품으로 남았다.

  • 드라마 속 임꺽정 모습

    드라마 속 임꺽정 모습

  • 비록 미완성이지만, 이 소설은 왕조사 중심이거나 근거 없는 야사에 의지한 영웅주의적 내용이 주류를 이루던 역사소설의 경향을 완전히 벗어나 민중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해석했다. 명종 때의 도적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조선 중기의 역사적 상황을 광범위하게 수용하면서, 봉건적 질서를 뚫고 꿈틀대기 시작한 하층민들의 저항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민중정서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역사해석의 가능성을 보여 준 실험적 작품이다.

    또한 이 소설은 언어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사용된 낱말과 문체가 일본어에 전혀 오염되지 않은 우리말의 전통을 그대로 살려내고 있으며, 문체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것이어서 우리말의 보고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소설이나 만화 등을 통해 형상화된 것이지만, 임꺽정은 홍길동 보다 훨씬 더 산적 같은 외모를 가졌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임꺽정에게 더 가깝고 친근함을 느낀다. 얼마 전 세계일보는 짧지만 재미있는 보도를 했다. 구청이나 동사무소의 민원서류 견본에 홍길동이 쓰이는 것은 조선 중기부터 도적을 대표하는 이름이여서 기피하기 때문이라는 것. 동사무소 한 직원은 사망신고를 하러 왔는데 견본의 이름이 자신과 같다면, 어떻겠냐며 그렇다보니 가장 쓰지 않는 이름인 홍길동으로 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이와는 달리 임꺽정은 고깃집이나 대중음식점 상호로 흔히 쓰이고 있으며, 심지어 벽초의 고향인 충청북도 괴산에서는 칼 대신 이 고장 특산품인 고추를 들고 있다. 아마도 지배계층에 저항하는 건강한 생명력과 고달픈 삶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는 낙천적인 민중정서를 대표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임꺽정의 산채가 있던 황해도 구월산

임꺽정의 본명은 거정(巨正) 또는 거질정(巨叱正)이었는데, 벽초가 조선일보 연재 중에 제목을 「임거정전」에서 「임꺽정」으로 바꾸면서 고착화되었다. 산채에 들기 전에는 황해도에서 백정 일을 했다. 흔히 백정을 가축을 도축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대나무나 갈대로 소쿠리나 채반 같은 생활용품을 만드는 직업도 백정이라고 했는데, 임꺽정은 후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우락부락하고 덩치 큰 산적으로 새겨져 있어 사랑방에 쭈그리고 앉아 한땀한땀 갈대를 엮는 모습은 쉽사리 연상되지 않는다.

갈대제품을 내어다 팔던 평범한 백성 임꺽정은 왜 산적이 되었을까. 드라마에서도 여러 차례 소개된 윤원형과 정난정을 따르는 부패한 관료들이 원인이다.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한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온갖 축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명종실록 1553년 8월 8일 기사는 사간원이 황해도 황주 안악 봉산 재령 백성들이 갈대로 삿갓 등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몇 년 전부터 권세가들이 사용료를 받고 있다. 이 일대 갈대밭을 백성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건의이다. 명종은 호조가 조사한 후 환수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3년 후에는 무슨 일인지 내소사 귀속을 명했다. 1556년 1월 14일인데, 이번에는 사헌부가 봉산 주민 80여명이 생계가 막막하다며 사용료 감면을 건의했는데, 임금은 그 고을은 내소사 귀속이 맞는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상소가 거듭되었지만, 소용없었다.

부패한 권세가들의 욕심을 끝이 없었다. 갈대 사용료로는 성이 차지 않아 백성들을 강제 동원해 갈대밭을 개간했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백성들은 소작농이 되었지만, 그나마도 군역과 세금으로 다 빼앗겨 당장 먹고 살 땟거리조차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길거리에 나앉은 백성들의 대부분은 걸인이 되었고, 일부는 산적이 되었는데, 황해도 구월산 산채의 두령 임꺽정도 그 중 한사람이다.

  • 임꺽정이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며, 강원도와 서울까지 넘나들기에 이르렀고, 추포에 나선 이억근이 화살을 맞아 사망하자 조정이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명종 14년인 1559년 3월 27일이었다. 영중추부사 윤원형의 주재로 열린 이날 회의에서는 지금까지의 실패원인을 분석하고 향후 체포계획을 논의했다. 추적에 실패한 이유는 산적들의 보복이 두려워 백성들이 신고를 꺼리고 있는데다, 개성유수가 군사작전에 미숙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에 따른 대책으로 개성부 도사를 무관으로 뽑아 군사를 거느리고 직접 추격하기도 하고 적정을 정찰하게 하는 한편, 이를 태만히 하면 군법에 따라 처벌할 것 등을 논의했다.

    회의를 참관한 사관은 부패한 신료들의 한심한 대책회의를 지켜보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속으로 삭여야 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들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 종합토론

    드라마 속 윤원형과 정난정

지금 재상들의 탐오가 한이 없어 백성들의 고혈(膏血), 기름과 피)을 짜내고 있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다. 사관은 도적발호의 원인이 부패한 재상들에게도 있지만, 지난날 백성들의 호소를 뿌리친 임금에게도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날 젊은 사관이 사론을 통해 밝힌 대책은 회의에 참석했던 영의정 상진, 좌의정 안현, 우의정 이준경 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이었다. 진실로 조정이 부패를 일소하고, 수령들을 한나라의 공수나 황패처럼 첨렴하고 유능한 관료들로 임명하면 도적들이 검을 버리고 송아지를 사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군사만을 동원해 해결하려 한다면 더 큰 도적들이 끝없이 발호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1560년 9월 5일 임꺽정이 전옥서를 부수고 이곳에 수감 중이던 자신의 아내를 구출하는 대탈출에 성공했다. 임꺽정 일행은 이날 지금의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일대인 장수원리에 집결했다. 활과 큰 도끼로 무장한 이들은 야음을 틈타 전옥서에 침투한 뒤 과감하게 옥문을 부수고 아내를 구출했다. 청계천으로 빠져나간 이들을 포졸이 추격했으나 잠시 후 감쪽같이 사라졌다.

손에 잡힐 듯 저만치 앞서 갔을 뿐인데, 그들은 어떻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동대문 근처에 설치된 청계천 2개의 수문 중 북쪽에 있던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어 가능했다. 세종 3년이던 1421년 6월 7일 폭우로 청계천이 범람했다. 이에 조정은 청계천을 준설하기로 했다. 다음 해 착공한 이 공사는 장장 12년만인 1434년 준공됐는데, 이때 인왕산과 백악산 물줄기가 흘러드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 임꺽정이 부수고 달아난 오간수문이다. 영조 때 청계천 준설공사 장면을 그린 수문상친임관역도(水門上親臨觀役圖)에 이 수문의 쇠창살이 나온다. 보통사람은 휘어 볼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굵은데, 임꺽정은 거뜬히 이 쇠창살을 뚫고 종적을 감춘 것이다. 이렇게 빠져나온 임꺽정 일행은 인근 마을에서 며칠을 숨어 지내다 사건이 잠잠해진 뒤 달아났다.

  • 임꺽정이 아내를 전옥서에서 구출해 도주한 청계천과 오간수문

전옥서를 부수고 일당을 구출한 장본인이 임꺽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2개월여가 지난 같은 해 11월 24일이다. 명종실록 이날 기사는 포도대장 김순고의 보고이다. 임꺽정 일당 중 한사람이 엄가이(嚴加伊)라는 가명으로 숭례문 근처에 살고 있다는 첩보가 있어 여러 날 잠복한 끝에 붙잡았는데, 문초한 결과 임꺽정의 심복인 서임이었다. 서임은 지난 9월 전옥서를 침입한 자가 임꺽정이며, 청계천과 오간수문을 통해 도주할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또한 이달 26일에는 황해도 평산에서 대장장이를 하는 이춘동이 이끄는 일당이 신계군수 때 구월산 산채 동료들을 많이 잡아들인 봉산군수 이흠례를 살해할 계획이라고 털어놓았다. 이날 포도청은 이춘동을 체포하기 위해 부장 1명, 군관 1명, 금교찰방 1명 등을 급파했다.

신출귀몰하는 임꺽정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던 1560년이 저물어 갈 즈음 황해도 순경사(巡警使, 임꺽정 체포를 위해 파견한 임시관직) 이사증에게서 뜻밖의 장계가 올라왔다. 관군 500여명을 투입하고도 매복작전에 걸려들어 실패했던 임꺽정 체포를 이사증이 해냈다는 것. 장계를 받아 든 명종은 도적의 괴수를 잡았다니 진실로 가상하다를 연발하며, 경험 많은 포도군관과 날쌘 군사들을 보내 엄중히 호송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며칠 지나지 않아 고문조작으로 밝혀졌다. 1561년 1월 3일인데, 의금부가 일찌감치 관군에 체포되어 변절한 서임과 대질시킨 결과, 꺽정의 형인 가도치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관은 이날도 사론을 빼놓지 않았다. 조정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큰 도둑은 물욕에 끝이 없어 백성의 이익을 빼앗는 일은 무엇이든 못할 게 없는 주상의 외척 윤원형과 심통원이다.

관군으로도 어쩔 수 없을 만큼 임꺽정의 세력이 커지자 조정은 그를 반역의 괴수로 규정하고, 체포한 수령은 현 직급에 관계없이 당상관으로, 천민은 양민으로, 압수한 도적의 재산 전액을 지급하는 파격적인 포상조건을 내걸었다.

과거 일부 사정기관이 승진과 훈·포장을 노리고 간첩단이나 시국사건을 조작했던 것처럼 파격적인 포상이 걸리자 이사증이 사건을 조작한 것. 사헌부가 의금부의 조사내용을 면밀히 검토하는 과정에서 조직적인 조작의혹이 드러난 것. 임꺽정을 체포했다는 장계가 있은 지 4일이 지난 1월 7일인데, 추관(推官, 심문관) 강여가 처음부터 아닌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공으로 삼기 위해 순경사 이사증에게 허위보고를 했고, 이사증 역시 의심의 여지가 많았음에도 확인하지 않고 조정에 보고했다. 사헌부의 재조사에서 강여와 이사증은 처음 추문할 때부터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서울로 호송하여 심문할 것에 대비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도록 마구 폭행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헌부는 또 의금부가 심문을 위해 장을 한 대라도 쳤으면, 가도치가 사망했을 것이라며, 그나마 호송 도중 죽지 않아 조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이 잊혀 질 즈음 또 한건의 가짜뉴스가 있었다. 1961년 9월 7일 평안도 관찰사 이양이 임꺽정과 한온을 의주목사 이수철이 체포했다고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임금은 뛸 듯이 기뻐하며 이 보고서와 심문내용을 보니 놀랍기 그지없다며, 선전관을 보내 두 죄인이 다치지 않게 속히 호송해 오라고 명했다. 같은 달 21일 서울로 호송되기까지 조정은 이들을 진범으로 알고 있었으나, 추문을 시각하자마자 또 가짜인 것으로 드러났다. 임꺽정은 해주의 군사 출신인 윤희정, 임꺽정의 동료 한온은 봉산 출신의 윤세공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때부터 다음해 1월 임꺽정이 체포되기까지 이들과 가짜 보고에 관여한 관원들의 처벌을 놓고 온 조정이 들끓었다. 심문에 나선 추관들이 보고했다. 여러 차례 반복한 심문을 통해 임꺽정과 한온이 아닌 것은 확인됐으나 그동안 이들이 벌인 범죄는 임꺽정에 못지않은 역적 수준이다. 따라서 이들을 엄히 처벌해야 한다는 것. 추가 심문에서도 이들의 범죄가 모두 사실로 확인되어 윤희정과 윤세공은 처형되고, 허위보고를 한 의주목사 이수철, 공초작성에 관여한 신언 등 8명은 추국하여 여죄를 밝히도록 했다.

같은 해 10월 6일 해주와 평산에서 도적들이 대낮에 민가 30여 호를 불태우고 마을주민 여럿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조정은 잔인무도한 토벌로 악명 높은 남치근을 황해도 토포사(討捕使, 무장한 도적이나 반란세력 토벌을 임무로 하는 군관)로 임명했다. 포도대장과 병조·형조 당상관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토벌에 나선 남치근은 임꺽정의 근거지로 예상되는 지역 수백리를 닥치는 대로 불태우고 부수며 초토화시켰다. 임꺽정 일당을 포위하는데 성공한 남치근은 한발 한발 압박을 더해 갔고, 더 이상 피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임꺽정은 관군으로 위장해 포위망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적은 토포사 남치근이 아니라, 한 때 가장 믿었던 심복이었다. 변절한 참모 서림의 지목으로 결국, 관군 속에 섞여 있던 임꺽정이 체포되었다.

이날 공로로 토포사 남치근, 군관 관순수. 홍언성, 사복 윤임은 각각 1계급 특진, 종사관 한흥제와 박호원에게는 말 한필씩을 하사했다.

이미 지난 과거는 가정(假定)이 성립될 수 없지만, 만약 그때 임금이 황해도 백성들의 절규에 조금이라고 귀를 기울였다면, 토포사 남치근의 말 발급에 무고하게 스러져 간 수많은 양민과 추포꾼의 칼끝에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산채에 들 수밖에 없었던 임꺽정과 그의 동료들은 없었다.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은 이 같은 우를 다시는 범하지 않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