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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공모전 우수작

대한민국 희망기록찾기 온라인 공모작에 응모한 기록물 중 우수한 공모작을 선정하였습니다.

눈물로 가려진 빛바랜 사진

김지웅作

무엇이든 자신이 노력하려면 배울 기회가 많은 지금 세대 오늘 조용히 어머니의 빛바랜 사진을 한장 한장 보며 역사속에 잊혀진 어머니의 이야기를 쓸까 합니다.
가난해서 배우지 못하고 그저 먹고사는게 제일 중요하고, 어린나이에도 날품을 팔며 하루 하루 연명해 가며 어렵게 사셨던 시절 ! 배움에 욕심이 있어도 돈이 없어 배우지 못했던 암울했던 그시절을 겪으셨던 우리 어머니....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시고 그렇지만 배움의 꿈만은 놓지 않고 싶으셨던 분..
그러나 현실은 그런 어머니의 꿈을 더이상 따라주지 못했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배고픔속에서도 그저 배움이라는것! 비록 여자였지만...!
글을 배우고 세상을 배우는 것에 욕심을 버리지 못하셨던 분이셨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홀로 어렵게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신 어머니께서는 정말 과거에 돈이 없고 어려워서 배우지 못했던 설움을 더이상 가난한 어린 친구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후 어머님께서는 큰 결심을 하시게 되었고, 동네 작은 움막을 얻고 가난한 학생들 네명을 모아 야학을 시작 하셨다고 합니다.
또한 항상 어머님 께서는 "가난해도 희망을 잃으면 안된다. 배움만이 이 가난을 극복 할 수 있는 것이란다"하시며 어린학생들을 격려 하셨다고 합니다.
어려웠던 그시절 주변에서는 한 사람의 손길도 모자란 판에 학부모님들은 어린학생들을 밭이나 논으로 끌고 가기 일쑤였고 "그저 하루 하루 일하시는 것이 사는것이다 배워서 뭐하냐" 하시며 공부하는 학생들을 타박하는 주민의 반대도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학생들이 놀이 시설이라고는 마당밖에 없던 그시절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축구공을 가지고 노는 학생들을 보며 너무나도 안쓰러우셨다고 합니다.
그후 어머니께서는 꼭 학생들에게 공을 사주시겠다는 마음을 먹으시고 밥을 굶으시더라도 한푼 두푼 돈을 모아 축구공과 배구공을 사오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당시 학생들의 상기된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미소를 지으싶니다.
"멀리서 어린학생들이 구름같이 뛰어 오며 선생님하고 부르더구나 그래서 너희들 왜 이렇게 뛰어오니 라고 물으니" 제일 먼저 뛰어온 학생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저희가요 누가 먼저 선생님이 사온 축구공을 만져 보느냐 내기를 했거든요"하면서 숨을 헐떡 거리던 그 학생을 생각하시며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또한 겨울이면 학생들은 마을과 좀 떨어진 천막 학교에 갈때 눈위에 선생님 발자국을 보면 흐뭇해 했다고 합니다.
"아 선생님이 우리보다 일찍 나오셨구나" 한 달음에 달려가고 그 발자국이 있을때 마다 학생들은 선생님 나오셨나 안나오셨나 하면서 자기들끼리 내기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학생들이 한글을 읽고 부모님에게 신문도 읽어주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주니 이래서 정말 배움이라는 것이 필요하구나 하시며 동네주민들이 합심해서 겨울에 훼손된 천막 고쳐 주시고 증축해서 새로 학교를 지어주셨고 이웃 마을까지 소문이나서 학생들이 하나둘 더 모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후 학생들은 선생님인 제 어머니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국민학교 교과 과정등을 공부하게 되었고 문맹이 많았던 그시절 나중에는 동네 어르신분들께서는 가끔 편지를 들고 오시거나 고구마나 밭에서 재배한 음식물들을 가져오시고 또 어떤 어른들은 아이처럼 어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켜 달라며 조르셨다고도 합니다.
또한 가난했던 그때 학비대신 닭이나 계란등을 들고 오신분들도 계셨답니다.
그렇게 동네 야학으로 시작하셨던 어머니께서는 아버님을 만나셨고, 1960년 박정희 대통령의 훈령으로 전국에 부랑아집단을 묶어 두기위해 재건중학교라는 3년과정의 지방 야학이 생겨 나게됩 니다.
그후 배움의 뜻은 있지만 하루 하루 가난과 싸워야 했던 가정 환경이 어려웠던 학생들위해 주변의 지주분들과 동네 주민 분들의 협조를 얻어 저희 부모님은 태안 재건중학교를 설립하시게 되셨습니다.
또한 학생들이 많아지다보니 급여는 없지만 정말 뜻이있는 선생님들도 모이고 운동장도 생기고 교실도 확충하고 정말 이제 사립학교로써 이미지를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이 꿈을 않고 재건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으나 정부와 교육부의 방침에 따라 정식학교로써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다시 중학교 검정고시를 치뤄야만 중학교 졸업장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선생님이셨던 분들은 아직까지도 정교사로써 국가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시고 있다고 합니다.
벌써 시계가 새벽 4시를 가르키는군요. 지금 생각을 해보니 어렸을적 6살때즘인가 재건중학교라는 이름은 역사속에 사라졌습니다.
뭐 이제는 흘러간 추억이 되버렸습니다만 제 어머님께서는 우리의 역사에 진정한 스승이 무엇인지 참 교육이 뭔지를 알려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벌써 30여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고 청춘의 꿈을 교육자로써 남기고 싶으셨던 우리 어머니...비록 이루시지는 못하셨지만 가끔 회상을 하시고 조용히 미소를 지으시며 그 당시 학생들 이야기를 종종 해주시곤 합니다. 이제 환갑을 훌쩍 넘겨 버린 어머니.. 이마의 주름에는 세월의 흔적만 남아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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