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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고개'를 넘어 증산의꿈을 이루다!'

1970년대

  • 벼 다수확왕 회견2(1974),CET0033229(2-1)

    벼 다수확왕 회견2(1974),
    CET00332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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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단계 풀베기작전 도청직원 풀베기작업1(1975),CET0105620(1-1)

    제5단계 풀베기작전
    도청직원
    풀베기작업1(1975),
    CET01056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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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벼 병충해없애기 및 퇴비증산 100일 작전 구자춘 경상북도지사 연설1(1972),CET0105801(1-1)

    벼 병충해없애기 및 퇴비
    증산 100일 작전 구자춘
    경상북도지사
    연설1(1972),
    CET01058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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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1,2차 경제개발 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농업분야 지원여력이 비축되었다. 이에 정부는 그 동안 쌓아올린 성장여력을 농수산부문에 집중시키고자 다양한 농업정책을 마련하였다. 농정의 최우선 과제는 여전히 식량 증산에 두었고, 그 중에서도 쌀 자급에 치중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 농업용수의 개발, 경지정리와 배수 개선, 농지의 보전과 확대 등 농업생산기반조성에 주력하는 한편, 농업기계화 사업, 다수확 벼품종의 개발 보급, 농산물가격 지지정책 등을 추진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개발되어 보급단계에 들어간 다수확 신품종인 통일벼의 수확성이 당시 다른 품종 보다 30% 이상 높게 나타나자 정부는 주곡자급을 위한 노력을 더욱 경주하였다.

정부는 주곡자급을 국정의 주요과제로 삼아 범정부 차원에서 식랑증산을 추진하였고, 중앙과 지방의 전 행정력을 동원하여 치밀한 증산계획과 집행으로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74년에는 쌀 3,000만석 시대를 열었고, 1977년에는 4,000만 석을 돌파하여 주곡의 자급을 달성하였으며, 광복 이후 30년 가까이 지속되던 외국산 쌀의 도입을 중단함으로써 민족의 숙원을 이루었다.

1970년대 들어 주곡의 자급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1973년과 1974년의 풍작의 결과였다. 기상의 도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새로 개발된 통일품종의 특성에 알맞은 재배기술을 개발․실천하고, 주도면밀한 증산시책을 정부의 강한 의지로 추진한 것에 힘입은 바 컸다. 1970년대에는 신품종 육성과 기술개발에서 많은 성과가 있었고 쌀 다수확 시상제 등 농민의 증산의욕을 북돋우는 시책들이 펼쳐졌다. 또한 유휴지에 대한 식량작물재배조치의 발동, 적기적작업(適期適作業)을 위한 시한영농의 강력 추진, 국가지도자의 깊은 관심에 따른 지역별 생산책임제 시행 등 행정 역량이 집중되었다. 특히 1970년대에는 영농 준비기부터 수확까지 주요 단계별로 작전을 수행하듯 증산대책을 추진하였으며, 효과적인 대책 추진을 위해 농림부 등 계통기관에는 식량증산상황실을, 청와대에는 식량증산기획실을 설치ㆍ운영하였다.

적기적작업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보다 조직적인 독려방식으로 나타난 것이 1970년대의 시한 영농이었다. 이는 주요 농작업의 시한을 미리 정해놓고 신상필벌제를 도입한 것이다. 작물별ㆍ농작업별 이행시한 지정, 농촌일손돕기운동의 전개, 모내기나 벼베기 행사, 신품종의 보급 책임면적 시달, 상황실 운영과 비상근무제 실시, 논밭에 직접 깃발을 꽂는 방식의 지도, 독려친서, 인쇄물이나 보도매체를 통한 홍보활동 등을 통하여 시한영농시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 시한영농의 성격을 잘 나타낸 것으로 ‘○○○작전’을 들 수 있다. 즉, 모내기, 풀베기, 양수작업을 추진함에 있어 모내기작전, 풀베기작전, 물대기작전 등의 이름으로 사업을 추진하였다. 시한영농은 1973년의 벼농사 150일 작전과 1974년의 쌀 3000만 석 돌파작전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이렇듯 1970년대는 식량증산시책을 전투하듯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벼농사에서 5,6월과 9,10월의 기상, 특히 기온은 그 해의 작황을 좌우하는 중요한 기상요소였다. 저온에 대한 저항력이 약한 통일품종이 등장하면서 이 문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였다. 농작업에 시한을 설정하여 추진한 것은 1973년 증산시책에서 역점을 두었던 모내기 2주일 앞당기기에서 비롯되었다. 통일품종 재배에서 보온못자리는 필수적인 핵심재배기술이 되었고, 보온못자리 피복재료인 폴리에틸렌필름의 양산으로 종래의 모내기 시기를 약 2주일 앞당기는 시책은 안전다수확을 올리는데 긴요한 과제였다. 모내기 진도가 50%, 70%에 도달한 시기가 1960년대에는 각각 6월 20일과 6월 30일이었던 것이 1980년대에는 각각 5월 28일, 6월 3일로 약 1개월이나 앞당겨졌는데, 그 결과 4, 5월 못자리 저온장해와 9, 10월 수확기의 감수피해 위험에서 벗어났다.

정부의 강력한 양곡 증산정책에 힘입어 양곡 총생산량은 1971년의 678만톤에서 1976년에는 818만톤으로 증가하였다. 특히 쌀 생산량은 같은 기간에 400만톤에서 526만톤으로 30.4%나 증가하였으며, 맥류 생산량 또한 172만톤에서 185만톤으로 늘어났다. 이에 반해 식량용 곡물 수요는 정부의 양곡 소비절약 시책에 의해 1인당 양곡 소비량이 1971년의 224.3kg에서 1976년에는 203.5kg으로 감소하였다. 그 결과 인구가 증가하였음에도 쌀의 자급률이 82.5%에서 100.5%로 높아지고, 보리의 자급률 또한 91.8%에서 97.9%로 높아짐으로써 주곡 자급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1978년부터는 주곡 자급의 일등공신인 통일벼에 새로운 도열병이 생기는 등의 이유로 3년간 흉작을 기록하였고, 특히 1980년의 냉해로 쌀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외국쌀을 대량 수입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이후 통일벼 재배면적도 크게 줄어들었다.

농업증산 5개년계획(1972~1976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기간 동안 양곡 증산에 힘입어 식량자급률은 1971년의 69.4%에서 1976년의 74.9%로 높아졌지만, 양곡 수입량은 1971년의 267만 톤에서 1976년의 303만 톤으로 오히려 늘어났다. 더욱이 전체 양곡의 자급률은 1970년의 80.5%에서 1972년 70.8%, 1976년 74.1%로 계속 낮아졌으며 이후에도 매년 낮아졌다.

그 이유는 이 시기의 양곡증산 정책이 주로 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밀·옥수수·콩 등 다른 식량작물의 생산기반은 오히려 약화되어 1977년 이후 쌀을 제외한 식량작물의 식부면적과 생산량이 감소한 반면, 국민소득의 증가와 식생활의 고급화에 따라 가공용 및 사료용 양곡의 수요는 급속히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식장려 등 쌀 소비절약 시책이 밀의 소비증대를 비롯해 식생활을 서구화함으로써 외국산 양곡을 만성적으로 수입하게 된 것도 주요 원인 중의 하나이다.

  • 70년대 농정의 기본방향(1970),EA0023213(1)

    70년대 농정의 기본방향
    (1970),EA0023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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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량증산기획실 설치(1973),EA0005547(1)

    식량증산기획실
    설치(1973),
    EA0005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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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국새마을증산대회 개최 계획 보고(1974), EA0005592(1)

    전국새마을증산대회 개최
    계획 보고(1974),
    EA0005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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