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내용 바로가기

하단정보 바로가기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다

분단과 냉전은 1950년 6·25전쟁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전쟁은 우리민족에게 수많은 아픔과 고난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역경을 딛고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다지는데 전력하였다.
이 시기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또 하나의 과정이었다.
원고
악몽과도 같은 6.25 전쟁. 동족상잔의 비극. 남부여대하고 피난을 가야했습니다.
겨울에는 대중가요에서 금순이도 울며 헤어진 흥남철수. 한반도 1.4후퇴가 있었고 서울은 또 한 번 유린당했습니다.
3년에 걸친 전쟁과 피난살이. 육체파 배우 마릴린 먼로가 주한미군을 응원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주요 간선도로에 전차가 달리던 서울. 그때의 인구는 고작 170만 명 정도였습니다. 드럼통에 철판을 오려 입혔을망정, 우리 손으로 버스도 만들어서 타고 다녔고, 6.25직후부터 관광버스가 등장했는데 그 당시는 명물이었습니다. 국산 시발택시가 등장한 것이 1957년 무렵이었습니다. 여기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이곳에는 17만의 포로들이 수용돼있었는데 이 가운데 반이 넘는 3만 명이 포로 송환되기를 거부한 반공포로들이었다.
유엔군 측은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포로들에게 그림그리기, 조각 등 특기를 살리게 했다. 뿐만 아니라 재봉일, 인쇄작업, (안들림) 등 기술교육까지 시켜주었다. 그런데도 공산포로들은 곡괭이와 스탈린 초상화 등을 들고 다니며 시위를 벌이는 등 소란을 피웠다.
목총을 만들어 수용소 내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동료들을 고문, 암살, 학살하는 만행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더욱이 폭동사건을 유발해서 수용소 소장을 납치하는가 하면 칼, 곡괭이 등으로 무장해서 반공포로의 막사를 습격해 수용소를 온통 피바다로 바꿔놓기도 했다.
유엔군 측의 인도적 대우를 역으로 이용한 악랄한 공산포로의 행위였다. 휴전이 임박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새벽을 기해 반공애국포로 2만 7천명을 석방시켰다. 1차로 합의된 공산포로 교환 작전에 따라 부상병 교환이 이루어졌다. 1953년 7월 27일, 해리슨 유엔 측 대표와 공산 측 남일 대표 간에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2년간이나 끌다가 매듭지어진 것이다. 한국 측 대표는 협정서에 서명하지 않고 퇴정해버렸다. 휴전은 전쟁 종식을 선거법으로 한 미국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6개월 만에, 소련의 스탈린이 죽은 지 5개월 만에 미국, 소련 양측이 이해관계가 일치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인의 의사는 아랑곳없이 이루어졌다. 여기서도 우리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볼 수가 있다. 포로교환. 대전 전투에서 잡힌 딘 소장도 돌아왔다. 종공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반공 중공군포로도 자유를 찾았다.
우리 국민은 이들을 거국적으로 환영했다. 155마일 휴전선이 그어진 채 전쟁은 끝이 났다. 아니, 한국 측은 정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은 채 전투상태만 멎은 것뿐이다. 동란 3년 1개월의 역사는 과연 무엇인가. 산더미 같은 포탄 껍데기는 그 전투의 치열했음을 잘 말해준다. 38선을 6번씩이나 오르락내리락했으며, 포탄이 한국 산천을 작렬하면서 빗자루로 쓸어내리듯 모든 것을 앗아갔다. 이런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도 소득 없이 싸움은 끝이 났다. 그 와중에서 한국민은 20명중 한명이 죽거나 부상했다. 폐허를 더듬는 여인들. 이런 전쟁미망인만도 20만 명이 넘었다. 일시에 부모를 잃은 고아는 10만 명이 넘었다.
건물 피해는 61만동에 이르고, 사망하고, 학살당하고, 부상당하고, 납치됐으며, 행방불명된 민간인 수는 전부 100만 명이 된다. 국군손실은 전사, 부상, 실종된 사람을 합쳐 57만 명, 유엔군 손실은 17만 명에 이르렀다.
어쩌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이렇게 길거리를 지내며 거지가 됐다. 이들은 살았으면 지금쯤 40대의 장년이 됐을 것이다. 이렇게 전쟁의 흔적은 한없는 슬픔과 깊은 상처를 남겨놓았다. 도움의 손길을 찾는 길거리의 고아들. 누가 이러한 민족의 비극을 저질렀는가.
이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보자. 2차 대전 후 단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생겼다는 철책선. 소련의 팽창주의의 일환으로 탱크를 앞세우고 꼭두각시 김일성을 시켜 이들의 가슴에 총칼을 꽂게 했던 6.25. 이것은 결국 힘없는 약소국가가, 그 민족이 겪어야만 했던 역사의 비애가 아닐 수 없다.
철없는 아이들은 그저 열심히 기도했다. 아니, 30년 전 그때 우리가 기도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지금 우리가 기도한다면 무엇을 기도해야하는가. 6.25는 힘없는 자유는 결국 침략과 악재를 스스로 불러들인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 아닐까. 모든 국민이 구호양곡 아니면 끼니를 잇지 못했던 전후의 우리 사회상이었다.
휴전 조인 후 제네바에서 참전 16개국과 소련, 중공, 북괴대표가 모여 고위정책회담을 열었을 때, 북괴는 외국군 철수와 남북연방제를 들고 나왔다. 이 내용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북괴가 똑같이 주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남한에 힘의 진공상태를 만들고 사회를 교란시켜 무력으로 또 한 번 남침을 하겠다는 수작이다. 또 한 번 동족인 우리의 가슴에 총을 쏘겠다는 뜻이다. 자식교육에는 유난히 열심이었던 우리의 부모들. 교실은 없어도 땅바닥 위에서나마 이렇게 가르쳤다.
미국 원조 없이는 길바닥 보수, 교량공사 하나 제대로 못했던 50년대의 우리 국력이었다. 이 50년대의 나라 형편과 60년대, 70년대 우리가 피땀 흘려 이룩한 번영의 결실을 비교해보자. 그리고 80년대의 길목에서 국내외로 다시금 밀려오는 오늘의 시련을 견디고 넘어서는 민족의 예기는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6.25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155마일 휴전선이 남아있는 한, 그 휴전선 너머에 번득이는 총구가 아직도 우리를 노리고 있는 한, 우리의 허점을 보일 수는 없다. 진정 내가 나라를 위한 길이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할 때다. 1960년 3.15 정, 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가 세상을 떠났다.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의 급서로 이승만 후보의 당선은 확정됐으나 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기 위해 자유당은 완장부대까지 동원하는가 하면 4할 사전투표, 4할 공개투표라는 불법선거를 자행했다. 국민들은 부정을 그대로 받아넘기지는 않았다.
대구와 마산데모에 이어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의 데모를 고비로 4월 19일에는 전국 각 도시에서 학생데모가 일어났고 시민들이 이에 호응했다. 비로소 민중의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었던 이 대통령은 병원을 찾아 부상 학생들을 위문하며 눈물지었다. 1960년 4월 26일,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결심했다.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10년 가까이 이승만 박사의 측근에 있던 이기붕 일가는 자결로 모든 것을 청산했다.
서울은 폭풍우가 지난 뒤처럼 어수선하기만 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허정 외무부장관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발족했다. 이해 6월 19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내한했다. 무질서한 거리의 환영에 이들은 땀을 빼기도 했다. 1960년 8월, 정낙현 북괴 공군 소위가 미그기를 몰고 월남 귀순해왔다.
7월 29일 민, 참의원 총선거에 이어 8월에 양원 합동회의에서 4대 대통령에 윤보선 씨를 선출했으며, 장면 씨를 국무총리로 하는 내각책임제의 새 정부가 탄생했다. 그러나 그 당시 장면내각은 신, 구파의 대립으로 국사를 돌볼 겨를이 없었고, 연이은 데모로 극도의 혼란을 빚어냈다.
당시 민의원 의장이었던 곽상훈 씨는 그 때를 돌이켜 “그 때 형편과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민주주의 완성이 됐다고 볼 수 있어요. 그때는 지금과 같이 자유로운 때가 있었나요. 지금만큼 자유로운 때는 없었어요.” 혁명재판에 불만을 품은 4.19 학생들은 의사당을 점거하기까지 했다.
그런가하면 신앙촌 박태선 장로, 교도 천여 명이 동아일보사에 난입하여 파괴와 폭행을 자행한 사건이 터지는 등, 무기력 속에 빠진 나라의 형편은 어지럽기만 했다. 이런 혼란으로 공장은 문을 닫고, 실업자가 쏟아져 나와 민생고는 극심해갔다. 전국 어디서나 데모가 그칠 날이 없었고, 하루에 천 건이 넘는 날도 있었다. 심지어는 데모를 하지말자는 데모까지 있었으니 실로 국력의 낭비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해 11월 학생들은 남북학생회담 개최까지 들고 나왔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이라고 외치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서명 기록물썸네일
휴전협정 기록물썸네일
기록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