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맹 지나조사원 관계서류(1)(문서왕복조회관계)
이 기록물철은 1932년 조선총독부 총독관방 외사과에서 만주사변에 대한 국제연맹 조사위원회의 현지조사 활동과 관련된 문서를 편철한 것이다. 이 문서는 주로 조사위원들의 일정과 이에 대한 일본측의 준비 및 관련기관인 척무차관(拓務次官), 국제연맹지나조사위원준비위원회,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동회사의 도쿄지사, 상하이사무소장, 재훵티앤(奉天) 일본영사관, 재창춘(長春) 일본영사관 등에서 보고한 것들이다. 이 기록물철은 만주사변을 도발했던 일본이 국제연맹의 조사에 얼마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1929년 세계경제 공황의 여파로 궁지에 몰린 일제는 이를 극복하려고 대륙침략을 본격화하였다. 1931년 9월 류티아오꺼우사건(柳條溝事件)을 구실로 만주를 공격, 점령한 일본은 이듬해 3월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1920년대 후반 장쭤린(張作林)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이 동삼성(東三省) 총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한후 조직적인 배일정책을 추진하여 일제의 대륙침략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일제는 만주의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여 일으킨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을 계기로 군대를 파견하여 무력도발의 유리한 정세를 만든 뒤 류티아오꺼우 사건을 계기로 전면적인 공격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에 국민당정부는 만주사변 직후인 9월 21일 국제연맹에 제소하여 일본군의 만주철병을 요구하였고, 1931년 12월 10일 국제연맹 이사회에서 리튼(Victor Alexender Greorge Lytton)을 위원장으로 한 국제연맹지나조사위원회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사위원회는 1932년 2월 3일 유럽을 출발, 미국을 경유해서 29일 요코하마(橫浜)에 도착, 일본정부 수뇌들과 회견한 후, 3월 11일 중국에 가서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베이징(北京), 만주 등지를 현지 조사하였다. 이 문서는 조사위원단의 도착을 앞두고 일본에서 준비를 하기 위해서 일본, 중국, 조선, 만주를 왕래한 서류, 그리고 조사위원이 만주를 시찰한 후에 조선을 경유해서 일본에 다시 갈 때까지 관련 기관 사이에 왕래한 문서들을 포함하고 있다. 전반은 주로 조사위원단의 약력과 일본·중국·만주에서의 일정, 이에 대한 준비에 관한 문서이고, 후반은 거의 대부분이 조사위원들의 조선 일정에 관한 문서이다. 국제연맹지나조사위원단은 10월 1일 중일 양국 및 국제연맹에 대해『국제연맹일화분쟁조사위원회보고(國際連盟日華紛爭調査委員會報告:The Report of the Commission of Enquiry of the League of Nations into the Sino–Japanese Dispute)』를 제출하였다. 연맹총회는 이것을 바탕으로 ‘만주에 대한 중국의 국권 확인 ’, ‘일본군의 철병 권고’ 를 가결하였다. 일본은 이에 항의하여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이 기록물철은 같은 성격의 문서인 ≪국련지나조사위원관계서류(1)≫(CJA0002324), ≪국련지나조사위원관계서류(2)≫(CJA0002325), ≪국련지나조사위원관관계서류(3)≫(CJA0002326)과 함께 만주사변을 도발한 일본이 국제연맹지나조사위원의 조사 과정에서 이를 왜곡, 호도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연구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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