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연 지나조사위원 관계서류4(진정회견록관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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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물철은 만주사변에 관한 국제연맹조사위원회의 현지조사 활동을 정리한 서류들 중 일부이다. 1932년 4, 5월 경 만주 각지의 중국인·조선인·몽고인·러시아인들이 국제연맹조사위원들에게 제출한 진정서 및 성명서들과 연맹조사위원들이 만주지역의 각종 단체 및 지역 대표자들과 만나 조사한 내용 및 회견 정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는 극비문서로서 관동군참모부(關東軍參謀部)에서 보고한 것들이다.
이 기록물철들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도발, 만주를 점령하고 이듬해 3월 괴뢰 만주국을 세운 일본의 대륙침략 정책과 이 사건을 왜곡, 호도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1929년 세계공황의 여파로 궁지에 몰린 일제는 그 돌파구를 찾으려고 대륙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중국 대륙진출과‘만몽(滿蒙)의 특수권익’옹호를 위해 군사적 도발의 기회를 엿보던 일제는 1931년 6월 ‘완빠오싼(萬寶山)사건’ 을 조작하고 이어 그해 9월 류티아오꺼우(柳條溝)사건을 구실로 만주를 침략하였다. 1928년 12월 장쭤린(張作霖)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이 동삼성(東三省) 총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조직적인 배일정책을 추진, 중국민족주의가 고양되었다.
이것은 경제공황을 극복하려고 대륙침략을 획책하고 있던 일본에게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일본은 1931년 6월 재만조선인과 중국인의 갈등을 조장하여 이른바 양민족의 충돌 사건인 ‘완빠오싼사건’ 을 일으키고 이를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 무력도발의 유리한 정세를 만들었다. 이어 9월 18일 남만주 철도노선의 폭파사건인 류티아오꺼우사건을 계기로 만주를 공격, 점령하였고 이듬해 3월에는 만주 괴뢰국을 수립하였다. 한편 장쩨스(蔣介石)의 국민당정부는 만주사변 직후인 9월 21일 국제연맹에 제소하여 일본군의 만철부속지 철병을 주장하였고, 국제연맹 이사회는 1931년 12월 10일 만주사변에 대한 조사를 위한 국제연맹지나조사위원회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문서는 이곳에 파견된 지나조사위원의 현지조사 내용을 관동군참모부에서 극비문서로 보고한 것으로 만주사변을 왜곡하여 일본의 대륙침략 정책을 은폐하려는 의도를 추적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1931년 12월 10일 국제연맹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리튼(Greorge Lytton)을 위원장으로 하고 영국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네덜란드인 등으로 구성된 국제연맹지나조사위원회는 1932년 3월 초 도쿄에서 일본정부 수뇌들과 회견한 후, 중국으로 가서 상하이, 난징(南京), 베이징, 만주 등지에서 현지 조사를 수행하였다. 조사의 초점은 주로 만주국 수립 이전의 만주상황, 중국 군벌들의 전횡, 만주국 수립에 대한 현지주민들의 반응 등에 맞추어져 있었으며, 그와 관련된 내용이 이 문서에 자세히 실려 있다.
기록물은 만주인 및 각 단체의 대표들, 그리고 각지역에 산재한 재만일본인, 조선인, 몽고인,백계(白系) 러시아인 등의 주민 대표 및 단체 대표들이 제출한 진정서와 이들이 조사위원과 회견한 내용, 그리고 조사위원과 기자단과의 회견 내용 등을 포함하고 있다. 문서의 전반부에는 주로 만주인 주민대표 및 단체들에 관한 문서가, 후반부에는 재만 소수 민족인 일본인, 조선인, 몽고인, 백계 러시아인에 관한 문서가 수록되어 있다. 일본측은 만주 현지주민들이 조사위원에게 진정할 사항과 그 내용 등을 미리 조정하여 일본측에 불리한 내용이 나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놓았다.
이 기록물철은 같은 성격의 문서인 ≪국련지나조사위원관계서류(1)≫(CJA0002324), ≪국련지나조사위원관계서류(2)≫(CJA0002325), ≪국련지나조사위원관관계서류(3)≫(CJA0002326)과 함께 만주사변을 도발한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정책은 물론,국제연맹의 조사 과정에서 이를 왜곡, 호도하려는 일본측의 의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연구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