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난어선철(2)
이 기록물철은 1937년 한 해 동안 조선총독부 총무부 외사국에서 취급한 정어리 어선의 조난(遭難)과 관련된 문서들을 편철한 것이다. 온유비( 油肥) 제조업자조합의 탄원서, 행방불명 어선에 대한 조사신청서 등이 대부분이다. 모든 기록물철에 언급되어 있는 정어리는 1923년부터 큰 떼를 지어 오기 시작하여 우리나라 어업에 큰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고등어나 청어잡이가 주종을 이루던 수산업계에 때아닌 흥분과 장비 근대화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정어리는 관북 일대의 어장에 갑자기 많이 등장하여, 당시 정어리 건착망(巾着網) 어업 허가서만 갖고 있으면, 벼 3,000섬을 추수하는 부자와 맞먹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유사 이래의 호경기를 이룬 정어리 어업과 정어리 공업은 거의가 일인들의 독점 사업이었다. 더구나 정어리 기름은 군수품으로 사용되는 등 용도가 다양했으므로 일제는 정어리를 닥치는 대로 잡았다. 이렇듯 정어리 잡이는 1923년부터 엄청난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1941년까지 호경기가 지속된다. 이 문서가 작성된 시기인 1937년은 바로 이 정어리 잡이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 어획고는 단일어장, 단일종목으로 세계기록을 깨뜨릴 정도였다.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1937년의 정어리 어획고는 1,388,215톤이었다. 동해안 일대의 항구마다 어유(魚油) 저장 탱크가 세워지고 청진 일대는 이른바‘정어리 공장’들이 마구 들어섰다. 어촌에도 착유기(窄油機)가 설치되었는가 하면, 항구에는 이 때 벌써 콘베이어(conveyor)가 설치되어 부두에 정박한 배에서 100m 안팎의 위치에 있는 공장의 기름 가마로 직접 정어리를 수송했다. 부두에는 머리 위로 이런 콘베이어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정어리 기름은 선박용 연료·화장품·도료유(塗料油)·제혁유(製革油)·중합유(重合油)·화약 등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기름을 짜고 난 찌꺼기(어박: 魚粕)는 사료 또는 비료로 쓰인다. 이렇게 용도가 많고 군수 산업에 크게 기여하는 정어리였으므로 청진에는 우수한 시설을 갖춘 근대식 공장들이 즐비하였다. 그리고 그 제조 공장은 세계 제1의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 기록물철에는 주로 어업 중 조난당한 정어리 어선의 출어상황, 어떻게 조난되었을 지에 관한 추측, 조난당한 어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실려 있다. 요컨대, 1930년대부터 소련과의 접경 지대에서는 육지와 해상의 국경선 침범에 관한 분쟁뿐 아니라 어선의 나포 등 특수한 사고가 빈발하고 있었다. 이 문서는 당시 소련과 일본 사이에서 증가하기 시작한 어선 나포와 관련된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 문서는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 뿐만 아니라 당시의 어업 상황, 어선에 관련한 자세한 내용(선주(船主), 선명(船名), 승조원 이름, 연령, 기관의 마력과 함께 출어일시 등)과 어업의 규모 등 어업과 관련된 다양한 사실을 알려 준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대륙침략을 위해 조선에서 실시한 갖가지 수탈 행정 가운데 수자원 수탈에 관한 단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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