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 3년도 교육보조
이 기록물철은 총독부 학무국(學務局) 학무과(學務課)가 1928년도에 처리한 교육보조에 관련된 기록물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 기록물철의 주된 서류는 이관(移管) 중등학교 건축비 보조와 관련된 것이며 이외에 봉장고(奉藏庫)와 어진영봉안소(御眞影奉安所) 건축에 관한 건도 수록되어 있다. 이 기록물철의 서류들은 학교에 소요되는 건축비에 대한 학무국의 보조와 관련된 상세한 내역을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이 서류들을 통해 볼 때 건축비 보조를 위해서는 각 학교에서 학무국 앞으로 학교 건축비 보조 신청서와 공사사양서, 공사내역서, 공사내역 명세서, 설비 명세서, 공사 설계도, 공사설계서, 배치도, 견적서 등을 필수적으로 제출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9년도에 학교공사 건축비에 대한 보조를 신청하거나 지원받은 학교들은 경기, 충남, 전남, 평북, 함북도합 5도의 여러 학교를 비롯하여 십여개 군데가 된다. 대표적인 학교로는 청주공립 고등보통학교(淸州公立高等普通學校), 이리공립농림학교(裡里公立農林學校), 부산공립중학교(釜山公立中學校)와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東萊公立高等普通學校),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春川公立高等普通學校) 등이다. 이 기록물철에 수록된 서류들은 공통적으로 건축 보조와 관련된 제반 구비 서류들이다. 기록물철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공사사양서, 공사내역서, 공사내역 명세서, 설비 명세서, 공사 설계도, 공사설계서, 배치도, 견적서 등이다. 이 기록물철에 수록된 문서들은 당시 중등학교 보급과 관련된 제반 현황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1922년의 2차 조선교육개정령에 의해 일제의 중등교육정책은 그 규모에서 보다 확대되었다. 중등학교 보급 현황을 보면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록물철에도 드러나듯이 1928년 시점에서 중등학교 보급은 지역적으로나 규모면에서나 1910년대 보다는 양적으로 팽창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중등보통교육의 보급은 1919년도에는 관립(官立)으로 고등보통학교가 5개교, 여자고등보통학교가 2개교였고 사립(私立)으로 고등보통학교가 7개교, 여자고등보통학교가 4개교로 중등보통교육기관은 관·사립 합하여 모두 18개교에 학급 수는 모두 95학급, 생도 수는 모두 2,617명이었다. 이것은 1919년도 한국내의 일본인 중등교육기관 16개교에 학급 수 96학급, 생도 수 3,668명에 비하면 형편없는 상황인 것이다. 또한 한국인 중등학교는 사립이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인 중등학교는 전부가 관립 또는 공립이었다. 이는 일본의 식민지 교육정책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등보통교육의 상황은 1921년에 이르면 양적으로는 많은 성장을 보인다. 1921년에는 1919년에 비하여 중등보통교육기관이 6개교가 증가되고, 학급 수는 54학급이 증가되었다. 1921년에는 고등보통학교가 학급 수는 모두 51학급에 학생수는 모두 1,953명이었다.그리고 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는 학급 수 12학급에 학생수는 모두 378명이 되었다. 그리고 사립고등보통학교로는 고등보통학교가 10개교, 학급 수는 모두 70학급에 학생수는 모두 2,975명이었다. 또 사립여자고등보통학교로는 5개의 여자고등보통학교가 있어 학급 수는 모두 16학급에 학생수는 모두 561명이었다. 그리하여 1921년의 중등보통교육기관 은 모두 24개교에 149학급이었고 학생수는 5,867명이었다. 이 기록물철에 수록된 자료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22년 이후 중등학교는 양적으로 이전에 비해 증가하였지만 한국 내의 일본인 학교에 비해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 기록물철에 수록된 문서들의 자료적 가치는 일차적으로 당시 중등학교의 규모와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자세한 도면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이 기록물철에 수록된 문서들은 당시 중등학교 보급과 관련된 제반 현황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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