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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말기는 내선일체화, 일본식 성명 강요, 한민족의 황국신민화라는 명분 아래 한민족의 전통, 풍습, 언어 등을 말살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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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농업이민관계철(사회과)

기록물 이미지를 준비 중입니다.

분류
: 노무
생산년도
: 소화14년 ~ 소화14년(1939년 ~ 1939년)
생산부서
: 내무국 사회과
관리번호
: CJA0016562
문서번호
: 2
M/F번호
: 88-831
총쪽수
: 0면
배경지식
: 조선인의 남양농업 이민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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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물철은 조선총독부와 남양청이 주관하고 풍남산업주식회사(豊南産業株式會社)와 남양흥발주식회사(南洋興發株式會社)가 수행한 남양군도(현미크로네시아)행 농업 이민 관련 기록물들이다. ‘남양농업이민’은 1938년 8월부터 1940년 2월까지 총 13회에 걸쳐 수행되었고, 1,266명(285호)의 조선인이 농업이민을 떠났다. 이 가운데 총 2회는 풍남산업주식회사가, 총 11회는 남양흥발주식회사가 수행했다. 이 기록물철에는 1939년 6월 6일부터 1940년 2월 23일까지 수행된 총 3회(304명)에 걸친 농업이민관련 기록물이 편철되어 있다. 1939년 6월 6일자 ~ 9월 11일자(총 55건), 1939년 9월13일자 ~ 11월 1일자(총 24건, 이상 풍남산업주식회사수행)와 1940년 2월 14일자 ~ 1940년 2월 23일자 4건(총 4건, 남양흥발주식회사 수행) 등 총 3회에 대한 기록물이다. 이 기록물철에는 이민업무를 주관하는 총괄부서인 내무국 사회과와 남양청 내무부와 실제적인 수행기관인 도의 내무부 사회과 및 기업(풍남산업주식회사), 선정업무를 실제 수행하는 기관인 면이 각각 주고받은 왕복문서(기안문·시행문·전보철·서신 순)가 역순으로 편철되어 있다. 그러나 시기별 역순 편철이 아니라 기안문, 시행문, 전보철 및 서신순으로 각각 역순 편철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편철 질서를 통해서는 ‘남양농업이민’의 추진과정과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와 관련된 내용은《남양행농업이민관계(南洋行農業移民關係)》(CJA0016566)에 수록된 ‘조선인농업이민에 대한 계획’에 관한 기록물(1939년 6월 9일자 남양청 내무부장이 작성하여 조선총독부 내무국장 앞으로 보낸 기록물 <노무자모집에 관한 건(勞務者募集에 關한 件)>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풍남산업주식회사가 수행한 총 2회에 걸친 이민사업내용의 후미에 남양흥발주식회사의 11번째 이민사업 수행내용을 첨부함으로써 편철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록물철과《남양행농업이민관계(南洋行農業移民關係)》를 상호 비교해야만 ‘남양농업이민’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록물철에 편철되어 있는 기록물 가운데 기안문과 시행문의 대부분은 <남양농업이민알선방에 관한 건(南洋農業移民斡旋方ニ關スル件)>이라는 명칭이어서 건명만으로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 기록물철을 통해 확인한 ‘남양농업이민’업무의 진행과정과 부서별 업무상황은 다음과 같다. ‘남양농업이민은 세단계로 업무가 수행되었다. 제1단계 : 계획 입안 및 요청(계획입안 → 사업주의 요청 → 남양청 접수 → 조선총독부에 요청 → 조선총독부 접수) 제2 단계 : 모집 (도(道)에 하달 → 해당 도 내무부, 희망자 선정 및 신원조사 → 해당 도지사, 조선총독부 내무국에 상신 → 조선총독부 접수 → 남양청 내무부에 전달 → 남양청 내무부 접수) 제3 단계 : 수송업무(해당 도, 수송업무 완료 → 기업 인수) 전체 기록물 내용에 따르면, 이주자의 대상은 농업에 종사하고 개간경작에 경험이 있는 자로써 가족과 같이 떠날 수 있으며 영주(永住)의 의지가 있는 농민이다. 연령은 20세에서 40세까지이며, 가족 중에 가동(稼動)능력자가 많은 농민이 우선 선발대상이 된다. 이주자들은 여름용 의류를 반드시 지참해야 하고, 가재도구와 취사도구는 물론이고 낫과 호미 등 농기구를 가능한 많이 가져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외 고추와 마늘 등 향신료의 휴대도 명기하였다. 이러한 조건에 응하여 선발된 조선인들은 무학자가 대부분이며, 자산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남양군도로 집단이민을 떠나는 경우에는 전대금(前貸金)으로 1호당 20원씩 지급되었는데, 최대 640원까지 전대할 수 있었다. 또한 전보문을 통해 수송경로 및 교통편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남양군도는 태평양 지역의 여러 섬 가운데 일부였으므로 조선인들의 수송은 배에 의지해야 했다. 이들은 먼저 출신지 가까운 철도역에서 기차로 부산까지 수송되었다. 각 군별로 대표자가 있어서 10명을 한 조로 하여 각기 자기 군 출신 이민자들을 인솔하고, 다시 도의 직원이 이들 전체 인원을 인솔하는 방식이었다. 부산에서 1박을 한 후 관부연락선을 이용해 부산을 떠나 일본 모지(門司)에 도착한 후 다시 배를 바꾸어 타고 팔라우나 포나페 등 최종 목적지로 떠났는데 총 수송기간은 1개월을 상회했다. 부산까지는 도(道)의 직원이 인솔했으나, 부산에서는 회사관계자가 인수하여 인솔했다. 인솔자는 출발시에 이주자연명부(移住者連名簿)를 15부 작성하여 휴대하였고, 이민자는 각각 호적등본과 신원증명서 1통을 휴대하였다. 도의 직원은 이들의 수송계획을 세워 조선총독부에 승차역별 인원을 보고하였고, 조선총독부 철도국과 부산·시모노세키(下關)·모지(門司)수상경찰서장에게 미리 도항일정과 이주자연명부를 송부하였다. 이 기록물철은 1939년부터 1940년에 걸쳐 조선총독부와 남양청이 주관하고 남양흥발주식회사와 풍남산업주식회사가 수행한 남양군도(미크로네시아)행 농업이민관련 기록물철이다. 자료가 부족해 농업이주정책에 대한 연구가 부진하였는데, 이 기록물철의 내용을 통해 ‘남양농업이민’에 대한 실체의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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