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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독립활동

주요독립활동

1919년 3월 1일부터 4월 말까지 지속된 우리 항일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독립만세 시위운동.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 등 여러 줄기의 국권 회복운동과 독립운동은 3.1운동에서 하나로 합류한 후 다시 다양한 독립운동으로 전개되는 밑거름이었다. 이는 전 세계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불굴의 민족정신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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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육군 대장을 조선 총독으로 임명하는 등 폭압적인 식민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1914년에는 지방행정구역의 전면적인 개편을 통하여 전통적인 향촌 공동체를 해체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은 소작인을 양산하는 가운데 일인들 이주를 증가시켰다. 결사와 집회, 언론과 출판 자유 등은 탄압받는 속에서 식민지 노예교육이 시행되었다. 심지어 생활의 세세한 부분도 규제, 단속하는 등 폭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쌀값은 1918년 8월부터 급등하여 3,1운동 직전에는 약 3배인 40원대를 돌파하였다. 특히 광무황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3,1운동이 폭발할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3,1운동의 대중화로 현실화되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終戰)에 즈음한 군국주의적 전제국가의 붕괴, 볼세비키혁명,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의 제창, 피압박민족의 독립운동 열기 고조 등은 새로운 국면으로 등장하였다.

[민족대표 독립선언과 3.1운동 발발]

1919년 1월 20일경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첫째, 독립운동을 대중화하여야 할 것, 둘째, 독립운동을 일원화하여야 할 것, 셋째, 독립운동의 방법을 비폭력으로 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2월 상순부터 독립선언과 민족 대연합전선 형성을 위해 다른 종교지도자와 접촉을 시작하였다. 천도교의 독립운동 준비는 기독교측과 학생단측이 합류하여 대연합전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불교계는 참여하였으며, 유림측과는 성사되지 못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서명 주체는 천도교측 손병희 등 15인, 기독교측 이승훈 등 16명, 불교계 한용운 등 2명으로 33인의 민족대표단을 구성하였다. 거사일자는 3월 3일 광무황제의 국장일을 이전인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2월 10일경 기초를 끝낸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지도층에 전달되어 검토된 후 보성사에서 미리 인쇄,배포되었다.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용운이 연설을 한 후 그의 선창으로 만세 삼창을 하였다. 한편 학생과 시민들은 이날 당초 계획된 장소였던 탑동공원에 모여 별도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학생과 시민들은 탑동공원에서 동,서로 나뉘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에 나섰다. 온 서울 장안은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조선독립신문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지하신문과 격문들이 시가에 배포되었다. 3월 5일 서울역 앞에서는 1만여 명의 학생 시민이 모여 제2차 대규모 시위운동을 벌였다. 3월 중순 이후 시위운동은 서울과 도시에서 지방 읍면지역으로 확산과 더불어 더욱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확산과 전개]

서울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시작된 3월 1일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 4개 도 7개 도시에서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미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조직화되었기 때문이었다. 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회 이상 시위가 일어났으며, 시위운동의 정점을 이룬 4월 1일은 하루동안 67회의 시위가 일어났다. 3월 27일과 4월 2,3일은 50회 이상 일어났으며, 적어도 30회 이상 일어난 날만 15일이었다.

시위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시가지 대로상의 만세시위, 시골 장터에서 행한 장터 만세시위, 야간 산상의 봉화시위, 한 장소에서의 1회성 만세시위, 같은 장소에서 몇 차례 거듭된 시위운동, 인근 지역을 찾아다니며 행한 만세꾼들의 시위운동, 지역과 지역이 릴레이로 이어 받으며 행한 릴레이 시위운동, 일제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사람의 시신을 떠메고 행한 상여시위, 상점 문을 걸어 잠근 상인들의 철시 시위, 학생들의 동맹 휴학시위, 노동자들의 파업, 광부들의 순사주재소 습격시위, 어린이 시위, 거지들의 시위, 기생들의 시위 등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전 계층이 다양한 형태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행한 총 시위 회수는 2,000회 이상, 연인원 200만 이상으로 추산되었다.

[국외 3.1운동]

간도지역에서는 3월 12일 지린성(吉林省) 류허시엔(柳河縣) 삼원보와 퉁화시엔(通化縣) 금구에서 독립축하회를 열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북간도에서는 3월 13일 용정 서전대야(西甸大野) 일본영사관 옆에 한인 1만여 명이 모여 독립축하식과 시가행진을 벌였다. 백초구, 훈춘, 봉천 등지도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연해주는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인국민회가 주도하여 시위운동에 돌입하였다. 우수리스크,라즈돌리노예,녹둔도 등지에서 시위운동이 이어졌다. 미국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안창호가 한인들에게 피흘릴 각오를 할 것이며, 미국의 여론을 일으켜 재정공급에 노력할 것을 촉구하였다. 서재필 등은 4월 14일부터 16일의 3일간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였다.

[의의]

3.1운동은 독립운동 역량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밑거름이자 독립정신의 기반이었다. 만주와 노령 연해주에서 조직된 40여 개 독립군 단체는 수시로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특히 3.1운동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3.1운동은 국제사회에 한국인의 자유와 독립에의 열망과 의지를 각인시켰다. 이는 중국 5.4운동, 인도와 이집트, 인도차이나, 필리핀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글: 김형목(독립기념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