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소개
김한종 [金漢鍾, 1883.1.14~1921.8.11]

○ 1906 홍주의진에 종군하여 항일활동
○ 1917~1918 대한광복회 충청지부장으로 친일 부호 처단 등 의열투쟁 전개
○ 1921 사형 순국 일우(一宇) 김한종(金漢鍾) 선생 (1883. 1. 14 ~1921. 7. 8)

우리 4천년 종사는 회진(灰塵)되고 우리 2천만 민족은 노예가 되었다.
섬오랑캐(島夷:일제)의 악정폭행(惡政暴行)은 일가월증(日加月增)하니 이것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끓어올라 조국을 회복하고자 하는 염(念)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이 본회가 성립된 소이(所以)이니, 각 동포는 그 지닌 바 능력을 다해 이것을 돕고, 앞으로 본회의 의기(義旗)가 동쪽에 오를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각 자산가는 예축(豫蓄)하여 본회의 요구에 응하여 출금하기 바란다. 만일 본회의 기밀을 누설하거나 그 요구에 불응할 때는 자체 정규(定規)가 있어 이에 따라 징계할 것이다.
- 선생이 주도한 대한광복회의 포고문 -

경술국치 이후 1910년대 독립운동은 한말 국권회복운동을 계승하고있었지만, 여러 면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우선 한말 국권회복운동의 양대 흐름이었던 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이 합류해 간 것이다. 두 운동 모두 국권회복을 지향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행동에 있어서 서로간의 의견차와 반목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개화 지식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계몽운동자들은 의병운동을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으로 인식하였고, 척사유림이 주류를 이루었던 의병운동자들은 계몽운동을 '친일 개화운동' 정도로 치부하였다. 비록 이러한 인식은 점차 해소되어 갔지만, 그 깊은 골은 좀처럼 메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경술국치에 따른 일제의 한국 강점이라는 상황 변화는 민족독립의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로 부상시켰다. 이제 민족의 독립 없이는 '유교사회의 재건'도, '민족의 근대화'도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특히 1910년대 헌병경찰을 앞세운 일제의 가혹한 무단정치는 독립운동의 싹조차 도려내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일은 민족 독립의 역량을 모아 기르는 것이었고, 그러한 일에 계몽운동계열이니 의병운동계열이니 하는 분파가 따로 있을 수 없었다. 민족 독립이라는 공통 목표 아래, 두 계열의 인사들이 본격적으로 단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1910년대 독립운동 비밀결사였다. 때문에 비밀결사는 운동 주체는 물론 이념과 투쟁 방략의 측면에서도 의병적 성격과 계몽운동적 성격을 공유하고 있었다. 즉 운동 이념에서는 의병계열이 계몽운동계열의 혁명적 정치 이념, 즉 공화주의를 받아들였다. 반대로 투쟁 방식은 계몽운동계열이 의병운동의 혁명적 투쟁방식, 즉 무장투쟁을 수용한 것이다. 그같은 토대 위에서 1910년대 비밀결사는 독립운동전략으로 의병의 무장투쟁전략과 계몽운동의 실력양성전략을 조합한 독립전쟁준비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다.독립전쟁준비전략은 우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거기에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다가 적절한 시기가 오면 일제와 독립전쟁을 펼쳐 민족독립을 쟁취한다는 장기전략이었다. 1910년대 비밀결사로서 이러한 독립전쟁준비전략을 실행한 대표적 독립운동 단체가 대한광복회였다.

대한광복회는 조선국권회복단과 풍기광복단이 통합되어 결성된 단체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3년 1월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계몽운동 및 독립운동 지원 단체로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계몽운동계열 인사들과 의병계열 인사들이 함께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그리하여 계몽운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 국외 독립운동단체와의 정보 연락, 그리고 군자금 조달 등 독립군 지원활동을 펼쳐 갔다.

하지만 한말 의병장 허위의 제자인 박상진과 정운일·김재열 등 국권회복단의 의병계열 인사들은 이를 보다 강력한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 개편할 것을 구상하여 갔다. 그것은 1910년대 조선토지조사사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지주층이 민족성을 상실하여 갔기 때문이었다.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은 그간 토지에 발생하여 성장해 왔던 농민대중의 여러 권리를 부정하면서 지주위주로 시행되고 있었다. 때문에 지주층은 식민통치체제가 자신들의 경제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데 나쁘지만은 않다고 하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구래(舊來)의 봉건 지주층은 일제 식민통치체제의 사회 경제적 버팀목인 식민지 지주로 재편되고 있었다. 이같은 현상은 독립운동단체의 군자금 모집 활동에도 영향을 끼쳐 순리로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할 수 없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이에 박상진을 비롯한 일부 인사들은 ①반민족적 지주들을 응징함으로써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고, ②무력적 방법으로 군자금을 모금하여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③여기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민족혁명(민족독립)을 달성한다는 계획 아래 혁명적 독립운동단체의 결성을 추진해 간 것이다.

그 결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의병계열 인사들은 1915년 7월 풍기광복단과 제휴하여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이 때 제휴한 풍기광복단은 채기중·유창순·한훈 등의 주도로 1913년 결성한 독립운동 비밀결사로, 의병출신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조직원들의 성향과 투쟁방략은 조선국권회복단의 의병계열 인사들과 일맥상통하였기 때문에 대한광복회의 탄생이 가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한광복회는 "대한의 독립국권을 광복하기 위해 죽음으로 결의하고, 구적(仇敵) 일본을 완전 구축하기로 천지신명께 맹세한다"고 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다음과 같은 실천강령을 마련하였다.
①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日人)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②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③ 종래의 의병 및 해산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④ 중국·아라사(俄羅斯)등 여러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⑤ 본회의 군사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기관의 본부를 상덕 태상회(대구)에 두고, 한만(韓滿) 각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지점 또는 여관·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
⑥ 일인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隨時)·수처(隨處)에서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를 둔다
⑦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의 달성을 기한다

뿐만 아니라 비밀·폭동·암살·명령 등 4대 행동강령을 채택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한광복회는 국내외에 거점과 정보 연락망을 구성하여 독립전쟁준비전략을 실천하고자 한 혁명적 독립운동단체임을 알 수 있다.

창립 당시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은 박상진이었고, 부사령은 황해도 평산 의병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석대였다. 그러다가 이석대가 순국한1917년 이후에는 김좌진이 맡아 만주에 상주하면서 독립군 양성을 담당하였다. 이후 대한광복회는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1917년 예산을 중심으로 하는 충청도 일대, 해주를 중심으로 하는 황해도 일대, 보성을 중심으로 하는 전라도 일대, 그리고 서울·삼척·인천용천 등지에 조직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국외에도 조직망을 설치하여북만주 길림지방에 광복회 지부를 조직하였고, 남만주 서간도 지방의 부민단 또는 신흥학교 등과도 연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이같은 대한광복회에서 박상진·채기중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며, 충청도지부를 이끈 분이 바로 김한종 선생이다. 선생은 1883년 1월 14일 충남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에서 김재정(金在貞)의 독자로 태어났다. 호는 일우, 자는 경애(敬愛), 본관은 금령이다.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학행이 뛰어나고 충효의 전통을 지닌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이었다. 부친 또한 가학(家學)을 이어 성리학을 공부한 유생으로 집안의 아이들과 인근의 학동들을 교육하는 훈장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충효사상을 전수 받으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개항 이후 외세의 침탈을 목격하면서 선생과 부친은 척사적 민족주의를 수용해 간 것 같다.

이를 바탕으로 전(前) 참판 민종식이 충남 홍산(鴻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1906년 5월 홍주성을 탈환하자 선생과 부친도 여기에 동참하였다. 즉 부친 김재정은 성달영과 함께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하였고, 선생 또한 부친을 따라 홍주의병에 참여하여 항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홍주의병이 일본군에 패하자 선생과 부친은 그에 가담하였던 의병장들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고 재기를 도모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는 모두 충효의 전통을계승한 행동이었고,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나라와 민족을 지키고자한 척사적 민족주의의 발로인 것이었다.경술국치 이후 선생은 충청도 지역에서 국권회복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우선 선생은 사방으로 동지들을 찾아 규합하였는데, 이것이 후일 대한광복회 충청도 지부의 주요한 인적 자원이 되었다. 동지를규합하던 중 선생은 조선 총독이 부여지방을 시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16년 7월 김경태 김재창과 함께 선생은 부여의 이철영 집에서 조선총독 암살 계획을 모의하고 추진하여 갔다.

하지만 선생과 동지들은 일경의 가택 수색으로 조선총독 암살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각기 피신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바로 이 시기 선생은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동지들을 널리 구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채기중의 소개로 박상진을 찾아가 만나게 되었다. 1917년 음력 6월경 처음 만남에서 둘은 서로 의기 상통하였던 것 같다. 선생이 대한광복회에 가입하면서 곧 바로 충청도지부장에 임명되고, 그 조직 책임을 맡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즈음 박상진·채기중을 비롯한 대한광복회 지도부는 조직 확대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초 대한광복회가 목적하였던 사업이 지지 부진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대한광복회는 활동자금과 군자금을 부호들의 의연금과 일제의 세금탈취로 마련할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우편마차를 습격하여 세금을 탈취케 한 적도 있었고, 또 일본인이 경영하는 금광을 습격하려고 계획한 일도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않았다. 때문에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을 주로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조차 부호들의 비협조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심지어 일부 친일 부호배들은 군자금 헌납 권유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 내막을 일경에 밀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대한광복회 지도부는 군자금 강제 모집 방법을 강구하는 한편 이를 위해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반입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박상진은 1916년 만주로 가서 권총을 구입하여 갖고 들어오다가 서울에서 일경에 발각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총포화약령(銃砲火藥令) 위반으로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이 박상진을 만난 시점은 그가 출옥한 직후였고, 대한광복회 지도부가 조직 재건과 확대를 위해 애쓰던 시기였다. 따라서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선생과 대한광복회의 조직을 확대하려던 박상진은의기 투합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둘은 모두 의병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혁명적 투쟁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장으로 임명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곧 지부의 조직과 확대에 힘을 쏟았다. 우선 친분이 있던 장두환을 가입시키고, 그로 하여금 천안·아산 지역의 자산가 조사와 광복회원 모집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예산·홍성·청양 지역을 중심으로 친분 있는 인물들과 금령 김씨 문중 사람들을 상대로 광복회 가입을 권유하여 갔다.

선생의 노력의 결과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는 홍성·예산·아산 청양·천안을 중심으로 설치되었고, 그 참여 인원은 60여 명에 달하였다. 참여 인물 가운데는 선생의 부친과 삼촌을 비롯한 문중 사람들이 많았다. 또 선생 및 부친과 함께 홍주의병에서 활동한 인물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 참여 인물의 직업도 농업·미곡상 서당훈장·갱부·면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특히 대한광복회가 공화정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홍주의병 출신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사실이 이채롭다. 이는 김한종을 비롯한 척사유림들이 이 시기 이미 척사적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의병운동의 투쟁방략은 계승하고 있었지만, 그 운동이념만은 척사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근대적 민족주의를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선생은 충청도지부를 확대하면서 본격적으로 대한광복회의 독립전쟁준비전략을 실행하여 갔다. 우선 충청도와 경기도에 연락 거점을 마련하였다. 즉 예산·연기·인천에 곡물상을 개설하여 이를 광복회 본부 및 지부와의 연락 및 활동 거점으로 활용한 것이다.

나아가 선생은 군자금 모집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선생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충청도지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은 먼저 배당금 통고문이나 고시문·경고문을 발송한 뒤, 찾아가 의연금을 받아오는 형식이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일제측 문서에 따르면, 선생의 주관 아래 충청도 지부에서 발송한 고시문은 160여 통에 이르고, 군자금 모금액 또한 170만원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자금 모집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선생은 박상진 등 지도부와 상의하여 극단적 처방을 강구하였다. 그것은 군자금 강제 모집을 결행하면서 이를 거부하는 친일 부호배들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먼저 선생을 비롯한 지도부는 자산가들에게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과 배당금 통고문을 발송하고, 이를 일경에 밀고하거나 납부를 거부하는 친일 부호배들은 처단하도록 지령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박상진의 명령을 받아 악덕지주로 지탄의 대상이었던 경북 칠곡(漆谷)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1917년 11월 10일 채기중·유창순·강순필·임봉주 등으로 하여금 처단케 하였다.

이후 선생은 충청도지부에서 처단 대상으로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지목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도고면장 박용하는 통고문을 받고 이것을 헌병에게 건네주었을 뿐만 아니라, 박은 다시 부하 면서기 가족을 거지와 같이 만들고 전 면장을 옥사시킨 악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한광복회를 찬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연금을 낼 리 없으므로 이 자를 살해하여 그밖의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중략) 동면장이 악인인 증거는 첫째, 면장으로서 면민을 가혹하게 취급한 것, 또 하나는 면서기의 사택을 몰수하여 자기의 사택으로 하고 둘째, 전 면장의 공금 소비를 교묘하게 꾸며서 옥사케 한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선생은 천안 읍내에서 박용하의 처단을 장두환에게 지령하자, 그는 김경태와 임세규에게 실행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1918년 1월 24일 김경태와 임세규는 선생과 장두환의 지령에 따라 박용하를 집으로 찾아가 처단해 버렸다.

이 일이 있은 직후인 1월 27일 선생은 조직이 탄로나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의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후 선생은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은 뒤, 경성복심법원과 대구 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그리하여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음력 7월 8일, 38세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은 한말에는 척사적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의병운동에 투신하여 국권회복운동을 펼쳤고, 이후 1910년대에는 점차 근대적 민족주의 이념을 수용,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선생이 이끈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헌병경찰제에 의한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가 자행되는 암울했던 시기에 폭력혁명적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대다수 민중들은 헐벗고 굶주려 감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안일만을 위해 민족성을 포기해 가는 친일 부호배들에게 철퇴를 가함으로써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표출하였다.

더욱이 대한광복회의 의열투쟁 방략은 이후 암살단·주비단·의열단 한인애국단 등으로 이어져 독립운동을 크게 발전시켜 간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점이 우리가 선생을 기리는 이유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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