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소개
안창호 [安昌浩, 1878.11.9~1938.3.10]

선생은 1878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문을 익힌 뒤 1894년 상경하여 구세학당에 입학하였다. 구세학당 재학 중 기독교에 입교하고 신학문을 수학하면서 근대적 사고와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졸업 후 귀향하여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하여 근대민족운동에 앞장서게 된 연유도 여기에 있었다.

특히 평양의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관료들의 무능을 비판하면서 조국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규한 연설로 주목받은 뒤 가는 곳마다 많은 청중들을 웅변으로 감동시켰다. 곧 이어 봉건정부의 탄압으로 독립협회가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에서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세워 민중계몽운동을 벌였다.

이후 1902년 교육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주경야독하면서 재미한인들의 상호부조와 조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1905년 공립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 기관지로 『공립신보』를 발행하여 재미동포들의 권익을 신장하고, 러일전쟁 직후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일제의 침략야욕을 규탄하면서 조국의 국권수호에 힘썼다.

나아가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국권을 상실하자 1907년 국권회복운동을 펴기 위해 일본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비밀결사로 신민회를 결성하여 정치·사회운동과 언론을 통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대성학교와 자기회사 등을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과 실력양성운동을 힘써 펼쳤다.

1910년 국망이 가사회되자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중국 청도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청도회담을 열어 향후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한 뒤, 노령 연해주를 거쳐 미주로 돌아왔다. 재차 미주로 와서는 재미한인 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조직 역량을 강화에 노력하였다.

특히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 북미·하와이·만주·시베리아 등지에 지방총회, 미주 각 지역과 멕시코·쿠바 등지에 지방회를 설치하는 등 해외 한인 연계조직망을 구축하여 민족역량을 강화하여 갔다. 그리고 동맹수련단체로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여 민족지도자 양성에도 힘썼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지도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왔다. 초기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근무하며 정부 조직을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특히 국내외 동포들에 대한 통신 연락과 통치의 실현을 위해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 운영함으로써 민족의 주권기관이자 독립운동 총괄기관으로 임시정부의 위상을 크게 높이었다.

임시정부를 나온 뒤에도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통일을 위해 1923년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도하고, 1926년부터 민족유일당운동에 헌신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1930년 대공주의와 삼균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정당으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이당치국’의 논리를 추진하여 갔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일경에 피체되어 상해에서 국내로 압송된 뒤,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대전형무소에서 2년 6월의 옥고를 치르고 1935년 2월 가출옥되었다.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다가 1937년 ‘동우회사건’의 배후 지도자로 재차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초를 겪던 중 병보석되었으나, 1937년 3월 10일 59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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