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소개
오세창 [吳世昌, 1864.7.15~1953.4.16]

○ 1906 「만세보」, 「대한민보」사장으로 계몽운동
○ 1919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 참여
○ 1921 ~ 1945 천도교를 통한 독립운동

선생은 1864년 7월 15일(음) 서울에서 역관으로 개화파인 부친 오경석(吳慶錫)과 모친 김해김씨 사이에서 1남 1녀의 독자로 태어났다. 1880년 사역원(司譯院)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한 선생은 1895년 동경외국어학교 교사로 나갈 때까지 한성순보 기자, 통신국장 등을 역임했다. 1902년 유길준의 쿠데타에 연루된 혐의로 일본에 망명, 동학교주 손병희와 조우한 선생은 권동진, 양한묵과 함께 평생동지로서 손병희를 좌장으로 동학 내 ‘문명파’를 형성했다. 1906년 천도교가 창건되자 선생은 『만세보』의 사장, 대한협회 부회장으로 일진회 비판의 선봉에 섰다.
선생은 3·1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천도교의 도사(道師)였던 선생은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과 함께 천도교를 대표하여 민족대표로 참여, 3·1운동 중에 서울에서 조선국민대회와 조선자주당연합회 명의로 선포된 조선민국 임시정부의 조각에서 식산무경(殖産務卿)에 오르기도 했다. 이 일로 선생은 피체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1920년대 초 손병희의 사후 천도교가 보수파와 혁신파간 노선투쟁이 전개되자 선생은 보수파의 입장에서 천도교 교단의 사수에 노력했다. 이어 1925년 교단을 장악한 보수파가 다시 신파와 구파로 분화되자 선생은 소수파인 구파에 가담하였다. 구파는 일제에 타협적인 신파를 견제하면서 6·10만세운동의 모의과정과 신간회에 주도적으로 참여, 일제에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선생은 서화가로서도 크게 활약하는 등 문화운동 분야에서도 큰 자취를 남겼다. 1918년 서화협회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2년부터 서화협회전을 통해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라는 평을 듣던 선생의 서체는 당시 각 일간지와 잡지의 제호 및 휘호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또한 선생의 민족문화유산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뛰어난 식견은 당대 최고 한국문화재 수집가인 전형필(全鎣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선생은 해방을 맞아 원로 지도자로 추앙을 받았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한국민주당 영수,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회 위원으로 추대되었으며, 신한민족당 부총재·민주의원·서울신문 사장으로 직접 정치·사회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노구를 이끌고 백범 김구의 장의위원장을 맡았던 선생은 6·25전쟁 중 대구에서 1953년 4월 16일 9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판사 : 조선에서 민족자결의 취지에 의하여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운동을 하게 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오세창 : 그것은 세상의 풍조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주창하므로 가담했는데, 하나는 전세계의 사람이 민족자결로 소요하고 있는데 홀로 조선만이 침묵하고 있기보다, 실행은 되지 않더라도 역사에 남기기 위하여 조선인도 민족자결의 의사가 있다는 것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판사 : 그러면 피고는 이 시기에 조선의 독립을 바라고 있는가.
오세창 : 그렇다. 될 수만 있다면 독립하고 싶었다.
- 경성지방법원, 「오세창 신문조서」,『3·1독립선언 관련자 신문조서』중에서 -

1. 개화파의 적자(嫡子), 동학 지도자가 되다
선생은 1864년 7월 15일 한성(漢城) 중부 이동(현재 을지로 2가)에서 역관(譯官)인 부친 오경석(吳慶錫, 1831~1879)과 모친 김해김씨 사이에서 1남 1녀의 독자로 태어났다. 선생은 자신을 포함하여 8대가 역관을 지낸 전형적인 중인계층 출신이었다. 그리고 부친 오경석은 초기 개화파(開化派)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선생은 8살이 되던 해에 가숙(家塾)을 설치하고 부친과 함께 초기 개화파를 대표하던 한의학자 유대치(劉大致)를 스승으로 모셨다. 8년여의 집중적인 연마 끝에 선생은 16살이 되던 1879년 역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1880년 사역원(司譯院)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청년 개화파 세력이 주도한 갑신정변의 화마를 용케 피할 수 있었던 선생은 1886년부터 개화파 관료로서의 본격적인 행보를 걷는다. 갑신정변 와중에 폐지되었다가 다시 설치된 박문국(博文局)이 속간한 『한성순보(漢城旬報)』의 기자로 활약하게 된 것이다. 1894년에는 갑오경장의 중추기관인 군국기무처에서 관리생활을 했다. 다음해에는 정3품에 올라 경제관료로서 공무아문과 농상공부에 근무했다. 또한 통신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896년 1월 1일자로 단발을 결행한 선생은 다음해에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외국어학교의 조선어 교사를 지냈다. 1년 뒤 귀국한 선생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칩거에 들어갔다.
갑신·갑오의 ‘정변’을 주도하거나 관여한 개화파의 운명이 그러했듯이, 선생도 1902년 유길준이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청년장교들의 결사인 일심회와 함께 모의했던 쿠데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그 와중에 역시 망명객이나 다름없던 동학교주 손병희(孫秉熙)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조직 재건과 교권장악에 성공한 손병희는 문명개화노선으로의 방향전환을 모색하며 신분을 숨긴 채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무과에 급제한 뒤 무관으로 활동하다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망명한 후 일본군에 근무하던 권동진(權東鎭)과 관료생활을 사직하고 중국을 주유한 뒤 일본에서 체류 중이던 양한묵도 손병희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렇게 손병희를 좌장으로 선생과 권동진, 양한묵 등은 평생동지로서 동학 내 ‘문명파’를 형성하게 된다.
의기투합한 문명파의 노선은 분명했다. 제일 먼저 그들은 ‘옛 것을 근본으로 하고 서양문명을 절충한다’는 구본신참에 입각한 근대화 노선을 추구하는 대한제국 정부에 맞서 서구적 근대를 모델로 한 문명개화 일변도의 근대화를 촉구하는 반정부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상소운동, 일본이라는 외세 활용, 진보회·일진회를 통한 민회운동 등의 방식이 동원된 동학의 합법화와 국정개혁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은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재야정치단체인 일진회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확보한 것이 유일한 성과였다. 이러한 정치투쟁 과정에서 선생은 특히 진보회의 취지·강령·규칙을 제정하고 민회운동을 기획하는데 적극 관여했다.
1905년 11월 5일 일진회는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전격 발표했다. 그리고 11월 17일에 마침내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일제의 주구로 전락한 일진회의 행보는 동학교도들의 반발을 야기할 가능성이 컸다. 손병희와 문명파는 귀국을 서둘렀다. 그들은 1906년 1월 귀국과 동시에 천도교를 창건했다. 이 때부터 사용된 천도교의 교기는 선생이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한성순보』 기자 경력을 바탕으로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萬歲報)』를 발간하는 만세보사의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선생의 정치적 위상은 귀국직후 중추원 부참의에 임명될 만큼 상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곧 사직했다.
손병희와 문명파는 귀국 직후부터 이용구, 송병준 등의 일진회파를 회유했으나 결국 실패하자 그들을 출교시켰다. 일진회파는 천도교에 맞서 시천교(侍天敎)를 창건했다. 천도교 지도자들은 1907년 대한자강회 계열 및 전직 고위 관료 등과 함께 정당정치를 지향하며 대한협회(大韓協會)를 결성했다. 대한협회 주요 활동 중 하나가 ‘매국당’ 일진회를 비판·공격하는 일이었는데 선생은 부회장으로서 그 선봉에 섰다. 또한 선생은 대한협회 기관지인 『대한민보(大韓民報)』를 발간하는 대한민보사 사장으로 활약했다. 당시 선생은 절대독립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합방론을 주장하는 일진회와는 달리 동맹론을 주장하면서 ‘일본의 지도에 의한 문명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또한 선생은 기호의 중인 출신 신흥정치인으로서 계몽운동단체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평의원으로 참가하고 재일유학생 단체인 대한학회(大韓學會)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대한학회 찬성회(大韓學會 贊成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문화계몽운동에도 솔선했다.

2. 민족과 역사를 위해 3·1 독립선언에 뛰어들다
천도교는 3·1운동의 준비와 초기단계에서 각계의 독립운동 움직임을 하나로 결집하고 자금을 제공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독립 소요의 중핵’이었다. 천도교 지도부가 3·1운동에 나서게 된 정치적 배경으로는 우선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의 구체적 실천을 주장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천도교 지도부는 그것이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로 인한 민심 동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도교 지도부는 독립운동을 준비한다는 대의에 합의하고 행동원칙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수립한 뒤 각계에서 동조자를 규합하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당시 국내에서는 정치결사가 허용되지 않았던 까닭에 이승훈, 한용운, 송진우, 현상윤 등 주로 종교계와 교육계 인사들을 접촉했다. 이 와중에 동경에서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고종이 사망함으로써 객관적인 조건은 더욱 성숙되어갔다. 천도교 지도부는 중앙차원에서 독립선언을 모의하는 동시에 천도교인들을 동원한 전국적 시위운동을 준비했다.
손병희와 선생, 권동진, 그리고 1910년 국망 이후 스스로 천도교를 찾아온 40대의 재사(才士) 최린(崔麟). 이들이 3·1운동의 실질적인 주모자들이었다. 당시 도사(道師)의 직책을 갖고 있던 선생은 모의와 준비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거사’를 모의하는 자리에 늘 함께 했던 것은 물론 일단 계획이 수립되자, 이를 지방의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알리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서명과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행시켜 나갔다. 선생은 최린에게서 독립선언서 초고를 받아 검토할 때 만일에 대비해 필사한 뒤 원본을 넘겨주고 인쇄가 마무리되자 필사본은 태울 정도로 용의주도했다.
신문조서를 통해 선생이 3·1운동을 주모한 연유를 살펴보자. 당시 선생은 『대판매일신문』, 『대판조일신문』과 같은 일본의 주요 일간지를 구독하고 있었으므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을 논의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인도 민족자결의 의사가 있다는 것을 발표할 필요가 있기에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판사가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가?” 라고 질문하자, 선생은 “그렇다. 될 수만 있다면 독립하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또한 3·1 독립선언이 ‘조선민족이 같은 뜻으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일본 정부에 대해 힘을 합쳐 싸울 것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선생의 신문내용에 따르면 천도교 지도부는 1918년 말 세계정세가 동요하자, 우선 독립이 아닌 ‘자치운동’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19년에 들어와 형세가 변화하면서 만주, 시베리아, 상해, 미국 등의 조선인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풍설이 나돌았고 결국 그들과 동일보조를 취하기 위해 자치문제를 버리고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치를 도모했던 다소 개량적인 인식의 저변에는 일제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면서도 ‘민도(民度)’를 운운하며 차별적 시각으로 추진했던 식민정책에 대한 강한 불만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래서 선생은 ‘병합 후 조선이 교육이 보급되고 산업이 일어나 크게 진보한 것은 인정하나 일본민족과 조선민족은 평등해야 하는데 평등하지 못하므로 조선인에게 좀 더 자유를 주고 평등한 대우를 해 달라’고 요구했다. 선생은 조선인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로 교육정도가 뒤떨어져 있고 출판·언론·집회 등의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 등을 지적했다.
이처럼 선생을 비롯한 천도교 지도부는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을 통해 절대독립과 국권회복의 당위성을 주장했지만, 동시에 일본정부에게 식민통치의 기조를 직접 지배에서 자치 혹은 보호국 체제하의 간접 지배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조선인에 대한 동등한 대우와 정치활동 공간을 확보한다는 전술적 사고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개량성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을 쓸모없는 짓이라 생각했던 윤치호와는 달리 천도교 지도부는 3·1운동에 천도교의 인적·물적 역량을 총투입했다. 선생은 일본인 판사 앞에서 ‘처음부터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밝힘으로써 역사에 그것을 남기고 또한 조선민족을 위하여 기염을 토하기 위해 주모했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선생은 3월 1일 이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지만, 4월 10일 경성에서 조선국민대회와 조선자주당연합회 명의로 선포된 조선민국 임시정부(정도령 손병희, 부도령 이승만)의 조각에서 장관급인 식산무경(殖産務卿)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선생은 3년의 옥고를 치른 뒤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했다. 그리고 평소에 무척이나 즐기던 술과 담배를 완전히 끊었다. 또한 세인에게 ‘언론의 자유가 없는 시대의 처세술이냐’는 핀잔을 들을 만큼 말을 아끼며 침묵무언했다고 한다.

3. 천도교 구파 지도자로서 문화운동가의 길을 가다
선생이 옥문을 나설 무렵, 천도교는 손병희의 사위인 정광조를 주축으로 하는 보수파와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아들인 최동희를 주축으로 하는 혁신파간에 교단민주화를 둘러싼 치열한 노선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선생은 권동진, 최린과 함께 중재에 나섰으나, 곧바로 보수파에 가담하고 만다. 혁신파의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1922년 5월 19일 병석의 손병희가 영면했다. 내분수습에 번번이 실패한 교주 박인호는 6월 6일 사퇴했다. 세인의 이목은 손병희 사후의 천도교가 전과 다름없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선생을 비롯한 보수파 지도자들은 교주제가 아닌 종리사합의제에 입각한 ‘집단지도체제’라는 카드로 혁신파와의 협상과 지방 천도교인에 대한 설득에 나섰다. 그런데, 보수파와 혁신파의 합의하에 치른 종리사 선거에서 선생을 포함해 전원 보수파가 당선되었다. 보수파는 합법적으로 교단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좌절한 혁신파는 교단을 이탈했다.
그러나 보혁 갈등의 고비를 넘긴 천도교는 또 한번의 분규를 겪게 된다. 보수파의 중진 그룹은 1925년 최린의 독점적인 교권 장악 시도를 빌미로 최린, 정광조로 대표되는 신파와 선생과 권동진, 이종린으로 대표되는 구파로 분화되었다. 천도교인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던 신파는 서북지방을 세력기반으로 조선문화의 전통을 부정하고 서구지향적인 신문화 건설을 추구했던 신흥정치세력으로서 일제와 타협하며 자치운동노선을 추구했다. 반면에 기호·호남에 세력기반을 둔 구파는 대한제국에서 하급관료를 지낸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민족운동진영 내에서 ‘토호’로서 나름의 기득권을 갖고 있던 이들은 3·1운동 이후 분출된 항일의 민족정서에 충실하고자 했으며 일제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좌파와 연대했다. 특히 구파는 6·10만세운동의 모의과정과 신간회의 결성 및 활동과정에서 비타협적 우파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천도교 구파 지도자들이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선생은 본격적인 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서화와 골동품이 가득했던 가정 환경과 타고난 예술적 취미로 평소 관심이 많았던 서예와 감식(鑑識)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선대부터 갖고 있던 서화작품과 자신이 모은 작품들을 근간으로 한국서화사 연구에 착수했다.
서화가로서 선생의 안목과 식견은 부친에게 영향받은 바 컸다. 오경석의 경우, 청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금석학을 발전시킨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서예와 금석문의 고증학적 연구에 조예가 깊었다. 또한 역관이던 스승 이상적(李尙迪)의 소개로 중국의 금석학자, 서화가들과 교유하면서 금석학 연구에 열중하여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남기기도 했다.
서화가로서 선생의 족적은 이미 1910년대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1910년에는 서울 종로 청년회관 아래층에 서화포(書畵鋪, 지금의 화랑)를 개설할 것을 모색했으며 1911년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 미술학원인 경성서화미술원의 운영위원회격인 서화미술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서화미술회가 1918년 서화협회의 창립으로 이어지자 선생은 발기인으로 참석했다.
출옥한 이후에는 천도교단의 보혁 갈등이 해소되어 갈 무렵부터 서화가로서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서화협회전은 1921년 봄의 첫 회원전을 시작으로 1936년 전향(轉向)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될 때까지 존속했던 조선인 미술가를 위한 대표적인 작품전람회였다. 오세창은 1922년부터 줄곧 출품하는 등 서화협회전을 통해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맞서 조선총독부 측은 조선미술전람회를 창설했다. 선생은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전서(篆書)를 출품하여 서부(書部)에서 2등상을 수상했으나 이후에는 출품을 거절했다고 한다. 한편,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난 당대 최고의 서예가라는 평을 듣던 선생의 서체는 당시 신문인 『중앙일보(中央日報)』, 잡지인 『동광(東光)』등의 제호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고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경우에는 신년마다 선생의 휘호가 지면을 장식했다.
서화사 연구도 선생의 빼놓을 수 없는 문화적 업적이었다. 선생은 1916년부터 역대 서화가의 진필(眞筆)을 수집하여 『근역서휘(槿域書彙)』, 『근역화휘(槿域畵彙)』의 편집 작업에 착수했다. 마침내 1927년에는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완성하여 다음해에 출간했다. 그리고 전래의 인장(印章)을 수집·정리하여 한국 전각 예술의 역사적 전통과 실제 사용의 행적을 한눈에 보여주는 『근역인수(槿域印藪)』를 발간했다.
이처럼, 가업을 바탕으로 민족문화유산을 수집·보호하고 연구한 선생의 행적은 민족문화수호운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의 문화유산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뛰어난 감식안은 당대 최고 수집가인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일찍이 선생의 안목과 수집에 대한 노력에 감복한 전형필은 선생에게 서화와 골동품 수집에 관한 일체의 감식을 맡겼다. 1934년 전형필이 지금의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문화재 수집을 본격화하고 1938년 사립박물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건립할 때도 선생의 영향과 역할이 심대했다고 한다.
1930년대 초 천도교는 최린이 이끄는 신파가 먼저 일제에 백기를 들고 친일로의 전향을 선언했다. 구파도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직후 이종린의 주도로 친일 대열에 합류했다. 1940년 4월 신구파 합동으로 천도교의 친일협력의 조직적 기반은 한층 강화되었다. 하지만, 줄곧 천도교의 원로이자 고문(顧問)으로 ‘큰 어른’ 의 위상을 갖고 있던 선생은 이와 같은 노골적인 친일대오에 합류하지 않았다.

4. 추앙받는 민족지도자로 생을 마감하다
실절(失節)하지 않고 ‘변절과 친일의 시대’를 견디어 낸 선생은 마침내 82세의 고령으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국내에서 변절과 친일의 과거를 갖지 않는 민족 지도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기에 좌우 정치세력 모두에게 선생은 최우선 영입대상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선생을 위원으로, 이어 인민공화국의 고문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선생은 이들과 함께 하지 않고 우익에 가담하여 김성수, 김구, 이승만과 함께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먼저 김성수 등이 주도하는 한국민주당 영수(領袖)의 1인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회 위원으로 활약했다.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주도의 정치세력화를 꿈꾸며 신한민족당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오르기도 했다. 1946년에 들어와서는 반탁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김구, 이승만과 함께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 그리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주도했다. 선생은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식에서 민족대표로서 일본에 빼앗겼던 대한제국 황제의 옥쇄를 되돌려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한편, 해방과 함께 천도교는 친일행적의 시급한 청산을 요구받았다. 선생은 천도교 친일의 상징인 최린에게 은퇴할 것을 종용했다. 최린은 이를 거절했고, 결국 1945년 10월의 천도교인대회에서 출교 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선생의 언론활동 경력 역시 해방 후 십분활용되었다. 일제당국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해방직후 처음 열린 주주총회에서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개제하였고 선생을 사장으로 선임했다.
남한 정부 수립까지 선생은 각종 국민대회와 시민대회를 누비고 다니며 개회사와 축사를 도맡았고 3·1운동을 기념하고 순국선열을 추념하는데 앞장섰다. 정부수립식의 개회사도 그의 몫이었다. 이러한 활약으로 선생은 김구, 이시영과 함께 정부 수립 당시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정부 수립 후에도 김구가 암살당하자, 노구를 이끌고 장의위원회 위원장직을 맡는 등 계속 왕성한 정치·사회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6·25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 가 1953년 4월 16일 9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국회에서는 명복을 빌기 위해 1분간 묵념하고 세비의 1할을 갹출하여 조의금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이처럼 떳떳하게 해방을 맞아 민족지도자로 추앙 받으며 반민특위재판이 열린 법정에 자신의 서체로 당당하게 ‘민족정기(民族正氣)’라는 현판을 내걸 수 있었던 선생의 말년은 선생과 함께 3·1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모하고, 그 후광으로 일약 촉망받는 민족지도자가 되었으나, 곧바로 타협과 개량의 길을 걷다가 결국 친일과 변절의 선봉장이 되었던 최린의 그것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해방 후 최린은 졸지에 천도교 교권을 상실했고 반민특위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6·25전쟁 당시 납북되어 평북 선천의 한 요양소에서 이산의 슬픔을 간직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해야 했다. ‘친일과 변절’이 새삼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즈음, 해방후 선생과 최린의 정치적 부침은 ‘역사적 심판’이라는 다소 상투적이지만 엄중한 개념을 자꾸 곱씹게 한다.

<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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