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소개
유여대 [劉如大, 1878.11.26~1937.1.13]

○ 191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야학개설 문맹퇴치 활동
○ 1919년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의주에서 만세운동 주도, 피체되어 징역 2년의 옥고
○ 1921년 출옥 후 목회활동과 육영사업으로 민중계몽 활동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야 인류 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 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야 민족 자존(民族自存)의 정권(正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 선생이 서명한 3·1독립선언서 중에서 -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반, 평안북도 의주읍 서교회당 옆 공터에 700여 명의 사람이 모여 엄숙한 독립선언식을 하고 있었다. 두 개의 대형 태극기가 걸려있는 단상에 올라가 방금 서울에서 도착한 한문투의 독립선언서를 낭낭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읽어 내려가는 40대 초반의 사람이 바로 이 선언서에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한 유여대 목사였다. 선생은 비록 서울의 독립선언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이승훈과 양전백에게 약속한 대로 의주지역 3·1운동을 조직하고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의주의 독립선언식과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1878년 11월 26일(호적에는 12월 10일)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유택현(劉澤賢)과 어머니 윤치현(尹致賢) 사이에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극진히 받으며, 향리의 사숙에서 전통 한학을 공부하였다. 선생이 17세가 되던 해인 1894년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둘러싼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 터무니없이 의주, 평양 등 서북 지역이 청일양군의 전쟁터가 되자 고향을 떠나 피난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선생은 이듬해 피난에서 돌아와 자택에 한문서당을 열고 배우러 오는 학동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는 훈장이 되었다. 훈장으로서 선생은 학동들에게 도덕과 지식을 수련하여 참다운 인격을 갖출 것을 강조하였고, 몸소 이를 실천하여 효행과 학문에서 본을 보였다. 이러한 선생을 향리에서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다고 하여 유이학(劉理學)이라고 불렀으며, 부모에 대한 효행도 소문이 나서 20세 때 효자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선생이 친구의 권유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고 20세 때인 1898년 의주 서교회당에서 미국 북장로회에서 파송한 선교사 휘트모어(N. C. Whittemore, 魏大模)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선생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나서는 체계적인 학교교육에 관심을 가져 1899년 휘트모어, 장유관(張有寬), 김창건(金昌健) 등과 함께 의주지역 최초의 신교육 기관인 일신(日新)학교를 설립하여 그 학교의 한문 교사를 맡았다. 1907년 의주읍 서교회에서 장유관 등의 발기로 모금을 하여 양실학원을 확장할 때도 선생은 최광옥(崔光玉), 조학선(趙學璇), 이성하(李成夏), 배신희(裵信希) 등과 함께 학교 교사를 맡고 있었다. 이 일신학교와 1902년에 설립된 의신소학교, 1905년에 여자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양실학원이 1908년에는 양실학원(養實學院)으로 통합되어 심상소학부(4년), 고등소학부(3년), 중학부(3년)의 학제를 두고 교육하였다.
선생은 이렇게 교사로서 한말부터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투신하였으며 새롭게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에도 열심이었다. 1907년 선생은 의주읍 서(西)교회에서 동(東)교회가 분립될 때 새로 분립되는 동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던 것 같다. 선생은 이 교회의 영수와 장로가 되었으며, 1909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면서 1911년에는 조사가 되어 이 교회를 담임하였다. 37세가 되는 1915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모교회인 의주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1917년 9월에는 제6회 조선장로회 총회에 평북노회 총대로 참석하여 안식년 휴가중인 휘트모어 선교사 대리로 학무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1918년 11월 평북노회에서 의산노회(義山老會)가 분립될 때 선생은 의산노회에 속하여 창립노회에서 부회계로 선임되었다. 이듬해 2월 10일 선생은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를 방문하여 이승훈과 양전백을 만나 3·1민족대표로 참여하게 된 것도 실은 새로 분립된 의산노회의 회계일을 정리하기 위해 갔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피체될 때 선생이 담임했던 의주 동교회 교인수는 300여명이었다.
선생이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의주의 3·1운동을 주도한 사실은 경성지방법원의 다음과 같은 신문조서의 진술을 통해 상세하게 드러난다.

“문(조선총독부 판사 영도웅장) : 그대는 이번에 손병희(孫秉熙) 외 31인과 함께 조선독립선언을 할 것을 계획하고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서 명의를 나타냈는가.
답(유여대) : 그렇다.
문 : 어떠한 동기에 의하여 위 계획에 가입하였는가.
답 : 금년 2월 10일경 선천(宣川) 평북노회(平北老會)가 끝나는 날에 나는 선천으로 갔다. 의주(義州) 방면의 노회는 의산노회(義山老會)라고 부르는데, 전에 평북노회에 속하여 있었는데 작년에 위 노회로부터 분리되어서 작년까지의 전도회가 남아 있어서 이번에 분리하기로 되어 있어서 나는 의산노회의 회계를 담임하고 있으므로 그 돈을 받기 위하여 간 것인데, 선천에서 양전백(梁甸伯)의 집에서 동인을 만났던 바 동인이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독립선언서의 대표자로 되면 어떻겠느냐고 하므로 나는 원래 조선독립의 의사가 있었으므로 거사를 같이 할 것을 약속하였던 바, 양전백은 독립선언은 경성(京城) 및 각지에서 하기로 되었는데 그 운동을 하기 위하여 자기는 경성으로 갈 생각이므로 너도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찬성은 하겠으나 경성으로 가는 것은 어려우므로 의주 방면은 일을 (내가) 담임하겠다고 말하여 두었다.
문 : 그 때 선천에는 며칠 체재하였는가.
답 : 이름을 모르는 곳에서 1박하고 의주로 돌아왔다.
문 : 그 후 피고는 어떠한 행동을 취하였는가.
답 : 선천에서 의주로 돌아왔으나 비밀인 관계로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2월 17·8일경에 의주면 서부동(西部洞) 과부의 집 숙박업소에서 정명채(鄭明采)·김두칠(金斗七)에 대하여 선천에서 양전백과 함께 약속한 사실을 전하고 위 두 사람의 찬성을 얻었다. 그리고 의주군 주내면(州內面) 용운동(龍雲洞)교회에 동월 23·4일경부터 27·8일경까지 사경회(査經會)가 개최되어 나는 성경을 가르쳤으나 그간에 나는 양전백으로부터 무엇인가의 통지가 있을 것을 기다리고 있는 차에 2월 27일경이라고 생각한다. 정주(定州)의 사람인 선천교회의 영수 도형균(都衡均)이 나를 찾아 와서 독립선언은 3월 1일에 경성 및 각 지방에서 발표하기로 되었으므로 의주에서도 동일을 기하여 행하라. 그 방법은 경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보내 올 터이니 그것을 낭독하고 발표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는데, 2월 28일까지 독립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아서 그날 밤 정명채, 김두칠 등과 의주면 양실학교(養實學校)에 모여서 독립선언의 발표에 관하여 협의하기로 하고 다른 사람도 그 사실을 알고 20인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서 독립선언에 관하여 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내일의 일에 관하여 순서를 상의하고, 내가 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더니, 누구이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으나 다른 곳에서 발표한 선언서가 있다고 하면서 한 장의 선언서를 내놓았으므로, 그 선언서를 등사하여 준비해 놓고, 만일에 경성으로부터 선언서가 오지 않을 시는 그 등사한 것을 배포하기로 결정하고, 정명채, 김두칠에게 그것을 등사하도록 명하고, 또 내일 오후 2시 반경 서교회당의 공지에 집합하여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안석응(安碩應)에 대하여 내일은 선언서를 도청을 비롯하여 각 관청에 배포하도록 명하고, 그날 밤은 서로 헤어지고, 그 다음날 3월 1일 오후 2시경 안석응에 대하여 어젯밤에 명령한 바와 같이 각 관청에 선언서를 배포하고 오라고 말하고, 나는 오후 2시 반경에 상의한 장소로 갔었으나 그 때 양실학교 교사에 대하여 생도를 데리고 오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교사는 생도를 데리고 그 장소로 왔고, 생도의 부형들도 참가하여 7·80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찬미가를 부르고 기도하고 있던 중, 선천으로부터 약 200매의 선언서를 보내왔으므로 등사판으로 만든 것은 중지하고 그 선언서를 군중에 배포하고 나는 그것을 낭독하고 일동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던 차에 헌병이 와서 우리들을 체포하였다.
문 : 만세를 부른 후 구한국기를 세워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군중과 함께 시중을 누비고 다닌 것이 아닌가.
답 : 시중을 누비고 다닐 생각으로 나가는 차에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선생은 1919년 2월 10일경 노회 전도회의 회계의 일로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에 참석했다가 양전백의 독립선언서 대표자 참여 권유를 듣고 평소에 “조선독립 의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흔쾌히 참여하기로 하고 도장을 맡겼다. 그리고 사정(사경회 선약)이 있어서 함께 서울에 올라가는 것은 어려우니 “의주 방면의 일”은 자신이 책임지기로 약속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의주 방면의 일”의 내용을 묻는 판사의 질문에 “사람을 모아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들려주고 만세를 부르게 하여 독립의 의사를 표시하는 일을 책임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답하고 있다. 그리하여 선생은 약속대로 의주 지역의 3·1운동을 조직하고 3월 1일 오후 2시 반경에 의주 서교회 옆 공터(양실학교 운동장)에 7,8백여 명의 사람을 모아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제 헌병에 의해 당일로 체포되었던 것이다.
선생의 민족의식과 조선 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다음과 같은 신문조서에서도 잘 드러난다.

“문 : 피고는 전부터 한일합방에는 동의를 하지 않았는가.
답 : 물론 찬성하지 않았다.
문 : 그리하여 그 이후 항상 국권회복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데 어떠한가.
답 : 틀림없다.
문 : 다이쇼(大正) 8년(1919) 8월 중 손병희(孫秉熙) 외 수십명이 조선독립을 계획하고 그 독립선언을 하는데 있어서 피고도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서 해당 선언서에 기명하기로 되었다는데 어떠한가.
답 : 틀림없다.”
문 : 그대는 이번의 계획을 하여 조선의 독립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가.
답 : 그렇다. 세계 각국에서도 독립을 한다는 것이었으므로 조선도 독립국이라는 것을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 : 어찌하여 세계 각국이 독립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답 : 그것은 경성(京城) 발행의 매일신보(每日申報)에 민족자결이라는 것이 기재되어 있는 것을 금년 1월경에 보고 알았다.
문 : 민족자결이라는 것은 전란에 직접 관계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던가.
답 : 나는 조선도 위 문제의 범위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문 : 정부의 승인을 거친 후 비로소 독립국이 될 수 있는 것인데, 그 이전에 피고 등은 어찌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는가.
답 : 그것은 자결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한 것이다.
문 : 어찌하여 일본의 주권을 이탈하고 조선을 독립시키려고 희망하는가.
답 : 조선민족이 자유롭게 발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독립을 희망한다.
문 : 일본 제국신민이 되어 있는 편이 자유의 발달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답 : 나는 독립하지 않으면 발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문 : 병합 전은 인민은 자유를 압박 받고 있었으나 독립을 하여서 그와 같은 상태로 되는 것을 희망하고 있는가.
답 : 독립을 하여 공화정부가 되고 열국의 대열에 서서 가도록 하고자 생각하고 있다.
문 : 그대는 정치에 대하여 불평을 가지고 있는가.
답 : 독립을 희망하는 것은 조선인에 대하여 자유를 주지 않는다는데 불평이 있는 까닭이다.”

선생은 일제의 한국병탄에 찬성하지 않았으며 그 후 항상 국권회복의 뜻을 품고 있었다. 우리 민족도 자주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조선민족이 자유롭게 발달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일단 독립을 하면 옛 왕조체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공화정부를 이루어 열국의 대열에 나란히 서서 가고자 하였다.
당시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온건한 “독립청원론”과 비타협적인 “독립선언론”이 있었으나 선생은 분명하게 “독립선언론”의 입장에 확고히 서 있었으며, 기독교 신앙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1920년 9월 재판정에서 선생은, “독립에 대한 감상은 어떤가”라는 판사의 질문에 “성경 이치를 생각하여 보니 하나님께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모든 일이 합성 순성하나니라 하는 생각에 많은 위안을 받고 그리 반대하던 생각도 없었소. 언제든지 하나님의 명령만 믿으면 될 때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소.”라고 답하고 있다. 실제로 선생은 신념대로 의주의 독립선언식을 주도하다가 일제에 피체되어 2년여의 옥고를 치렀던 것이다. 선생의 피체와 투옥으로 시무하던 교회가 입은 심각한 타격을 1920년 8월 25일 『기독신보』는 “의주읍내 동교회 목사 류여대(劉如大)씨는 감옥생활을 하게 되어 일반교인은 목자 잃은 양과 같이 되어 이리 저리로 표류하여 각각 자기 길로 행하였더라. 그러므로 교인회집은 자연 영성하여 지고 기타 여러 가지 교회 형편은 황무해 졌더라”라고 보도하고 있다.
선생이 천도교의 홍기조 도사와 함께 경성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1921년 11월 6일 아침, 그러니까 의주에서 피체된 지 만 2년 8개월여 만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1921년 11월 7일자 기사에서 “홍유양씨(洪劉兩氏)의 출옥(出獄)”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11월 6일) 아홉시 십분에 류여대(劉如大)씨가 역시 깨끗한 의복으로 웃음을 머금은 얼굴을 옥문밖에 나타내며 기다리던 가족과 친구에게 일일이 반가운 인사를 마치고 역시 미리 준비하였던 자동차로 돌아왔는데, 씨는 옥중 감상을 말하되 ‘우리들에게는 옥리들도 그리 가혹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나 다른 죄수를 다루는 것을 보면 때때로 몹시 때리는데 아무리 죄수라도 너무 불쌍한 생각이 있었으며, 모든 자유를 빼앗긴 옥중 생활을 하여보니까 더욱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 깊었으며 출옥한 후에 대하여는 모든 일이 순서가 있고 세월이 있는 것이니까 우리는 오직 가장 정의 인도라고 생각하는 일은 위하여 힘을 쓸 뿐이라’ 하더라”

선생은 감옥에서 다른 죄수들을 가혹하게 다루는 것에 마음이 아팠으며,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 더욱 깊어졌고, 출옥한 후에는 모든 일에 순서와 때가 있으니 가장 정의 인도(正義 人道)라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힘쓰고자 한다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강조한 자유, 정의, 인도는 자주 독립과 함께 3·1독립선언서의 근본 이념이었으며, 선생은 출옥 후에도 변함없이 이 같은 이념의 실현을 위해 힘쓸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출옥하자마자 고향인 의주 동교회 담임으로 복귀하여 목회하는 한편, 3·1운동 당시 폐쇄되었던 양실학교의 재건을 위해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기부금을 모집하여 교육을 통한 후진 양성의 기반 구축에도 힘썼다. 선생은 이제 민족을 위해 옥고까지 치른 40대 후반의 목회자로서 1925년 2월에는 제13회 의산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동아일보』는 1925년 10월 4일의 “기미독립운동과 48인”이라는 연재기사에서 선생에 대한 최근 소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류여대 선생은 지금까지 고향인 평북 의주 홍서동(平北 義州 弘西洞)에 사시면서 예전 서문안(西門內) 예배당(의주 동예배당)엔가 목사로 계신데 선생은 장로파 목사라 아마 정년이 되시도록 그 예배당에서 그곳 사람을 교화하시기에 진력을 하시겠지오. 아직도 오십 전이라 선생의 정력은 갈수록 더하리라고들 합니다.”

선생은 1926년 10월 25일 저녁부터 29일 저녁까지 자신이 시무하는 의주 동교회에서 종교강연회를 열고 있는데 연제와 연사를 보더라도 목회 방향과 관심이 어떤 것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 즉 25일에는 선생 자신이 연사로 나서 “인물(人物)의 우승(優勝)은 교육의 필요”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그 이튿날은 의주 3·1운동의 동지였던 김두칠이 “인류 공존의 2대 문제”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으며, 넷째날에는 양실학교 교장인 김영훈이 “인류구제의 근본책”이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선생은 당시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는 요시찰인물이었기 때문에 다시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는 없었지만, 교육과 설교를 통하여 민족을 각성시키고 실력을 기르는 일에 힘썼던 것이다. 그리고 일제 경찰이 선생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찾아가면 “만일 아무 단서도 잡히지 않으면 도리어 자네들이 경칠 것을 각오하라”고 호령하여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선생은 1931년 20여년간 시무하던 의주 동교회를 사임하고, 신의주로 이사하여 그곳 백마교회를 담임하였다. 백마교회도 선생이 부임하여 예배당을 새로 짓고 크게 부흥하였다. 그러나 56세 되던 1934년 신병(身病)으로 교회를 사임하고 휴양을 하면서도 후학들을 위해서 계몽적인 저술 활동에 힘썼다.
선생의 설교를 모은『강대지남(講臺指南)』은 설교준비에 매우 유용한 책으로 평가받았으며, 동서고금의 위인들의 귀감이 될만한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위인기담(偉人奇談)』과, 한글·한자·일어 및 각종 서식 작성법과 상식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한 『면무식(免無識)』은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위한 계몽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가운데『면무식』은 1935년 초판이 반년이 못되어 절판되어 1936년 2월 증보 재판을 찍었으며 그 수익금을 고아들을 위하여 쓰려고 하였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이듬해인 1937년 1월 13일 향년 59세로 신의주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최후로 선생이 자녀들에게 남긴 필담은 “생명유도(生命有道)”였다.
한말 이래 선생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희생하며 우리 민족의 자유·독립·정의·인도의 실현을 위해 교육하고 교화하는 교육자요 목회자이며 민족운동가로서의 일관된 삶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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