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소개
이강년 [李康, 1858~1908]

○ 1896년 유인석 의진의 유격장으로 활동
○ 1907년 도창의대장에 추대
○ 1908년 피체되어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술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 - 옥중에서 남긴 시 -


이강년(李康秊) 선생의 본은 전주이며 철종 9년 1858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문경군(聞慶郡) 가은면(加恩面) 도태리(道胎里)에서 아버지 이기태(李起台)와 어머니 의령 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낙인(樂仁)이며 호는 운강(雲崗)이다.
선생은 두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 이기택(李起宅)의 집에서 자랐으며 장성함에 따라 기골이 점차 장대해져 키가 여덟 자가 넘었고 눈빛은 불이 넘치는 것 같아 위엄이 넘쳐 흘렀다고 한다.

동학군에 투신하여 후일 의병항쟁에 필요한 전략자원을 구축하다

1880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 부사과(副司果)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였다.
향리에서 은거하며 학문에만 열중하던 운강(雲崗)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하였다. 이때 휘하에서 농민군으로 활약하며 심산유곡을 누볐던 많은 농민들이 후에 의병항쟁에 가담하게 되었고 보급조달, 지형탐색, 현지 정보망 구축과 같은 의병항쟁(義兵抗爭)에 있어 긴요한 전략자원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894년에 청일전쟁, 갑오개혁(甲午改革)에 이어 1895년 8월 명성황후시해(明成皇后弑害), 단발령(斷髮令)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을미의병으로 알려진 의병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단발령은 전국의 재야 유생들을 분개시켜 전쟁의 직접적 불씨가 되었다. 그러나 의병전쟁을 주도했던 재야 유생들은 비단 단발령 때문에만 격분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침략적 개혁정치에 분노하였고 국모가 시해되는 급박한 사태에 더 이상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앉아서 볼 수 없다고 해서 무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때 선생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일인들을 소탕하고자 결심하였다.
제천(堤川)에 유인석(柳麟錫) 의진이 형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1896년 2월 23일(음 1월 11일) 자신의 가산(家産)을 흩어 군사들을 모집한 후 출생지인 문경(聞慶)에서 거의하여 왜적의 앞잡이며 양민을 토색질하던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 등 3명을 생포하여 농암(籠巖) 시장에서 이들의 반역행위와 토색질한 죄상을 낱낱이 들추며 효수(梟首)하였다.

유인석 의병진의 유격장으로 활동하다

그 후, 선생은 의병을 거느리고 안동(安東)의 창의대장 권세연(權世淵)을 만나 군사상의 문제를 의논하였으며, 음 1월 15일 고성(姑城)에서 적병을 맞아 교전하였다. 동 1월 29일에는 제천으로 가서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선생을 찾아뵙고 사제의 예를 표하고 의진에 합류하였다. 당시 영남유림의 거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정맥을 이은 유인석(柳麟錫) 선생은 위정척사 사상을 실천에 옮긴 유학자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동년 11월 28일 서상열, 이춘영, 안승우 등으로부터 의병대장에 추대되었을 뿐 아니라 일제의 국권침탈 직후에 많은 의병들과 유생들에게는 정신적인 버팀목이었다.
무장 출신으로 유림과 간격이 있던 선생은 의암 유인석 선생의 문하에 들면서 의병활동의 사상적 기반을 더욱 굳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당시의 의진들은 아무래도 전투력이 취약하였고 유인석의 제천 의진 역시 이러한 고충을 겪고 있었으니 무장(武將)으로 실전경험까지 갖춘 운강의 참여는 유인석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유인석 의병진의 유격장이 된 운강은 1896년 3월 17일(음 2월 1일) 전군장 홍대석(洪大錫)과 함께 군사 6초(哨)를 거느리고 수안보의 병참을 공격하였으며, 음 2월 13일 9초(哨)를 거느리고 중군 윤기영(尹基榮)과 함께 문경 평천(枰天)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동년 4월 제천 의진이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에게 패하자 유인석은 거수지계(巨守之計)를 정하고 요동으로 건너갔다.
이때, 선생은 후군장(後軍將)을 맡아 유인석의 뒤를 좇아 압록강을 거쳐 만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영월(寧越)에서 진로가 막혀 소백산(小白山)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백산으로 들어간 운강은 보급이 어렵고 이탈자가 늘어나 의진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단양 금채동(丹陽 金采洞)에 은신하였다.
의병활동에 따른 문집을 정리하며 지내던 운강은 1897년 4월 요동으로 들어가 유인석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을 만나 장백, 무송, 즙안, 임강 등에서 이주민 자치단체를 결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운강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백성들에게 항일의식을 불어넣고 이를 기반으로 직접 적과 부딪혀 싸우면서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권위를 되찾아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서 그해 7월 다시 단양 금채동으로 돌아왔다.
고국으로 돌아온 운강은 충청, 경기, 강원, 영남 등에 있는 옛 동지들을 찾아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국권유지를 기하고자 유림의 덕망있는 선비들을 찾아 토론을 하며 자기 수양에 힘썼다.
1899년 5월 충주 유림에서 화서(華西) 이항로의 문집을 발간할 때에는 몸소 충주로 가서 편집·간행·배포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의병전술에 관해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속오작대도를 만들다

단양 금채동에 은신 중에 운강은 자기 수양과 학문연구를 하였는데 그 가운데 특히 의병 전술에 관해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를 만들어 훗날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선생의 친필로 남아있는 속오작대도는 의병조직도, 행진법, 진격과 후퇴요령 등이 수록되어 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공사로 하여금 친일대신들을 앞세워 수차에 걸쳐 광무황제를 협박하였으며, 불법적으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외교권 등 국권탈취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나라를 구하려는 피끊는 백성들이 뭉쳐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1907년 군대의 해산은 당시 의병항쟁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즉, 해산된 군인들이 대부분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의병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의병의 군사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함을 좌시할 수 없던 선생은 1907년 3월 유인석과 상의한 후, 강원도 원주·횡성 등지에서 군사를 소모(召募)하여 재거의 하였다.
동년 6월에는 원주읍의 무기고를 열어 병장기를 거두고 군사를 모아 군세(軍勢)를 확충하였다. 이어 동년 7월 제천읍으로 진군,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원주 진위대(鎭衛隊)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의진, 조동교(趙東敎)·오경묵·정대무(丁大武) 의진 등과 연합하여 제천전투에서 500여 명의 적을 토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광무황제로부터 도체찰사 임명을 받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광무황제는 운강 선생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제수하며 다음과 같은 비장한 밀조(密詔)를 내렸다.

"아! 나의 죄가 크고 악이 충만하여 황천이 돌보지 않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강한 이웃이 틈을 엿보고 역적 신하가 권세를 농락하여 4천 년을 내린 종묘 사직과 3천 리 넓은 강토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의 지역이 되었도다. 생각하면 나의 실날같은 목숨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종묘 사직과 만백성을 생각하니 이것이 애통하도다. 선전관 이강년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지방 4도에 보내니 양가(良家)의 재주 있는 자제들로 각각 의병을 일으키게 하며 소모장(召募將)을 임명하되 인장과 병부(兵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
만일 명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들을 먼저 베이고 파직하여 내쫓을 것이며, 오직 경기(京畿) 진영의 군사는 나와 함께 사직에 순절(殉節)할 것이다. …"

도창의대장에 추대되다

제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구름같이 모여든 40여진이 제천(堤川) 진중(陣中)에서 이강년을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으로 추대하였다. 운강은 각 의병장과 의논하여 군제를 개편하고 그 직책을 다음과 같이 임명하였다.

중 군 장 : 김상태(金尙台) 우 군 장 : 이중봉(李重鳳)
우선봉장 : 백남규(白南奎) 좌 군 장 : 이용로(李容魯)
좌선봉장 : 하한서(河漢瑞) 감 군 장 : 이세영(李世榮)
전 군 장 : 윤기영(尹基榮)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된 이강년은 제천 백묘에서 진을 치고 원주 민긍호, 청풍진 조동교와 연합하여 충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충주는 군사상 요충지로 이곳의 공략은 의병활동의 거점 마련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7월 15일 행군을 시작하여 문지동(文池洞)을 거쳐 마수막(馬首幕)에 이르러 충주(忠州)를 치고자 하여 산하의 의진을 풀어서 작전을 실시하였으나 각 의진이 시기를 놓쳐 충주 진격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틈을 내어 불당곡(佛堂谷) 이주승의 집에 머물며 「국수원류(國讐源流)」,「군계(軍戒)」 12귀, 통고문(通告文) 등을 지어 군율을 가다듬었다.
이어서 풍기도촌(豊基道村)에서 일제 앞잡이 김기찬(金基燦)과 일진회 회원 김상호(金商虎)를 총살하여 친일매족행위를 징계하였다.
원주에서 탄환을 보충하여 전력을 보강시켰으며, 이때 공을 세운 이만원(李萬源)을 도총독장(都總督將), 권용일(權用佾)을 우군 선봉장에 임명하였다.
8월 3일 운강의 군사들은 주흘산 아래에 있는 혜국사(惠國寺) 승려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용기백배하여 갈평(葛坪)으로 진격하여 적을 쳐부수고 총과 탄환, 투구 등을 노획하였다.
이튿날(4일) 다시 갈평에 나아가 순검 1명을 총살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괴성(槐城)에서 일본군 육군소좌 과전삼태랑(戈田三太郞)과 육군 보병 대토촌(大土村)을 잡아 효수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6일 대승사(大乘寺)에서 다시 적 5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으나 8일에는 후군장 신태원(申泰元)이 문경 적성(赤城)에서 참패하여 아군 36명이 순국하였다.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단양 유치(楡峙)·영월(寧越)·병두(屛杜)·연풍(延豊) 등지에서 적과 대치하였으나 전세는 다소 불리하였다.
9월에 들어서면서 전정언(前正言) 김상한(金商翰), 전군장(前軍將) 윤기영, 소모장 주광식(朱光植)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자 전세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9월 16일 제천 추치에서 대전하여 적 200명을 사로잡았고, 9월 27일 죽령(竹嶺)에서 다시 적 200명을 사로잡았으며, 10월 5일 단양 고리평(故里平)에서 적 80명을 사로잡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고 산중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적과 대치하게 되자 전세는 다시 불리해졌다. 이에 굴하지 않고 10월 23일 풍기 백자동(栢子洞) 전투에서 적 100명을 사로잡는 등 분전하였으나 선생은 그 간의 과로로 병을 얻어 11월 12일 풍기 복상동(復上洞)에서는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은 내가 거의한 지 12년에 이와 같이 패배한 때는 없었다 하고 탄식하며 부하 장령들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한편, 종래 분산적으로 전개되어온 각 의진 중심의 개별 항쟁만으로는 거의의 궁극적 목표인 일제를 몰아내는데 한계가 있음을 자각한 이인영(李麟榮)과 허위(許蔿) 등의 의병장은 대일연합전선의 형성을 도모하였다. 즉, 전국의 의병부대들이 분산적으로 싸우지 말고 하나의 통합된 지휘부 밑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경기지방으로 모여 서울을 포위하고 일제 통감부와 담판하고 일제를 한국에서 몰아내는 연합의병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이에 동년 11월 각 의진에 통문을 띄워 전국의 의진들이 경기도 양주(楊州)에 모일 것을 호소하고 13도창의대진소(13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하였는데 선생은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에 선임되었다.
선생은 이와 같은 거시적 항쟁계획에 호응하여 즉각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약속한 기일 내에 양주로 집결하기 위해 의진의 북상(北上)을 서둘렀다. 화남(華南) 박장호(朴長浩) 의진과 연계하여 경기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11월 21일 전동(錢洞) 월계봉(月桂峰) 12월 3일 낭천(狼川) 간척리(看尺里), 12월 5일에는 경기도 건천(乾川)에서 일제의 발악적인 저지선을 뚫어야 했다. 그러나 혹독한 폭설과 추위로 교통이 마비되고 식량과 탄약의 조달이 어려워 더 이상의 진군이 어려웠다. 결국 선생은 서울진공의 웅지(雄志)를 미루고 부대를 재정비하여 이후의 항전을 준비할 수 밖에 없었다.
1908년에 접어들자 운강 선생은 휘하 장병들을 독려하여 동년 2월 용소동(龍沼洞)에서 적 백여 명을 사로잡은 것을 비롯하여 대청리(待淸里)·갈기동(葛基洞)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1908년에 이강년 의진이 가장 빛나는 전과를 거둔 전투로는 3월 12일의 강원도 인제(麟蹄) 백담사(百潭寺)의 전투와 안동 서벽(西璧) 전투, 4월 6일 봉화 내성(乃城) 전투 그리고 4월 8일의 안동 재산(才山)의 전투를 들 수 있다. 1908년 3월 12일 백담사 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2일 … 적이 많이 들어오므로 쳐서 무너뜨렸다. … 이튿날 새벽에 파수병이 3번이나 급한 정세를 보고하기를 적 500여 명이 북쪽에서 온다고 했다. 군중이 모두 나가 좌우로 독려하여 반날을 격전하니 적이 크게 무너지므로 추격하여 무찔렀는데 적의 죽은 자가 수백여 명이며 우리 군사의 사상자도 수십여 명이었다. 이 날 간성(杆城) 신흥사(神興寺)로 옮겨 주둔하고 군사들을 교련시켰다. 다음 날 다시 오세암(五歲庵)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이와 같이 눈부신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의진의 활동무대가 강원도·충청도·경상북도 일대에 걸친 광범한 지역이었으나 그 밑에서 활약한 김상태(金尙台), 이만원(李萬源), 백남규(白南奎), 하한서(河漢瑞), 권용일(權用佾), 윤기영(尹基榮)과 그 밖의 의병들이 모두 이 지방 출신자들로서 이 지역의 지리에 밝고 또 엄격한 군율로 의병부대의 기강이 서 있었던 데에 원인이 있었다.

까치성 전투에서 피체되어 순국

또한, 선생은 신돌석(申乭石) 의병장 같은 평민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할 만큼 민중의 이해(利害)를 잘 파악하고 그들의 입장에 접근해 있었으므로 가는 곳마다 지방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위에 의암 유인석 선생의 문도(門徒)로서 유림·선비들과의 교분, 광무황제의 도체찰사 위임, 전투의 와중에서도 군사들을 교련시키는 등 선생 자신의 뛰어난 용병술, 아들 3형제를 모두 의진에 참여케 한 헌신성 등은 이 의진을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케 하는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6월 4일 청풍 까치성(鵲城) 전투에서 장마비로 인해 화승총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도선봉(都先鋒) 하한서(河漢瑞) 등 7명이 전사하였고, 선생은 복사뼈에 탄환을 맞아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 후 선생은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탄환의 무정함이여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차리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받지 않을 것을.

선생은 그 동안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생사를 같이하던 휘하 장병들의 시신을 돌아 보면서 마을사람들에게 내가 잡힌 몸이 되었으니 별 수 없다. 전사한 사람들을 잘 매장하여 주기 바란다. 고 부탁하고 충주로 압송되었다.
군수가 음식을 대접하고자 하였으나 적의 음식이 어찌 목에 넘어가겠느냐고 물리쳤으며, 서울의 재판정에서도 국가의 세금을 빼앗는 것이 의병인가라는 재판장의 질문에 임금의 마음을 받들어 국가의 어려운 일에 앞장서서 나라를 위하여 공금을 사용한 것이 역적이냐? 원수인 적의 세력에 의지하여 임금을 협박하여 적을 섬기면서 국가의 녹을 먹는 것이 역적이냐? 의병을 일으켜 왜놈들을 섬멸하고 5적, 7적을 죽여 국가에 보답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한 것이다‘고 준열히 꾸짖었다.
또한, 선비에게는 죽음을 줄지언정 욕을 보여서는 안되는 법이다. 나는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다시 무엇을 한하랴‘ 고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선생은 결국 평리원(平理院)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08년 10월 13일 51세로 의기에 찬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운강문집」이 있고 그 제자와 의병시절의 부하들에 의하여 엮어진 「운강선생 창의일록」이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운강 이강년 선생은 3형제를 두었는데 3형제 모두 부친과 함께 의병투쟁을 전개하여 장자(長子) 승재(承宰)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차자(次子) 兢宰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삼자(三子) 명재(明宰)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각각 추서되었다.

<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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