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소개
이상재 [李商在, 1850.10.26~1927.3.29]

이상재(李商在)선생은 1896년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YMCA교육부장으로 활동하면서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24년에는 조선일보사장에 취임, 언론을 통한 민족교육운동을 펴고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회장에 취임, 민족지도자로 활동하다. 3월 29일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월남(月南)의 생애와 사상·업적을 되새겨 본다.

독립협회·신간회 창립…민족운동주도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그는 우리 역사 속에서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역사의 분수령에서 그처럼 올곧고 굵은 선을 그어놓은 선각자는 흔치 않다. 월남(月南)은 역사가 인물을 만든 경우가 아니라 인물이 역사를 창조한 경우에 해당한다.
교육자·민권운동가·정치가·청년운동가·언론인 등등 그에게 붙여진 칭호는 많다. 그러나 사학자 홍이섭(洪以燮)이 지적했듯 월남의 성격과 행동은 시대적으로「개혁을 위한 저항」과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를 전기적(傳記的)으로 서술하기는 벅찬 일임에 틀림없다.
지금,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숨가쁜 역사의 분수령 속에서 우리는 또다른 월남을 가질 수 없는 가?
「…신(臣)은 비록 만번 주륙을 당할지라도 이런 매국의 도적들과는 조정에 같이 설 수 없사온즉, 폐하께서 만일 신이 그르다고 생각 하시면 신의 목을 베이사 모든 도적들에게 사례하시고 만일 옳다 여기시면 모든 도적의 목을 베이사 온 국민에게 사례를 하소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날 고종(高宗)은 이상재를 불러 의정부 참사관을 명했다.

을사조약 체결되자 관직사퇴… 국민계몽 앞장

그러나 이상재는「어명」을 거역하고 단호하게 물러설 뜻을 밝혔다.
1894년 월남이 학부(學部)학무국장과 관립외국어학교교장을 겸임하며 민족을 이끌어갈 동량을 키워나갈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외세에 빌붙어 매관매직을 일삼던 김홍육(金鴻陸) 일파가 고종에게 보자기에 싼 뇌물을 바쳤다.
이를 본 선생은 『상감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운가』라고 일갈한 뒤 서슴없이 그 뇌물을 보자기째 난로에 처넣어 태워버렸다. 그리곤 통곡하며 왕앞에 엎드려 대죄(待罪)를 했다.
그러나 고종은 도리어 눈물을 지으며 이상재 선생의 손목을 잡아주었다.
풍운의 한말(韓末)과 일제(日帝) 암흑시대를 숨가쁘게 동시 호흡한 이상재 선생은 개화의 의지 속에 국정개혁을 도모하고 자주독립의 신념으로 애국청년을 지도하고 조선일보(朝鮮日報)사장으로 일제의 우민정책을 질타하며 때때로 대중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등 열렬한 삶을 살다 1927년 3월 29일 서울의 한 구석에서 78세로 생을 마감했다.
4월 7일, 사상 처음으로 거행된 사회장(社會葬)에는 일제의 경계와 감시 속에서도 전국에서 10만의 군중이 참집했고, 국내 1배29개 사회단체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사회장(社會葬) 10만 운집

그는 구원(久遠)의 청소년으로서, 해학과 풍자를 지닌 참다운 레지스탕스로서, 그리고 긴 안목의 소유자이며 애국으로 일관한 청빈한 시민이었다. 또한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는 불요불급의 의지인이요, 독실한 신앙인이기도 했다.
월남을「민중의 영원한 반려」라는 짧은 한마디로 요약한 사학자 박유봉(朴有鳳)은『그가 지금도 우리의 마음 속에 위대한 인물로 살아있는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가장 필요한 국민의 철학, 즉 희망과 자주성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월남은 구한말, 조선조 5백년의 국운이 쇠하여 왕정(王政)의 부패가 극심하고 외세의 침략이 노골하하여 나라터전이 흔들리기 시작할 무렵인 1850년(哲宗원년) 10월 26일 충남한산(韓山)(지금의 舒川)에서 태어났다.
18세때 그는 과거를 보러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무렵 정치는 부패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시험까지 악폐가 번져 합격여부는 순전히 금권과 정실에 달려있었다.
과거에 응시하고 난 그는『한심하다. 다시는 들어갈 데가 아니다』라고 탄식하고 벼슬할 생각을 버렸다.
선생은 과거는 보지 않되 서울에 남기로 했다. 그는 새로운 출발과 도약을 위해 세도가의 문객으로 10년 세월을 보냈다.
이때 사귄 친구가 판서 박정양(判書 朴定陽).
그와 친구가 된 것은 일생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신사유람단 수행

1881년 정부가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할 때 선생은 단장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 개화사상을 갖게 된 것이다. 이후 선생은 우정국 주사(郵政局 主事)를 거쳐 주미(駐美)서기관 등을 역임하며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잡기위해 관계에 몸을 담는다.
그러나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가 관직을 떠났던 그가 박정량의 청으로 다시 맡은 관직이 학부학무국장과 외국어학교장. 이때 젊은이들을 가르치던 선생은 많은 생각을 했다.
나라를 자주독립으로 지키며 바로 잡을 수 있는 확고한 길은 무엇인가. 민족자주의식 고취, 백년대계를 위한 교육, 민권을 보호하기 위한 언론활동 등이 그 길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독립운동가로서의 그의 후반인생이 일제와의 끊임없는 저항으로 점철되었음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아간파천땐 고종환궁 실현…언론인·교육자로도 큰 업적 남겨

1896년 7월 선생은 서재필(徐載弼)·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문 간립·독립신문 발간 등을 통해 국민계몽에 앞장서는 한편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한 고종의 환궁을 강력히 촉구해 이를 실현시키기도 했다. 이어 서울종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어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침탈을 성토, 일반민중들의 정치참여를 선동했다는 죄로 첫 번째 투옥되고 옥고를 치렀다.

2년여 옥고(獄苦) 치러

1902년에는 소위 개혁당 사건으로 2년여의 옥중생활을 했으나 출옥후 곧바로 일제에 저항하는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활동을 비롯, YMCA를 통한 청년계몽, 일본기독청년회의 국내침투저지, 국내청년종교단체 친목회 조직,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창립 등 왕성한 저항활동을 계속했다.
이후 1924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언론을 통한 구국의 길을 모색했고 이듬해 4월에는 전국 7백여 신문기자들이 참여한「조선기자대회」를 개최해 의장을 맡아 일제의 언론탄압과 식민정책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70고령에도 “일제에 항거”외친「영원한 청년」

이미 70을 넘긴 고령이었지만 일제의 탄압과 일제 앞에서는 젊은 청년보다 더 열정적으로 항거했고 민족의 진로에는 늘 앞장서 걸어갔다.
1927년 당시 좌·우익의 민족인사들이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을 위해 결성한 신간회에 선생이 초대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이념을 초월해 이미 광범위한 민족적 신망을 얻고 있던 선생의 위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미처 신간회의 활성화와 조국독립의 날을 보지못한 채 서거했다.
선생은 언제나 청년의 마음으로 살아간 선각자였다. 고난의 일제시대에 선생은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그 희망을 온몸으로 구현한 스승이었다.
선생은 슬하에 4형제를 두었으나 지금은 모두 작고하고 4남 승준(承俊)씨의 부인 송귀복(宋貴福)씨와 손자 홍직(鴻稙)·안직(安稙)·은직(垠稙)·강직(綱稙)씨가 생존해 있으며 은직씨가 서천에서 할아버지의 생가를 지키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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