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소개
채기중 [蔡基中, 1873.10.7~1921]

○ 1873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 1913년 풍기에서 광복단 조직 독립군양성 자금 모집
○ 1915년 대한광복회 결성
○ 1917년 부일배 처단활동
○ 1921년 사형으로 순국

우리 4천년의 종사(宗社)는 회진(灰塵)되고 우리 2천만 겨레는 노예로 변하여 섬나라 오랑캐의 악정과 폭행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이것을 생각하면 혈류(血流)가 용천하고 조국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 금할길 없다. 이것이 바로 본회(大韓光復會)가 성립한 까닭이다.
- 선생의 재판기록 중에서(1920년) -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은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과 연계된 비밀단체들이 주도했다. 일제는 한일합방 후 헌병경찰제도를 바탕으로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감행했다. 한국 민족의 기본권을 박탈했으며 감시와 통제를 통해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자행했던 것이다. 때문에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은 더욱 어려운 여건 속에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서도 한국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식을 줄 몰랐다. 해외에서는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을 바탕으로 독립운동기지들이 건설되었고, 국내에서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내 비밀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활동범위가 넓었던 단체가 바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였다. 대한광복회는 풍기를 중심으로 조직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가 중심이 되어 1915년에 결성한 비밀단체였다. 채기중(蔡基中) 선생은 풍기광복단과 대한광복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분이었다.
선생은 1873년 7월 경상북도 함창(咸昌)에서 채헌락(蔡獻洛)과 곡부공씨(曲阜孔氏) 사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자(字)는 극오(極五), 호(號)는 소몽(素夢)이다. 선생은 5척 4촌 정도의 키에 얼굴이 둥글고 검은 편이었으며, 눈이 컸다고 한다. 성품은 순박하고 민첩하며 구김살 없는 기질의 소유자였다. 선생이 태어난 함창은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 당시 일본군이 함창 태봉에 주둔하였고, 이후 의병전쟁 때까지 전란이 거듭되던 곳이었다. 또한 일제의 침략이 주민들을 직접적으로 압박하던 고장이었다. 선생은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병참부대에 잡혀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선생은 34세 되던 해인 1906년에 풍기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의협심(義俠心)이 강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남의 부당한 처사나 억울한 일을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선생은 근대식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워 상당한 수준의 한문실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18세 때부터 한시에 심취하기도 했다.『소몽유고(素夢遺稿)』에는 선생이 지은 한시가 76수가 전해질 정도로 한시에도 조예(造詣)가 깊었다.
선생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풍기로 이주한 이후부터이다. 풍기는 『정감록(鄭鑑錄)』에 십승지지(十勝之地)로 알려진 곳으로 전국에서 많은 이주민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이주민의 출입이 많은 곳이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지사들에게는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기에 좋은 장소였던 것이다. 선생은 풍기광복단을 조직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선생의 주도로 1913년에 풍기광복단이 조직되었던 것이다. 풍기광복단에는 선생을 비롯해 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강순필(姜順必)·김병열(金炳烈)·김상옥(金相玉)·정운홍(鄭雲洪)·정진화(鄭鎭華) 등 우국지사들이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들은 대부분 사회경제적으로 생활근거를 잃고 모여든 이주민 출신들이었으며, 의병적 기질의 인사들이었다. 선생은 풍기광복단을 조직하고 활동함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선생이 풍기광복단을 조직하는 과정은 『양벽도공제안실기(梁碧濤公濟安實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 달쯤 후 김봉초(金鳳樵)·정성산(鄭星山) 두 사람이 찾아와 손을 잡으며 “시국이 날로 어려워지는 이때에 풍기에 하늘을 찌를 만한 의기(義氣)를 지닌 지사(志士) 소몽(素夢) 채기중(蔡基中)이 생산작업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 세 가구의 재산을 모아 비밀히 풍기에 혁명기관을 설치하고, 전국에 흩어진 의병무리의 장교와 모험적인 용사들을 은밀히 불러모아 바야흐로 대사(大事)를 도모할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공이 마땅히 가서 논의하고 지휘함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양벽도공제안실기』는 양제안의 아들이 작성한 자료로 당시 선생이 풍기광복단을 조직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선생은 의병에 참여한 후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인물들과 모험용사들을 모집해 풍기광복단을 조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제안은 풍기로 선생을 방문해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의하였다. 풍기광복단의 최대의 문제는 군자금의 확보였다. 이를 위해 일본인 광산이나 부호들을 대상으로 한 군자금 모집을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선생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월의 중석광에 잠입하여 활동하기도 했으며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1915년에 대한광복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인사들과 풍기광복단이 연합해 조직한 비밀단체였다. 선생이 풍기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선생과 같은 뜻을 품고 활동하던 지사들이 있었는데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이관구(李觀求)·양제안(梁濟安)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기 이전부터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추진했던 지사(志士)들이었다.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서간도를 중심으로 해외독립운동기지들이 건설되었다. 해외독립운동기지에서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국내에서 찾아오는 인재들을 바탕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국내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건너갔다. 그러나 흉년과 풍토병으로 인해 생계마저 위협할 정도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때문에 서간도의 상황은 극히 어려운 상태였고 독립운동기지 건설에는 국내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당시 만주를 오가던 이들은 이곳의 절박한 실정을 목격하고, 해외독립운동기지를 지원할 계획을 수립했던 것이다. 또한 군자금을 모집하고 군대를 양성해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단체가 바로 대한광복회였다.
한말 국권회복운동의 큰 흐름은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조국독립이라는 역사적 과제 앞에서 이념과 투쟁 방략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공화주의 이념과 의병전쟁의 투쟁 방략을 서로 수용해 통일된 형태의 운동노선이 추구되었다. 대한광복회는 이러한 성격의 대표적인 국내독립운동단체였다. 선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풍기광복단이 의병적 기질을 가진 인사들이 중심이 된 단체라면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조선국권회복단은 계몽운동 계열의 인사들이 중심이 된 단체였다. 박상진을 비롯해 혁명적 기질을 가진 조선국권회복단의 인사들과 풍기광복단이 연합해 조직한 것이 대한광복회였다. 선생과 박상진과의 만남은 벽도(碧濤) 양제안의 소개에 의해 이루어졌다. 양제안은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풍기광복단의 지도부와 박상진과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양제안이 이러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요인은 그의 의병 경력 때문이었다. 양제안은 허위와 함께 산남의진에서 활동했고 허위의 제자인 박상진을 만주에서 만났던 것이다. 박상진은 양제안의 소개로 선생을 방문해 동지적 결합을 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집, 혁명기지 건설, 친일부호 처단, 무기구입, 독립군양성 등을 목적으로 한 국내혁명단체였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혁명기지를 건설하고 적당한 시기에 독립전쟁을 벌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투쟁 방략을 가졌다. 대한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 등 4대 행동강령을 채택하고 활동을 전개했다. 대한광복회의 투쟁강령에는 이러한 대한광복회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①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日人)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② 남북만주에 군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③ 종래의 의병 및 해산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④ 중국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⑤ 본회의 군사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대구)에 두고, 한만(韓滿)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지점 또는 여관·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
⑥ 일인(日人)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隨時)·수처(隨處)에서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를 둔다.
⑦ 무력을 완비되는 대로 일인(日人)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을 달성한다.

대한광복회는 이와 같은 투쟁강령들을 실천해 옮기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조직을 갖추는 동시에 만주에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만주 길림에 우재룡을 파견했고, 주진수(朱鎭洙)·손일민(孫一民) 등과 광복회를 조직해 만주거점의 본부로 삼았다. 또한 이진룡을 부사령으로 임명하여 만주에 상주시켰다. 이진룡이 순국한 후에는 김좌진을 부사령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전국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과 의협 투쟁을 전개했다. 이를 위해 상업조직으로 위장한 거점들을 설치했다. 대한광복회는 한만요지(韓滿要地)와 북경·상해 등에 지점 또는 여관 광무소 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는 강령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거점들은 곡물상이나 잡화점으로 위장한 상업조직이었는데 국내에서는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와 영주의 대동상점(大同商店)을 비롯해 대구·영주·삼척·광주·예산·연기·인천 등에 설치되었다. 이밖에도 만주에는 안동여관(安東旅館)·삼달양행(三達洋行)·상원양행(尙元洋行)등이 설치되고 운영되었다. 특히 영주의 대동상점과 대구의 상덕태상회는 대한광복회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만주의 안동여관 역시 대한광복회원들이 만주에서 활동할 당시 크게 활용되었다.
대한광복회는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면서 전국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대한광복회 지부는 경상도·충청도·황해도·전라도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활동하였다. 선생은 당시 경상도지부의 책임을 맡고 경상도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대한광복회의 회원 모집과 군자금 수집활동에 전념했다. 선생은 끊임없이 대한광복회원을 모집해 대한광복회가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풍기광복단원으로서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한 인물들은 선생과의 인연으로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또한 대한광복회는 각도 지부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 발전했는데 그 중 충청도지부와 전라도 지부에서의 군자금 모집과 의협투쟁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선생은 충청도지부장인 김한종(金漢鍾)과 전라도지부장인 이병호(李秉昊)를 대한광복회에 가입시켰다.
선생은 김한종을 만나 “박상진은 위인(偉人)으로 1916년 장승원을 살해할 것을 계획하고 당시 대구감옥에 수감 중이다”라는 말로 소개하고 그와 함께 박상진을 방문해 그를 대한광복회에 가입시켰다. 전라도 지부장인 이병호도 선생에 의해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였다. 선생은 “국권회복을 목적하는 광복회가 있으며 광복회를 위해 노력해 달라”는 말로 이병호를 설득해 가입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대한광복회 활동에서 주요 인물들이 선생에 의해 가입하고 활동했던 것이다.
대한광복회의 활동은 크게 군자금 모집과 의협투쟁에 있었다. 대한광복회는 무력준비를 목적으로 일반부호의 의연금을 바탕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군자금 모집은 부호들을 조사해 그들에게 배당금 통고문을 보내고 일정기간이 지난 뒤에 대한광복회원이 찾아가 받아오는 형식이었다. 군자금 모집은 선생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선생은 박상진에게 광복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고문을 부호들에게 보내 군자금을 모집할 것을 주장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를 위해 선생은 경상도 일대의 자산가들에 대해 주소·성명·재산 등을 조사했다. 조사한 자산가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통고문이 대한광복회 명의로 발송되었다.

우리나라 천년의 종사(宗社)는 회진(灰塵)되고 우리 2천년의 민족은 노예가 되어 섬 오랑캐의 악정폭행은 날로 증가하니 이를 생각하노라면 피눈물이 솟고 조국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이 본회가 성립된 이유이니, 각 동포는 그 지닌 바 능력을 다해 이것을 돕고 앞날 본회의 의기(義旗)가 동쪽에 오를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각 자산가는 자금을 미리 준비하여 본회의 요구에 응하여 출금(出金)하기 바란다. 만일 우리 회의 기밀을 누설하거나 그 요구에 불응 할 때는 본회에는 자체 정규(定規)가 있어 이에 따라 조처하리라.

통고문은 우재룡에 의해 중국 안동에서 발송되었다. 통고문의 발송은 대부호로 국한하였고, 소자산가들에게는 국내에서 각 지부별로 고시문이나 경고문을 제작하고 발송하였다. 선생은 이를 위해 통고문을 수령한 자산가들 외에 경상도의 소자산가들을 상대로 군자금 모집을 하였다. 선생은 “국권회복의 사유를 설파하고 의연금을 출연하여 광복회를 원조하되 만일 응하지 않을 때는 후일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출금기일을 경과할 때는 군율(軍律)에 의해 처단할 것이다” 라는 경고문(警告文)을 직접 작성해 경상도내의 자산들에게 발송하였다. 경고문에는 광복회지령원감독장(光復會指令員監督章)이라는 도장을 새겨 날인하고 발송하였다. 선생은 당시 경상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한종·임세규 등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경고문을 수령한 자산가를 방문해 자금을 모집했다.
선생은 비록 경상도지부의 책임을 맡고 있었지만 활동범위는 경상도에 국한되지 않았다. 선생은 전라도 지부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는데 전라도지부에서의 군자금 모집도 선생이 담당하였다. 선생은 이병호가 조사한 전라도의 자산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발송하고 군자금 모집을 하였다

모사(謀事)는 사람에 달려있고 성사(成事)는 하늘에 있으므로 충의의 선비를 모아 민국(民國)을 조직하고 병사를 기르고 농회(農會)를 개창(開彰)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려움은 역시 금전이다. 여기에서 생각 끝에 유지(有志) 자산가들에게 간청하여 원조를 구하게 되었다. 이 경고에 위배하거나 불응하지 않으면 첫째는 국가의 행복이요, 둘째는 귀하의 생색(生色)될 것이니, 보통 세상의 예사로운 자들과 동일시 말고,얼마간의 금액을 며칠까지 준비하여 본회 간사인(幹事人)의 지시를 기다려 서둘러 율령시행(律令施行)과 같이 이행해 주기 바란다. 만일 반동(反動)으로 놀거나 또는 본회원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는 자 있으면 즉시 본회로부터 결사단을 파견하여 보복할 능력이 완전하므로 십분 유의하기 바란다.

그러나 대한광복회의 군자금 모집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자금은 부호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식민지권력에 안주하려는 이들이 군자금모집을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모집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통고문의 효력을 높이고 군자금 모집을 원활히 하기 위해 친일부호의 처단 등 의협투쟁을 전개하였다. 나아가 의협투쟁은 군자금모집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식민지 권력에 안주하려는 친일세력들에게 민족적 응징을 통해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경북 칠곡의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였으며, 충청도 지부에서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여 친일부호와 친일관리들에게 경각심을 일으켰다.
선생은 장승원 처단사건에 직접 가담하였다. 장승원은 한말에 허위(許蔿)의 도움으로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는 허위에게 의병자금으로 20만원의 헌금을 약속했으나 이를 지키지 않았다. 박상진은 그의 처단 이유를 ‘광복회를 원조할 것을 청탁했다가 거절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 내막을 관헌에게 밀고하려는 동태가 보인 장승원을 살해하여 그 원한을 푸는 한편, 남들을 위협하여 그 자금 조달을 용이하게 하려한다’ 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이유 외에도 장승원은 영남의 부호이면서 친일행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작인들에 대한 착취가 일본인 지주들 보다 심한 친일부호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대한광복회에서는 이미 권성욱(權成旭)을 통해 2차례에 걸쳐 그를 처단하려 했으나 실패한 상태였다.
장승원 처단은 선생이 주도했으며 강순필(姜順必)·유창순(庾昌淳)이 함께 가담했다. 선생은 1917년 음력 9월 25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권총과 박상진으로부터 받은 권총 1정을 가지고 장승원의 집에서 10리쯤 떨어진 주막에 숙소를 정했다. 선생은 먼저 장승원 집에서 여행객을 가장하고 하루 숙박을 하면서 정황을 파악하였다. 선생은 다음날 석유병을 준비했다. 이는 거사를 치른 후에 그의 집을 소각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임무를 분담했는데 선생과 강필순이 권총으로 장승원을 처단하고 유창순이 그의 집을 소각하는 임무를 맡기로 하였다. 다음날 장승원을 방문해 선생과 강순필이 장승원을 처단했다. 장승원의 머리와 목, 왼쪽 무릎을 명중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장승원의 집을 소각시키는 일은 성공시키지 못했다. 선생은 이 거사가 광복회에서 실행한 것임을 알리기 위해 그의 집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탈출하였다.

曰維光復 天人是符 聲此大罪 戒我同胞 聲戒人 光復會員
조국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여 우리 동포를 경계하노라 경계하는 사람 광복회원

선생을 비롯해 장승원 처단에 가담했던 이들은 모두 풍기광복단 출신들이었다. 이는 풍기광복단 출신 인사들의 무장투쟁적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선생은 이 거사를 주도하면서 풍기광복단 시절부터 같이 활동했던 동지들을 중심으로 준비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장승원 처단사건은 대한광복회의 의협투쟁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었다. 또한 친일세력들에게 큰 경각심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광복회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장승원 처단사건 후 충청도지부에서 박용하의 처단이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대한광복회는 일경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선생을 비롯해 박상진·김한종·김경태·장두환 등 대한광복회의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어 사형순국 하는 등 대한광복회 조직이 크게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일제의 신문과정과 재판과정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했다. 선생의 당시의 심경은 선생이 옥중에서 지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爲復先王國 (옛 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交來有義人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어 왔네)
誓死貫天日 (죽겠노라 맹세가 하늘과 해를 뚫나니)
萬刑不讓身 (오만가지 형벌인들 몸을 사리랴)

선생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기간은 1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선생이 조직하고 활동한 풍기광복단과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독립운동단체였다. 특히 일제강점 초기였던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성과 폭력성이 극에 달했던 무단통치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선생은 풍기에서 독립지사들을 모집해 풍기광복단을 조직했고, 조직을 확대해 대한광복회로 발전시켰다.
풍기광복단과 대한광복회 활동에서 선생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선생은 이들 조직에서 끊임없이 단원을 확보하고 자금모집과 의협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대한광복회에 가담했던 많은 회원들이 선생을 통해 가입해 활동했으며, 군자금 모집에 있어서도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대한광복회의 대표적인 의협투쟁인 친일부호 처단도 선생의 치밀한 준비와 지휘아래 성공할 수 있었다. 선생은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래 일관되게 무장투장을 실천해 옮긴 분이었다. 선생이 활동했던 대한광복회는 그 명맥이 3·1 운동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광복단결사대와 주비단으로 계승되어 1920년대에도 활동을 하였다.
선생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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