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소개
김복한 [金福漢, 1860.7.24~1924.3.29]

나는 대대로 녹을 받은 신하의 후손으로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평소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갑오년(1894) 6월 이후에는 시골에 칩거하여 평생 자정(自靖)하고자 하였더니, 지난 해(1895) 8월의 대변(大變,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르러서는 원통하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조금도 살 마음이 없던 중, 다시 11월 15일의 사변이 일어났다. 이 역시 흉악한 역신(逆臣)들의 소행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의 욕됨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신민(臣民)된 자의 박절한 정이 격동하여 시세와 역량도 헤아리지 못하고 복수하고 설치(雪恥)할 계획을 세우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을 도모함이 치밀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가볍게 일으켰다고 죄를 준다면 달게 받겠다.
- 선생의 법정 진술 중에서(1896. 2. 25. 고등재판소)

1. 가계와 생애
선생은 철종 11년(1860) 7월 24일 충청도 홍주군 조휘곡(현, 충남 홍성군 갈산면 소향리 조실)에서 안동김씨 봉진(鳳鎭)과 연안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원오(元吾), 호는 지산(志山)이며, 당색은 노론이다. 선생은 문충공 상용(尙容)의 12대 종손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우의정으로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고 강화도에 피난 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순절하며 화의를 반대한 인물이다. 또한 척화파의 거두였던 문정공 상헌(尙憲, 호: 淸陰, 1570-1652)이 그의 친동생이니 이들의 절의정신과 척화정신은 후손인 선생의 의병정신으로 계승되었다 할 수 있다.
선생의 선대가 홍주에 정착한 것은 11대조 광현(光炫) 때부터이다. 그는 홍주목사를 거쳐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홍주로 내려와 거주함에 따라 후손들이 홍주에서 세거하게 된 것이다. 이후 후손들은 그의 호를 따서 안동김씨 수북공파라 하였으니, 선생은 수북공파의 대종손이 된다. 수북공을 비롯하여 선생까지 문과 급제자가 3명 나왔으며, 실직을 역임한 이로는 그의 10대조 수인(壽仁, 수원부사), 9대조 시걸(時傑, 대사간), 8대조 영행(令行, 임천군수), 7대조 이건(履健, 청주목사), 그리고 조부 정균(正均, 고령현감) 등이 있으니 집안은 혁혁한 양반가문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선생은 개인적으로는 불우하게 성장하였다. 6살의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었으며 1년도 채 안되어 모친마저 잃고 말았다. 또 다음 해에는 선생을 아껴 주던 조부마저 타계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 어린 나이에 천애고아가 된 선생을 종조부인 김민근이 여러 해 동안 훈육해 주었으며 가산까지도 돌보아 주었다. 후일 선생은 “내가 문리를 깨우치고 전택을 보전한 것은 소죽(小竹)의 힘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그에 대한 감사의 뜻을 드러내곤 하였다.
선생은 12살 때인 1871년부터는 예산군 덕산면의 송애에 거주하던 농은(農隱) 이돈필(李敦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살 되는 1874년부터는 내종형 이설의 가르침도 받았다. 그 후 이설과는 관직에 앞뒤를 다투며 나갔으며 홍주에서 을미의병을 일으킨 동지가 되기도 하였다.
선생이 관계에 진출한 것은 31살 때인 1890년 9월 음직으로 선릉참봉에 제수되면서부터이다. 이 직임을 1개월간 근무한 선생에게 우시직이 제수되었으며 그해 12월부터는 서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 2년여에 걸쳐 뒤에 순종황제가 된 왕세자의 교육에 전력을 기울였다. 서연에서 선생이 왕세자에게 교육한 내용은 4서 가운데 맹자와 중용이 중심이었다. 1890년 12월 16일부터 시작된 서연은 1892년 3월 7일까지 총 37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서연은 차기 국왕이 될 왕세자에게 경사를 강론하여 왕세자로 하여금 유교적인 소양을 쌓게 하고자 실시되는 교육제도를 말한다. 따라서 미관말직인 선생에게 1년 반 가까이 서연을 베풀 기회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선생의 경사에 대한 해박함과 뛰어난 경륜이 널리 인정된 것을 의미한다. 왕세자를 시종하면서 정치 도의를 강학함에 따라 선생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연을 베푸는 시기인 1892년 2월 별시로 경시(慶試)가 열렸으며, 이 과거에서 선생은 문과 병과에 급제하는 영예까지 누리게 되었다.
문과에 급제한 후인 그해 3월까지 서연을 계속하였으며 왕세자를 모시고 황단(皇壇)의 제향에도 참석하였다. 3월의 서연은 4회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강학의 내용은 맹자를 끝내고 중용을 강학하였다. 그러한 선생에게 그해 5월 홍문관 부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사간원 정언 등이 제수되면서, 이제는 경연관으로서 왕에게 강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6월에는 사헌부 지평이 되어 신정왕후의 제향에 옥책관으로 참여하였으며, 10월에는 홍문관 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었다. 이때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권상하치제문’을 지어 올렸으며, 11월에는 ‘박성양치제문’을 지었다.
선생이 고종황제에게 경연을 베푼 것은 11월 18일 하루뿐이었던 것 같다. 이 귀중한 기회에 선생은 즐겨 읽던 자치통감강목에서 후한의「영제기(靈帝紀)」장을 택하여 강독하고 왕도정치에서 현명한 군주와 재상의 중요성을 피력하였다. 그 다음 해인 1893년 2월에 선생은 홍문관 부교리, 5월에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헌납, 7월에 홍문관 수찬, 9월에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시강원 사서, 통례원 상례 겸 시강원 사서지제교 등에 제수되었다. 10월에는 정3품 통정대부에 올라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형조 참의, 부호군, 성균관 대사성 등을 차례로 받았다. 1894년 3월에는 우부승지에 올라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 갑오변란(甲午變亂) 등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이후 일체의 관직을 받지 않았다.
그동안 선생은 왕세자와 왕에게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통치 철학을 강론하여 왕정을 굳건히 하고 나아가 국가를 반석위에 올려놓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부일개화파들의 개화를 빙자한 망국적 행위를 더 이상 조정에서는 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민족과 국가의 위기에 국왕을 끝까지 보위해야 할 중책에 있었으나 이미 선생의 주장이 조정에서는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어지게 되었음을 절감한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낙향하여 직접적인 항일의 방도를 찾고자 하였다.

2. 항일투쟁
1) 홍주의병투쟁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되는 갑오변란을 선생은 국망의 시초로 보았다. 두문불출하던 선생은 1895년 8월 을미사변의 비보와 11월의 단발령 공포에 접하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반개화 반침략의 의병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단발령 공포 직후부터 선생은 홍주지역 유생들과 잦은 접촉을 하였다. 중앙정계에서 요직을 역임했던 선생의 의병 봉기는 지방 유생들을 크게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우선 선생은 이설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동참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홍주부 전 영장 홍건과 함께 관찰사 이승우의 의병 참여문제에 대하여 여러 차례 협의하였다. 또한 홍주향교 전교인 안병찬과 만나 거의(擧義)의 뜻을 같이 하였다. 그리고 이상린·이봉학 등과 연락을 취하였으며 청양군수 정인희에게도 글을 보내어 의병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선생의 의병 봉기에 안병찬을 중심으로 하는 재지유생들과의 연합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들은 노론과 소론이라는 당색의 차이를 극복하고 의병투쟁에 적극 합류한 것이다. 이미 안병찬은 1894년 여름부터 의병봉기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을미사변 직후부터는 군사모집과 무기수집 등의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실제로 안병찬은 선생을 만난 다음 날 청양의 화성에서 향회를 실시하고 180여명의 민병을 모집하였으며, 이들이 홍주의병의 중심이 되었다.
선생의 거병은 12월 1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저녁에 이봉학·이세영·김정하 등에게 정산과 청양의 민병 수백 명을 나그네 또는 장사꾼으로 가장하여 성안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12월 2일, 선생은 안병찬의 척숙 박창로가 사민 수백 명을, 청양의 선비 이창서가 청양군수 정인희의 명령을 받아 수백 명을 인솔하고, 각각 홍주부에 집결하는 것을 기다려 의병을 반대하는 홍주부 참서관 함인학과 경무사 강호선을 체포하여 이들의 목을 벨 것을 명령하였다. 의병들이 경무청을 부수고 들어가 이들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어 구타하기에 이르자 관찰사 이승우는 이들을 살려줄 것을 호소하면서도 동참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은 당 태종이 죄 없는 진양령을 죽여 천하를 다스린 고사를 들어 힐책하자 이승우는 결국 의병에 참여하기로 승복하였다.
거병한 지 3일째 되는 12월 3일, 드디어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였는데 선생은 의병 총수에 추대되었다. 선생은 ‘존화복수’라 쓴 기를 세우고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각 고을 대표들로 하여금 집을 순회하며 노약자와 독자를 빼고 각 호에 한 사람씩 응모하도록 하였다.
관찰사 이승우 역시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이란 이름으로 관내 각 군에 명령을 내려 당일로 군사를 이끌고 오게 하였다. 관찰사의 명령은 바로 하달되어 홍주부 관할의 관군은 군수의 명령 하에 홍주 집결을 위해 출동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만에 관찰사 이승우는 변심하여 선생 등을 구속했다. 이 소식을 듣고 각 군의 관군은 회군하고 말았으며, 오직 청양군수 정인희만이 공주를 공격하려고 진격 중 정산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다.
홍주부는 서울에서 내려 온 친위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친위대는 신우균이 이끄는 1개 중대로 250여명에 달했다. 김복한은 12월 7일 신우균의 취조를 받고 홍주부에 수감되었으며, 12월 30일 칼을 쓰고 결박당한 채 서울로 압송되던 중 1896년 1월 1일 신례원에서 돌아와 홍주감옥에 재차 구금되었다. 이는 이승우가 아관파천 직후에 김홍집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압송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이설·안병찬 등과 함께 1896년 1월 17일 서울로 다시 압송되어 구속되었다. 이때 얻은 각기병으로 선생은 평생 보행이 어렵게 되었다.
선생은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고종황제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귀향한 선생은 그 해 4월 보령의 길현(현, 충남 보령군 청라면)으로 이사하여 후학 지도에 전념하였다. 5월에는 성균관장을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다음해 다시 중추원 의관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선생은 후학 지도에 힘쓰는 한편 향음례를 실시하고 향약을 베푸는 등 주자학의 교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2) 을사조약 반대투쟁
1905년에 선생은 부인 이씨를 잃는 슬픔을 잊기도 전에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들었다. 선생은 이설에게 글을 띄워 어찌 한탄만 할 수 있느냐면서 유림의 뜻을 모아 연명상소를 올릴 것을 상의하였다. 이에 이설은 유림의 뜻을 모아 상소를 지을 여가가 없다면서 바로 서울로 올라가자며 오히려 재촉하였다. 선생은 병든 몸을 이끌고 이설과 함께 상경하여 12월 2일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선생은 5적을 처벌할 것과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세력을 축출하고 왕실을 회복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어서 선생은 ① 소위 신조약 5조 반포와 ② 각국 주차공사 소환 건이 과연 재가 되어 시행되었는지 알지 못하겠다면서, 일본과 맺은 조약의 파기를 거듭 주장하였다. 아울러 국토가 일본에 떨어져 나라가 멸망하게 되었다면서 최익현·송병선·전우·곽종석과 같은 유학자를 불러 나라를 지탱할 방책을 얻을 것을 건의하였다.
상소를 올린 지 이틀만인 12월 4일(양, 12월 29일) 선생은 일본 헌병과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어 경무청에 구금되고 말았다. 체포된 다음 날 고문관 와타나베(渡邊)의 공초를 받았는데 오직 의리의 정신으로 상소를 올렸음을 밝혔다. 12월 그믐날 풀려나 홍주로 내려온 선생은 비록 자신은 보행조차 불편한 관계로 행동에 나서지 못할망정 안병찬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고무하였다.
안병찬을 중심한 홍주지역 인사들은 민종식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1906년 3월 청양의 정산에서 의병의 기치를 올렸다. 이들은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하고 기세를 떨쳤으나 5월 31일 새벽 일본군의 기습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고 성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의병장 민종식은 이남규의 도움으로 재기를 꾀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선생도 이때 민종식과 더불어 의병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공주감옥에 구금된 선생은 11월에 다시 서울의 경무청으로 이송되어 구금되었다.
그 해 선생은 11월말 풀려났으나, 1907년 10월 13일 보령군의 순사보조원 2인과 순검 1인에 의해 또 다시 체포되어 보령군 관노청에 구금되었다. 죄명은 민심 선동죄였다. 더욱이 공주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조현에 이르러 순사보조원 2인이 의병의 소재지를 대라며 구타하고 총을 쏘며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다행히 순검 정원조가 총대를 밀쳐서 탄환이 빗나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10월 22일 풀려난 선생은 12월에 홍주군 결성면 산수동으로 이거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일로 인해 중풍에 걸려 밥을 먹고 책을 넘기는 일도 어렵게 되었다.
3) 파리 장서운동
1910년 8월 국망의 소식에 선생은 통곡하며 죄인으로 자처하였다. 음식을 물리치고 모든 집안일은 장자인 은동에게 맡기고 손님도 접견하지 않는 은거의 생활로 들어갔다. 건강상태도 더욱 악화되었다. 57세 때인 1916년 제천의병에 참여했던 이주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숨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상태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선생의 건강상태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1919년 고종황제의 죽음에 선생은 천자의 예에 따라 복을 입고 애도하였다. 다음 해 3월에 거족적인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홍주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구항면에서는 이설의 제자인 이길성이 주도한 횃불시위가 있었다. 이길성은 자택에서 국기를 제작하고 ‘대한국독립만세’라고 쓴 종이 깃발을 만들어 주민들을 인솔하고 동리의 월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선생은 만세시위에는 직접 참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고 파리에서 1차대전 승전국들이 강화회의를 개최하고 있음을 전해 듣고, 과거 의병의 동지들과 연명하여 강화회의에 글을 보내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운동을 계획하였다.
선생이 작성한 장서는 아쉽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지산집” 연보에 의하면, 일제가 신의를 버리고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과 그 후 일제의 잔악한 침략상을 성토하면서 전 세계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장서를 작성한 후 선생은 임한주를 비롯한 의병동지들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홍양기사”의 저자이가도 한 임한주를 찾아가 선생은 고종황제가 죽음을 당하는 흉변을 만나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만 그냥 있을 수 없다면서 파리강화회의에 글을 보내 독립을 호소하고 대한 유민(遺民)의 원통함을 호소하자고 하였다. 이어 선생은 청양의 안병찬을 비롯하여 김덕진, 홍성의 최중식·전양진·이길성·전석윤, 서산의 김상무·김봉제, 보령의 백관형·유호근·전병식·신직선·김지정, 논산의 이래수, 부여의 김학진 등 17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보령의 홍주의병 출신인 유준근이 서명자 명단에 들어 있으나, 그는 김창숙과 일찍부터 연결이 되어 전라도지역 연락의 책임을 지고 전우를 만나는 등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아 호서본에는 서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제자 황일성은 서명에 참가는 안했으나 비용 일체를 조달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서명을 받은 후 선생은 제자인 황일성·이영규·전용학 등을 서울로 보내 역시 제자인 임경호와 협의하여 만국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의 파리로 장서를 보내도록 하는 장서운동을 독자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때 김창숙을 비롯한 영남 지역 유생들도 곽종석을 수반으로 하여 같은 장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민족대표 33인에 유림 대표가 빠진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이미 손병희 등이 선언문을 발표했으니 유림들은 파리 강회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강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립을 인정케 하자고 하였다. 이들은 전국의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던 중에 임경호와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호서와 영남의 계획과 목적이 같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두 지역 유림의 장서운동은 통합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장서의 내용을 비교 검토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영남본의 뜻이 간명하다 하여 김창숙은 영남본을 가지고 상해로 떠났다. 김창숙은 상해에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에게 장서를 보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하였다. 그러나 이 장서사건은 송준필 자제인 송회근이 4월초 성주시장에서 3·1운동을 주동하여 체포됨으로써 왜경에 탐지되었으며, 이어서 곽종석 등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선생도 그 해 8월(음, 윤7월) 공주 감옥에 감금되었다. 선생은 감금되기 전인 7월 대구감옥에서 궐석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에서 선생은 집행유예 없는 징역 1년을 받고 7월 31일 형이 확정되었다. 일제는 8월 6일(음, 윤7월 11일) 선생을 체포하여 공주감옥에 구속하였으며, 12월 12일에 이르기까지 4개월여의 옥고를 겪었다.
파리장서 건으로 주위로부터 선생의 척사론에 대해 문제 제기가 있었다. 선생이 비록 주자강목을 들면서 척사론을 견지하고 서양을 거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힘을 빌려서라도 독립을 쟁취하려는 장서운동에서 이미 선생이 서양문명을 용인하고 있었음과 서양의 실력 우위를 인정한 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선생은 주자강목의 예를 들면서 자신의 행위가 결코 ‘이적’에 항복한 것이 아니라 국난을 구하는 방략이었음을 역설하였다. 또한 영남본의 내용을 뒤에 보고서 ‘대위(大位)’나 ‘대명(大明)’등의 표현이 지나치다고 지적하였다. 이로 보아 선생이 서양의 힘을 빌리고자 하기는 하였으나 척사론의 기본은 변함이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주자강목의 ‘변례’를 들면서까지 오랑캐와 손잡을 수밖에 없었던 심정에서 선생의 절박한 구국의지를 엿볼 수 있겠다. 이러한 태도는 영남 유림들이 채서론(采西論)적인 입장에서 서양에 대한 인식론의 변화를 보이는 점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출옥 후 선생은 홍성의 서부면 이호리에 인지서재를 짓고 백록동서원의 규약으로 과정을 만들어 후학을 지도하였다. 이때 선생은 의리정신을 가르치기 위하여 이항로의 글을 중심한 화서학파 유생들의 의병 격문과 상소문 등을 편집하여 『주변록(主邊錄)』이란 교재를 엮었다. 수학하러 오는 이들에게 선생은 먼저 이 책을 보게 하면서 “초학자가 시의(時義)를 알지 못하면 쇠망해 가는 세상에 서기 어렵다”고 항일민족이념을 고취하였다. 『주변록』에는 총 22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이항로(4편), 김평묵(3), 유중교(3), 최익현(2), 유인석(1), 홍재구(1), 홍재학(1) 등의 상소문이 15편(전체의 68%)이나 포함되어 있다.
선생은 주위의 사우들에게도 유교의 진작을 통하여 ‘내수의 장책’을 마련할 것을 권하였다. 1920년 5월 인도공의소가 설립된 것은 그러한 뜻이 받아들여진 성과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인도공의소는 선생과 함께 파리장서에 서명한 전양진·백관형·최중식을 비롯하여 유준근·이길성·황일성·오석우·이내수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인도공의소의 목적은 규칙 제2조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도상 윤리를 천명하야 세계를 작신”함에 있었다. 규칙 제3조에 의하면, 공의소의 본부는 경성에 두기로 하였으나 홍성이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홍주의병 6의사 중의 한 명인 이상규(본명; 이상린)를 대표에 추대하였다. 이와 같은 공의소의 창립 소식을 듣고 선생은 “앉은뱅이인 것을 잊고 일어서고자 했다”고 할 정도로 기뻐하였다.
창립 후 인도공의소의 활동은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죽은 지 3년 후에 비로소 유교부식회가 설립되어 그 활동이 이어질 수 있었다. 유교부식회는 인도공의소의 설립자들이 주축이 되어 “유교사상을 부흥하고 시대에 적합한 충의심을 앙양하여 새로운 윤리관을 확립”하기 위하여 1927년 홍성에서 조직되었다. 발기인은 김은동을 비롯하여 오석우·전용욱·최중식·황일성·이영규·김노동·최명용·김경태·이우직·정태복·김익한 등이었으며, 회장으로는 역시 이상규를 추대하였다. 선생의 장자인 은동(1888-1945, 자: 聖八, 호: 柳田)은 기관지인 인도사의 총무로 “인도(人道)”지의 간행업무를 총괄하는 한편, 신간회 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홍성지역 민족운동가로서 큰 활약을 하였다. 유교부식회의 주요 활동으로는 정기강연회 실시와 “인도”지 간행, 그리고 태안·청양·공주 등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여 유교사상의 보급과 충의정신의 고양에 힘썼다. 그러나 “인도”지는 창간호부터 일본 경찰의 검열로 원고의 일부가 삭제되는 등 탄압을 받다가 재정문제로 1931년 종간하고 말았다.
한편 윤봉길(1908-1932)도 유교부식회 회원으로 선생의 수제자인 전용욱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전용욱은 파리장서에 서명한 전양진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선생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특히 유교부식회의 강학부를 맡아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이때 윤봉길이 유교부식회에 가입하여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청산리대첩을 이끈 홍성 출신의 김좌진(1889-1930)은 선생의 종숙으로 항렬은 높지만, 그 역시 선생의 문하에서 글을 읽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3. 맺는말
선생은 1894년 부일개화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관직을 사직한 후, 낙향하여 나머지 전 생애를 항일투쟁에 바쳤다.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의 비보와 단발령의 강행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반개화, 반침략의 홍주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관찰사의 배반으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얻은 각기병으로 평생 보행이 어렵게 되었으니 선생의 항일민족운동의 출발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출옥 후에는 후학 양성에 힘쓰는 한편, 향음례를 실시하고 향약을 베풀면서 주자학 보급에 주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선생은 내종형인 이설과 함께 상경하여 5적 처벌과 일제 구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비록 건강상의 이유로 의병을 일으킬 수는 없었으나 선생은 안병찬 등에게 의병봉기를 고무하였다. 민종식이 체포되자 선생 역시 체포되어 서울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며, 풀려난 후 공주감옥에 다시 구속되었으나 선생의 구국의지는 옥고를 치르면서 더욱 굳건해졌다.
1910년 국망과 함께 선생은 자정의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이 발발하자 노년의 나이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운동을 계획하였다. 선생은 의병 동지를 비롯한 유림들에게 뜻을 알리고 서명을 받아 호서유림의 독자적인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이 주도한 장서운동은 영남지역에서 추진되던 장서운동과 통합되어 하나의 장서를 파리에 발송하기에 이르렀다. 학파와 당색이 서로 다른 호서와 영남지역 유림의 장서운동의 통합은 민족운동사에서 일대 쾌거라 하겠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초연한 선생의 국권회복 의지와 반침략 정신은 민족의 위기에 선생을 비롯한 문인들의 적극적인 민족투쟁을 가능하게 한 기반이 되었다. 그 결과 선생의 문하에서 일제시기 김좌진·김명동과 같은 걸출한 민족지사는 물론, 유명(遺命)으로 유교부식회가 설립되어 유교의 개혁과 아울러 민족의식 고취에 힘써 윤봉길과 같은 혁명운동가가 배출되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선생은 19세기말 조선사회의 전환기를 실천적으로 극복하고자 고투했던 유학자였으며, 일제의 침략에 위정척사운동과 의병투쟁, 그리고 파리장서운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항일투쟁을 주도했던 걸출한 독립운동가라 하겠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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