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소개
허위 [許蔿, 1854.4.1~1908.9.27]

○ 1896 경북 김천에서 거의, 의병 활동
○ 1907 경기도에서 재차 거의, 의병 활동
○ 1908 13도창의군 군사장으로 서울 진공
○ 1908. 9 서대문감옥에서 사형으로 순국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 안중근 의사의 허위 선생 평(評) -

이 말은 하얼빈의거로 의병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법정에서 왕산 허위 선생의 애국 활동과 정신을 칭송하여 간결히 평한 것으로, 왕산 선생을 대하는 후인에게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왕산 선생은 학자 관료형의 애국투사였다. 전통 성리학을 학문기반으로 삼았으면서도 신학문에 대한 소양도 겸하였으며, 처음에는 보수 유생의 입장에서 위정척사의 우국투쟁을 벌였으나, 나중에는 관료의 신분으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도 벌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구국의 의병전쟁을 선도하면서 일신을 희생시킨 저명한 의병장으로 이미지가 승화되었다.
선생은 1854년 4월 1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林隱里)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진사인 청추헌(聽秋軒) 허조(許祚)이며,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선생의 위로 세 분의 형님이 있었으니, 맏형 훈(薰, 호 舫山)을 비롯하여 둘째형 신(藎, 호 露州)·셋째형 겸(이명 魯, 호 性山)이 그들이다. 요절한 둘째형을 제외하고 맏형 방산 허훈은 한말의 거유로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친 대학자였으며, 셋째형 성산 허겸도 만주·시베리아 벌판을 풍찬노숙하면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투사였기에, 선생의 가문은 독립운동계에서는 당당한 명문대가라 할 수 있다. 또한 선생의 가문 일족이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국·러시아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고통과 시련의 세월을 지내야 했기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벌였던 우리의 민족적 고통을 상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결코 적지 않다.
선생은 자를 계형(季馨), 호를 왕산(旺山)이라 하였으며, 김해가 본관이다. 임은리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이름높은 학자 집안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어려서부터 가학(家學)을 이어받았으니, 특히 작은아버지 해초공(海樵公)과 20세 위인 맏형 방산공으로부터 학문을 수학하였다. 특히 방산공은 조부인 태초당(太初堂) 허임(許恁)에게 글을 배운 뒤 성재(性齋) 허전(許傳)과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 등과 같은 당대 최고 학자들의 문하에 출입하며 문명을 크게 떨쳤으며, 막내 아우인 선생에게 많은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남달리 총명한 선생은 8세 때 벌써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이때 지은 시 가운데는,
달은 대장군이 되고(月爲大將軍) 별은 만병이 되어 따르노라(星爲萬兵隨)
라는 구절이 있어, 뒷날 13도창의군을 모아 수도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선생 자신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꽃을 꺾으니 손에 봄이요(折花春在手) 물을 길으니 달빛이 집 안에 드네(汲水月入家)
라는 구절은 선생의 뛰어난 시상(詩想)을 짐작케 한다.
1894년에 들어와 동학농민전쟁이 전국을 휩쓸게 되자, 선생의 일가는 진보(眞寶)로 일시 피난하였다. 경상도 가운데서도 선산과 상주 등지는 동학세력이 특히 강성하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학자 집안이었던 선생의 일가는 화란(禍亂)을 피해 이거(移居)하였던 것이다.
선생이 구국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1896년의 전기의병 때부터이다. 그 전년인 1895년 10월에 국모인 명성황후가 일제 낭인들의 손에 무참히 시해 당하고, 그 울분이 채 가시기도 전인 11월에 단발령이 반포되어 민족적 자긍심이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전국 각처에서 항일의병이 연이어 일어났는데, 을미의병이 바로 그것이다. 재야유생들의 주도 아래 을미의병은 안동·진주·홍성·원주·제천·춘천 등지를 거점으로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구국대의를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선생도 이때 전국적 봉기상황에 자극을 받고 서둘러 의병을 규합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향인 임은리에 있던 선생은 이기찬(李起燦)과 이은찬(李殷贊), 그리고 조동호(趙東鎬) 및 이기하(李起夏) 등 인근의 지사들과 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1896년 3월 26일 장날에 맞추어 김천 읍내에 들어가서 수백명의 장정들을 모아놓고 항일의병의 기치를 들었다. 선생의 나이 42세 되던 해의 일이다. 이때 선생은 이기찬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이 되었다. 김산의병이라 부르는 이 의진의 중요 편제내용을 보면 중군장에 양제안(梁濟安), 선봉장에 윤홍채(尹鴻采), 그리고 서기로는 이시좌(李時佐)와 여영소(呂永昭)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거의(擧義)한 의병은 금릉(金陵)으로 들어가 무기고를 점령하여 무장을 갖춘 뒤 김산과 성주 두 곳에다 진을 쳐놓고 대구로 진격하기 위하여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지례(知禮) 군수는 이 의병을 격파하기 위하여 군내의 자위군(自衛軍)을 소집하는 한편, 의병 봉기 사실을 대구관찰사에게 급히 보고하였다. 지례군에는 이른바 토비보방단(土匪保防團)이 조직되어 있어 동학농민전쟁 때는 동학군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의병이 봉기하자, 지례군수는 이들을 모아 의병과 대적한 것이다.
김산의병은 지례의 자위군은 쉽게 격파하였으나, 이어 공주와 대구에서 출동한 관군을 맞아서는 고전 끝에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거병 직후여서 아직 진세가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적의 대공세에 직면하게 되어 의진이 쉽게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은찬과 조동호 등의 의병주모자들은 관군에 포로가 되었고, 선생은 잔여 의병 가운데서 포군 1백여 명과 유생 70~80명을 모아 상주 및 김산의 지사들과 함께 직지사(直指寺)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선생은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을 계속하여 충북 진천(鎭川)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 즈음 근신 전경운(田慶雲)이 해산하라는 임금의 밀지를 전하여 의진을 해산하였다.
선생은 의진 해산 후 진보에 있던 맏형에게로 가서 학문에 진력하며 나날을 보냈다. 이러한 선생이 중앙의 관계로 진출하게 되는 것은 1899년 신기선(申箕善)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이후 선생은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주차일본공사수원(駐箚日本公使隨員),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평리원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를 두루 거친 뒤, 1904년 8월에는 평리원서리재판장(平理院署理裁判長)에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오늘날의 대법원장서리에 해당하는 자리이다.
선생은 평리원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정하고 신속하게 사무를 처리하여 그 칭송이 자자하였다. 당시 신문에서도 선생이 평리원 재판장으로 임명된 것을 환영하면서 “평리원서리재판장 허위씨가 시무한 지 수일에 적체한 송안(訟案)을 일체 판결하여 장차 건체지탄(愆滯之歎)이 무(無)하리라고 칭송하더라”라는 세평(世評)을 싣고 있다.
선생이 중앙 관직에 진출해 있던 기간에 주목되는 사실은 유명한 항일언론가이자 개신유학자인 장지연(張志淵)과 교유하였다는 점이다. 선생은 그때까지 전통 유학을 학문기반으로 삼아 처신해 왔지만, 장지연과의 교유를 계기로 신학문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의 사상 전환의 단면은 1904년 8월 의정부참찬에 임명되었을 때, 정부에 건의한 10가지 조목 가운데 학교 건립, 철도·전기 증설, 노비 해방, 은행 설치 등을 주장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1904년 2월 일제는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한국침략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리고 2월 23일에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케 함으로써 한국침략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한국의 군사요충지를 ‘합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고, 나아가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고 나왔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자, 선생은 이상천(李相天)·박규병(朴圭秉) 등의 관료 동지들과 함께 전국에 배일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상을 규탄하고 전국민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당시의 배일통문 속에는 전 국민이 의병의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하여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의(義)와 창(槍)이 분발되어 곧 나아가니 저들의 강제와 오만은 꺾일 것이다. … 비밀히 도내 각 동지들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구리를 부셔 칼을 만들고 … 우리들은 의군을 규합하여 순리에 쫓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

당시 일제침략에 대해 정부관료 중에 그 누구도 감히 항의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선생이 주동이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항변하였던 것이다.
러일전쟁 중인 1905년 1월 선생은 그간의 항일활동이 빌미가 되어 일제 헌병대에 구금되었다. 며칠 뒤 선생은 의정부참찬을 사임하고 석방되었다. 그 뒤 약 2개월간 집에서 시국을 개탄하고 지내던 중, 3월 2일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선생의 전력을 두려워하여 최익현(崔益鉉)·김학진(金鶴鎭) 등과 함께 3월 11일 다시 구금하였다. 구금되기 전에 일제로부터 항일투쟁을 중단하라는 압박을 받게 되자, 선생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며 일언지하에 이를 반박하였다고 한다. 일제는 최익현과 김학진 양인을 석방한 뒤에도 선생을 4개월 동안이나 구금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조금도 굴함이 없었으므로 일제는 하는 수 없이 7월 13일 선생을 헌병의 감호 아래 강제로 귀향 조치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온 뒤 경상·충청·전라 3도의 접경인 지리산 삼도봉(三道峰) 밑의 지례 두대동(頭岱洞)에서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으며 은거하던 중 1905년 11월 「을사5조약」 강제 체결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경상·전라·강원·경기도 각지를 돌며 동지·지사들과 앞으로의 대처방안을 모색하면서 의병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이때 만났던 인물들로는 곽종석(郭鍾錫)과 이학균(李學均), 그리고 유인석(柳麟錫) 등이 있다. 또한 선생은 이 즈음 영천(永川)의 유명한 의병장 정환직(鄭煥直)에게 2만 냥을 주선해 주기도 하였다.
뒤이어 1907년 7월에는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 당하고 「정미7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차관정치가 시작되었으며, 이어 8월에는 한국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등 국권은 일제의 수중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이때 군대해산에 반발하여 한국 군인들이 대일항전을 전개하자, 이를 계기로 의병전쟁은 파죽지세를 타고 일시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선생은 1907년 9월 강원도와 경기도의 접경지인 연천·적성(積城)·철원 등지를 무대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선생은 주로 연천·적성·양주·파주·개성·삭녕·안협·토산·이천(伊川) 등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각지에서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친일매국분자들을 소탕하는 등의 활약을 보였다.
한편, 선생은 대한제국의 해산군인들을 다수 받아들여 전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 가운데서도 강화분견대 소속으로 일단의 동료들과 함께 봉기하여 항일전을 벌이던 연기우(延基羽) 의병부대를 포섭한 것과 강원도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활약하던 김규식(金奎植) 의병부대를 포섭한 것은 전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때 각지에서 활약하던 여러 의병부대는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대일항전에 보조를 같이하였다. 선생은 마전(麻田)·적성 등지에 있으면서, 지평·가평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인영(李麟榮) 의병부대와 긴밀히 연락하였으며, 철원에서 활동하던 김규식 의병부대를 통하여 황해도 장단의 김수민(金秀敏) 의병부대와도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중 선생의 휘하 의병부대와 이인영 의병부대를 주축으로 전국 의병의 연합체인 13도창군(十三道倡義軍)이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선생과 상의한 뒤 이인영은 1907년 11월 전국 각지의 의병장들에게 부대를 통일하여 연합의병부대와 통합사령부를 창설한 다음 서울을 향해 진군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발송하였다. 전국 각지로 발송된 격문의 내용을 항일민족언론지였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용병(用兵)의 요체는 그 고독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 데 있은 즉 각도의 의병을 통일하여 궤제지세(潰堤之勢, 둑을 무너뜨리는 기세)를 타서 근기(近畿)에 범입(犯入)하면 천하를 들어 우리의 가물(家物)이 되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국의 해결에 유리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또한 연합부대가 서울 진공작전을 결행하기에 앞서 한국 주재 각국 영사관에 선언문을 보내어 항일전의 합법성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의병전쟁을 광무황제의 칙령에 따른 한국의 독립전쟁임을 강조하고, 의당 국제법상 교전단체이므로 전쟁에 관한 모든 법규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일제 헌병의 기밀보고에 따르면 이인영 명의로 된 이 선언문의 한 부는 영국 정부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 격문 외에도 「해외동포에게 보내는 격문(Manifesto to all Coreans in all Parts of the World)」도 이 때 발표되었는데,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의병전쟁의 당위성을 천명하고 있다.

동포 여러분,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조국에 몸을 바쳐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야만적인 일본인의 잔혹한 행실과 불법행위를 전 세계에 호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잔인하여 진보와 인간성의 적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모든 일본인과 그 주구들과 야만적인 군대를 격멸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선생과 이인영 등의 호소에 호응하여 전국 각지로부터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의병의 규모는 총 48진에 1만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중요한 부대와 인원수를 보면 선생이 거느린 경기도 의병 2천명을 비롯하여 강원도의 민긍호 의병부대 2천명, 이인영 의병부대 1천명을 비롯해서 약 6천명이었고, 충청도의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가 5백명, 황해도의 권중희(權重熙) 의병부대가 5백명, 평안도의 방인관(方仁寬) 의병부대가 80명, 함경도의 정봉준(鄭鳳俊) 의병부대가 80명, 전라도의 문태서(文泰瑞) 의병부대가 약 1백명 등이었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12월에 회의를 열어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성립시키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한 뒤 구체적으로 서울 진공작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때 선공을 맡았던 선생은 각 부대별로 서울 동대문 밖에 집결토록 조치한 뒤, 3백명의 선발대를 거느리고 1908년 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공하였다.
그러나, 연합의진의 서울 진공작전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첫째, 후발 본진의 총대장인 이인영이 부친의 타계소식을 듣고는 문경으로 급거 귀향하는 사태가 일어난 일이다. 전통 유생이었던 그로서는 부친의 상례를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었던 것이다. 서울 총공세를 눈앞에 두고 최고 지휘부에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일사불란한 명령 지휘계통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아 결과적으로 전력을 일시에 한 곳에 집중시킬 수 없었다.
둘째, 연합의진의 서울 진공계획 정보가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일제가 이에 대한 방어책을 이미 완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언론에서도 거사 두 달반 전에 이미 의병의 서울 진공계획을 크게 보도하고 있던 실정이었으므로, 의병의 서울 공략이 임박해짐에 따라 일제는 서울 외곽의 방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의병의 진출로를 차단하는 한편, 한강의 선박운항을 일체 금지하고,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기까지 하였다. 때문에 의병이 일제의 방어망을 돌파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던 형편이었다.

군사장(허위)은 이미 군비를 신속히 정돈하여 철통같이 함에 한 방울의 물도 샐 틈이 없는지라 이에 전군에 전령하여 일제(一齊) 진군을 재촉하여 동대문 밖으로 진격함에 대군은 장사(長蛇)의 세(勢)로 서진(徐進)케 하고, 씨(허위)가 3백명을 솔(率)하고 선두에 서서 문 밖 30리 지점에 진군하여 전군의 내회(來會)를 기다려 일거에 경성을 공입(攻入)하기로 계획하였더니 전군의 내집(來集)은 시기를 어기고 일병이 졸박(卒迫)하는지라 여러 시간을 격렬히 사격하다가 후원(後援)이 부지(不至)하므로 그대로 퇴진하였더라.

이러한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같이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한 선생 휘하의 선발대는 본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화력과 병력 등 전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패배하고 말았다. 또한 뒤늦게 도착한 본대가 서울 진공전을 전개해 보지도 못한 채 작전이 중도에서 포기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13도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에는 부대 단위로 흩어져 독자적인 항전을 벌이게 되었다.
서울 진공작전이 중도에서 포기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기동력과 화력이 일본군에 비해 현저히 열세에 놓여 있던 의병부대의 전력에 비추어 볼 때, 각지의 여러 의병부대가 하나로 뭉쳐 서울 외곽까지 진공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서울 진공작전 뒤, 선생은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항일전을 재개하였다. 선생의 휘하에는 조인환(趙仁煥)·권준(權俊)·왕회종(王會鍾)·김수민·이은찬 등의 쟁쟁한 의병장들이 있어 각기 부대를 나누어 거느리고 도처에서 유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연파하였다. 의병부대들은 일본군의 진지를 기습하고 전선을 절단하여 통신을 마비시켰을 뿐만 아니라, 관공서를 습격하기도 하고, 부일 매국분자들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또한 의병의 군량은 체계적으로 공급된 반면에 납세와 미곡의 반출은 선생의 명령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활동하던 임진강과 한탄강 일대는 선생을 총수로 하는 의병부대의 군정 아래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선생은 군율을 정하여 민폐가 없도록 하였고, 군비 조달시에는 군표(軍票)를 발행, 뒷날 보상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 결과 주민들은 의병부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항일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경기도 북부지방에서 선생의 의병활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장박(張博)을 통하여 선생에게 해산을 종용해 왔다. 그러나 선생은 이를 즉각 거절하였다. 또한 친일 유교단체인 대동학회(大東學會) 회장 신기선이 이병채(李秉埰)를 통하여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선생은 이를 단호히 물리치고 최후까지 일제와 투쟁할 것을 천명하였다.
1908년 4월 21일 선생은 이강년·이인영·유인석·박정빈 등 쟁쟁한 의병장과 연명으로 전 민족이 의병대열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는 통문을 전국에 발송하였다. 선생은 머지 않아 대규모 결전의 시기가 도래할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과 이기학(李基學) 등의 부하들을 서울로 보내어 통감부에 광무황제의 복위, 외교권의 회복, 통감부 철거, 그리고 이권 침탈의 중지 등을 골자로 하는 30여 개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와 같은 원대한 포부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1908년 6월 11일 은신처를 탐지한 일제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휘하에 있다가 포로가 된 한 의병으로부터 소재지를 탐지한 철원헌병대에 의해 경기도 영평군 서면 유동(柳洞)에서 체포되고 만 것이다.
서울로 압송된 선생은 일본군 헌병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선생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일제의 한국침략을 당당히 성토함으로써 의병장으로서 절의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의병을 일으키게 된 동기에 대해,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한국을 멸할 흑심을 가졌다. 우리들은 결코 이를 좌시할 수 없어 미력하나마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라고 하여 일제침략이 봉기의 원인이 되었음을 명쾌히 설파하였다.
그 뒤 선생은 사형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1908년 9월 27일(양력 10. 21) 교수형을 당해 5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선생의 올곧은 의기와 품성은 순국 직전의 다음과 같은 일화를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형의 집행에 앞서 왜승(倭僧)이 명복을 빌기 위해 독경하려고 하자, 선생은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 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 라고 대성일갈하며 이를 물리쳤다. 검사가 선생에게 사후 시신을 거둘 이가 있느냐고 묻자, “죽은 뒤의 염시(斂屍)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옥중에서 썩어도 무방하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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