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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천 5백여 명 희생, 1만 6천여 명 부상,  3.1운동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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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움말
    2. 주요법령
    3. 근대 사법제도 도입과 흐름
    4. 사법제도의 식민지화
    5. 일제강점기 형사 사법제도와 3·1운동
    6. 사법사 연표
    1. 통감부 설치와 사법권 침탈
    2. 강제병합과 식민지 사법제도
강제병합과 식민지 사법제도

1 조선에 시행한 법령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문명 수준이 일본 본토에 비해 낙후할 뿐 아니라 민정·풍속·관습 등도 다르기 때문에 당분간 일본 본토와는 달리 차별적으로 통치하겠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에는 본국의 제국 「헌법」이나 「칙령勅令」, 법률들을 그대로 실시하지 않고 일본과 체계를 달리 하는 「제령制令」과 기타의 법령을 통해 실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에는 계통을 달리 하는 여러 종류의 법령이 실시되었다.

조선에서 일본 제국의회가 제정하는 ‘법률’과 같은 것을 제정할 필요가 생기면 조선총독은 이를 일왕의 재가를 얻어 자신의 명령으로 제정하였는데 이를 ‘제령’이라고 하였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신민의 권리와 의무, 재판소의 구성과 사법관의 자격, 조세 제도 등 중요한 국정 사항은 모두 법률 형태로 규정하도록 되어 있는데, 조선에서는 이를 ‘제령’이라는 형식으로 제정 시행하였다. 제령은 조선에만 시행할 내용을 중심으로 제정되었지만, 일본 법률을 조선에 시행할 때도 제령의 형식을 취하였다. 1912년의 「조선민사령」·「조선형사령」 등은 조선의 사법 제도에 적용된 기본 법령인데 이들 제령은 일본의 「민법」·「민사소송법」 등 민사 법률, 「형법」·「형사소송법」 등 형사 법률들을 조선에 적용한다고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조선형사령」에서 일본의 「형사소송법」을 의용依用한다고 하면서도 조선에만 시행되는 특별한 형사 소송 절차들을 규정해 두었다. 인권 보호를 위해 도입한 예심 제도를 인권 유린 수단으로 변용시켰고, 검사·사법경찰관의 권한을 대폭 확대시켰을 뿐 아니라, 피의자의 방어권을 극도로 제한하였다. 또한, 같은 해 「조선태형령」을 공포하여 즉결심판 대상이 되는 조선인의 행위에 대해 가능하면 태형을 실시하도록 함으로써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도 효율적으로 조선을 통치하고자 하였다.

일제하 조선의 법체계에서 주목할 점은, ‘병합 당시 그 효력의 존속을 인정한 대한제국 법령 및 일본국 법령’과 「조선태형령」 등 몇몇 제령을 제외하고 나머지 법령 대부분이 조선인은 물론 재조 일본인(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하여 재조 일본인들은 조선총독부의 통치에 대해 많은 불만을 토해냈고 이러한 불만으로 인해 일본 기자들은 1910년대 총독통치를 ‘무단통치’라고 칭하였다.



2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

이 시기에 주목해야 할 형사재판 절차가 즉결심판이었다. 즉결심판은 통감부 시기인 1909년 10월 16일 「한국에 재在한 범죄즉결령」(칙령 제240호)으로 도입되었다가 1910년 12월 15일 「범죄즉결례」(제령 제10호)에 의해 처벌 대상이 확대되었다. 즉, 1909년에는 처벌 대상이 ① 구류 또는 과료 형에 처해야 할 죄, ② 한국 법규에 의해 태형·구류 또는 30원 이하 벌금에 처해야 할 죄였다. 1910년의 「제령 제10호」에서는 ① 구류 또는 과료 형에 해당하는 죄 ② 3개월 이하 징역 또는 100원 이하 벌금 또는 과료에 처해야 할 도박죄, 구류 또는 과료 형에 처해야 할 「형법」 제208조의 죄 ③ 구재판소 관할 사건으로 3개월 이하 징역형에 처해야 할 「형법대전」 제5편 제9장 제17절 및 20절의 죄 ④ 구재판소 관할 사건으로 3개월 이하 징역·금고·금옥 또는 구류·태형 또는 100원 이하 벌금 또는 과료에 처해야 할 행정 법규 위반죄로 확대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처벌 대상 범죄가 일본 「형법」상의 도박죄‧상해죄, 대한제국기에 빈번했던 타인이나 친속에 대한 폭행죄 등이 추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 통치를 위해 제정 공포된 수많은 행정 법규 위반에 이르기까지 처벌 대상을 확대한 점이다.

즉결심판의 주체는 헌병경찰이었다. 법규상으로 즉결심판 주체는 “경찰서장 또는 그 직무를 취급하는 자”(제1조)가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조선총독부는 1910년 6월 29일 공포한 「통감부경찰관서관제」를 그대로 계승하여 조선에 헌병경찰제를 시행하였다. 즉, 경찰관서를 중앙에 경무총감부, 지방에 경무부(각도) 및 경찰서(각군)로 구성하고 경무총감부의 장인 경무총장은 한국주차헌병대장인 육군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경무부장은 각도 헌병대장인 헌병 좌관佐官으로 임명하며, 그 산하의 경시 또는 경부는 헌병장교 또는 헌병준사관 하사관으로 특별 임용할 수 있다고 하여 헌병대장이 모든 경찰업무를 지휘 총괄하는 체제로 구성하였다.



처벌법규

조선총독부는 1910년 8월부터 1912년 3월까지 민족간 적용 법규를 달리 하여 조선인에게는 대한제국기에 제정된 「형사법」, 일본인에게는 일본의 「형사법」을 적용하였다.

즉, 조선인 형사 피고인에게는 대한제국기에 제정된 「형법대전」을 비롯하여 「철도사항범죄처단례」(법률 제3호, 1900년 1월), 「신문지법」(법률 제1호, 1907년 7월), 「보안법」(법률 제2호, 1907년 7월), 「출판법」(법률 제6호, 1909년 2월)을 적용하였다. 이러한 이원적 구조는 1912년 3월 18일 「조선형사령」·「경찰범처벌규칙」(조선총독부령 제40호, 1910년 3월 25일)이 공포된 이후 사라지고, 그해 4월 1일부터 일본 형사법을 의용한 일원적 「형사법」 체계로 바뀌었다.

「경찰범처벌규칙」은 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하기 위한 추가 조항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조선 사회를 일본 근대 사회와 유사한 일상적 감시망 안에 가두어 놓고 있었다. 즉, 구걸에 대한 규제(7호), 소위 ‘미신’ 및 ‘유사종교’에 대한 규제(22호·23호), 출판물·광고 규제(13호·14호·15호·16호), 노동자나 동물 학대에 대한 규제(34호·54호) 등이 있을 뿐 아니라, 부랑자(혹은 ‘위험인물’)(1호·2호)나 밀매음(3호), 각종 단체 행위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자(4호)에 대한 단속 등 식민지 사회를 일본 사회와 같이 근대적 구조로 바꾸기 위한 사회 통제 기능까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3월 18일 「조선태형령」(제령 제13호)을 공포하여, 즉결심판 대상이 되는 행위에 대해 재조 일본인에게는 구류 또는 과료형을, 조선인에게는 태형을 실시함으로써 경죄에 대한 형벌을 이원화하였다. 태형을 실시할 수 있는 영역은 엄청나게 넓었다. 앞서 보았듯이 대한제국기에 제정되었던 「신문지법」·「보안법」·「출판법」 등의 법률, 「조선형사령」에 의용된 일본 「형법」·「삼림령」 등 제령, 「경찰범처벌규칙」·「도로취체규칙」·「하차荷車취체규칙」 등의 조선총독부령, 「요리옥음식점영업취체규칙」·「숙옥宿屋영업취체규칙」 등 경무총감부령 등에는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구류, 100원 이하의 벌금·과료에 처할 수 있는 항목이 부지기수였다.

3.1운동에 관련된 조선인들을 신속하게 처벌하기 위하여 1919년 4월 15일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제령 제7호)을 제정했다. 3.1운동에 참여한 조선인들을 대한제국 시기의 「보안법」 등으로 처벌해 왔으나, 「보안법」은 규정이 불비하여 이와 같은 운동을 진압하기에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령 제7호」를 새롭게 공포한 것이었다. 그것은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여 다수 공동으로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방해하려고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할 것을 규정하였다. 특히 “본령은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제1조의 죄를 범한 제국 신민에게도 역시 적용”한다고 하여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에게도 적용할 것을 분명히 하였다.



사법절차

  • 원문이미지 경성지방법원, 복심, 고등법원 전경 엽서. ⓒ국립춘천박물관
  • 경성지방법원, 복심, 고등법원 전경. ⓒ국립춘천박물관
  • 원문이미지 「조선형사령」(일부, 1912).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
  • 「조선형사령」일부 (1912).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조선인에 대한 형사 재판은 「조선형사령」이 공포되는 1912년 3월까지는 대한제국 시기에 공포된 「형법대전」·「민형소송규칙」·「형사재판비용규칙」 등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는 강점 초기 일본 식민 당국의 준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재조 일본인에 대한 형사 재판은 일본의 「형법」과 「형사소송법」 등에 규정된 절차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선인에 대한 재판 기관의 심급은 구재판소-지방재판소-공소원-고등법원의 4급3심제를 취하고 있었다. 지방재판소는 3인의 판사가 합의부를 구성하여 ① 구재판소의 권한 및 고등법원의 특별권한에 속하지 않는 형사소송의 제1심을 맡으면서도 ② 구재판소 판결에 대한 공소控訴와 구재판소의 결정·명령에 대한 항고抗告 등 제2심을 관장하였다. 공소원은 3인의 합의부로 ① 지방재판소가 내린 제1심 판결에 대한 공소 ② 지방재판소가 제1심으로 내린 결정·명령에 대한 항고를 담당하였고, 경성·대구·평양 등 3개소에 설치되었다.

재판소 조직은 1912년에 대폭 개정되었다. 4급3심제의 재판 제도가 복잡하므로 조선의 사정에 적합하게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1912년 3월 18일 「조선총독부재판소령」을 대폭 개정하였다. ‘재판소’라는 명칭을 ‘법원’으로 개칭하여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3급3심제로 고쳤으며, 지방법원 사무의 일부를 처리하기 위하여 지방법원지청을 설치함과 동시에 지방법원지청에는 검사분국을 병치倂置하게 하였다.

지방법원은 민사 및 형사에 대한 제1심 재판과 비송 사건에 관한 사무를 취급하였고, 복심법원은 지방법원의 재판에 대한 공소 및 항고, 고등법원은 복심법원의 재판에 대한 상고 및 항고에 대한 재판을 담당하였다. 종전의 지방재판소가 3인의 판사로 구성된 합의부에서 재판을 하였던데 비하여, 개정 이후에는 지방법원은 판사 단독으로 재판함을 원칙으로 하되 중요한 사건에 한해서만 3인의 판사로 구성된 합의부에서 재판하게 하였다. 복심법원은 3인의 판사, 고등법원은 5인의 판사로 구성되는 합의부가 재판을 하도록 하였다.

이와 아울러 각급 재판소에는 검사국을 병치하여 복심법원 검사국에는 복심법원검사장, 지방법원 검사국에는 지방법원검사정, 지방법원지청에는 검사를 두되 지방법원검사정의 명령에 따라 지청검사분국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한편, 1910년대 형사 재판 절차는 민족별로 상이하였다. 조선인 판사·검사는 원고·피고 모두 조선인인 민사 사건, 피고인이 조선인인 형사 사건만 취급하도록 하였다. 조선인 판사·검사가 일본인 사이 또는 조선인·일본인 사이의 민사 사건, 일본인이 피고인인 형사 사건은 취급하지 못하도록 하였던 것이다(「조선총독부재판소령」 제25조). 이러한 조선인 판사·검사에 대한 차별은 1910년대 내내 유지되다가 3.1운동 이후인 1920년 3월 24일 「조선총독부재판소령중개정」(제령 제3호)에서 삭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