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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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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2007. 6월 ~ 2017. 12월 개발된 콘텐츠입니다.
2007년 09월

서울올림픽대회 유치 신청 서한문

9월의 역사적 사건중의 하나가 서울올림픽이다.

서울의 올림픽대회 개최 결정(1981. 9. 30), 올림픽대회 개최(1988. 9. 17 ~ 10. 2) 모두 9월에 발생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올림픽 개최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기 위해 ‘서울올림픽대회 유치 신청 서한문’을 이 달의 기록으로 선정하였다. ‘서울올림픽대회 유치 신청 서한문’은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가 1999년 이관한 ≪88 서울올림픽대회 유치≫철(BA0113149)에 편철되어 있는 기록으로 1981년 2월 24일 서울시가 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에 제출했던 올림픽대회 유치 신청 서류에 포함된 서한문의 사본이다. ‘서한문’은 올림픽대회 유치를 희망하는 서울시장 박영수의 서한문과 적극적인 지원을 확약하는 전두환 대통령 및 조상호 KOC(Korean Olympic Committee) 위원장의 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올림픽대회의 역사가 바로 이 ‘서한문’과 유치 신청 서류로부터 시작되었다.

9월의 역사적 사건중의 하나가 서울올림픽이다.

서울의 올림픽대회 개최 결정(1981. 9. 30), 올림픽대회 개최(1988. 9. 17 ~ 10. 2) 모두 9월에 발생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올림픽 개최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기 위해 ‘서울올림픽대회 유치 신청 서한문’을 이 달의 기록으로 선정하였다. ‘서울올림픽대회 유치 신청 서한문’은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가 1999년 이관한 ≪88 서울올림픽대회 유치≫철(BA0113149)에 편철되어 있는 기록으로 1981년 2월 24일 서울시가 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에 제출했던 올림픽대회 유치 신청 서류에 포함된 서한문의 사본이다. ‘서한문’은 올림픽대회 유치를 희망하는 서울시장 박영수의 서한문과 적극적인 지원을 확약하는 전두환 대통령 및 조상호 KOC(Korean Olympic Committee) 위원장의 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올림픽대회의 역사가 바로 이 ‘서한문’과 유치 신청 서류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이 유치 신청서류를 IOC에 제출한 7개월 후 1981년 9월 30일 자정 TV를 지켜보던 국민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독일 바덴바덴에서 개최된 제84차 IOC 총회에서 대한민국 서울이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된 순간이다. 당시만 해도 개발도상국에 불과했던 서울이 52표를 얻어 27표에 그친 일본의 나고야를 물리친 것이다.

올림픽 유치의 움직임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3월 대한체육회가 제출한 올림픽유치 건의안이 같은 해 9월 국민체육진흥심의위원회에서 ‘국민총화와 대 공산권 교류 및 대 북한 우위 홍보’를 위해 올림픽 유치가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유치계획을 의결하였다.그러나 정부의 올림픽 유치 계획 발표 기자회견이 있은 얼마 ‘10·26사태’가 발생하였다. 이후 정치적 상황의 급변과 함께 올림픽 개최 회의론이 일기 시작했는데, 서울올림픽 개최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타계와 올림픽 유치계획을 구체화하는데 앞장선 박종규 위원장이 체육계 일선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올림픽 유치 계획이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은 19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이다. 새로 소집된 KOC(Korean Olympic Committee)긴급확대상임위원회는 “올림픽 개최는 국가의 대외이미지 개선과 대공산권 외교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할 것이며, 설령 유치 경쟁에서 탈락하더라도 올림픽유치후보국으로서의 명예가 남는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유치활동을 재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올림픽 유치 재추진을 정권의 안정화와 국민 통합을 위한 기제로 활용하고자 했던 정권의 정치적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후 1981년 2월 26일 경기장, 대회운영 등에 대한 IOC 질의에 대한 답변서 및 유치신청서 제출, 1981년 3월 IOC 관계자의 사전조사 등을 거쳐 9월 30일 바덴바덴에서 개최된 IOC 총회에서 올림픽대회 개최지가 결정되었다. 총회 개최전까지 현지 분위기는 나고야의 우세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체육계 인사는 물론 재계의 유력인사, 정부관계 인사 등 107명의 유치 대표단을 구성하고 현지에서 적극적인 외교를 펼쳐 예상을 깨고 서울이 올림픽대회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개최된 서울 올림픽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화합과 전진’을 기본 이념으로 개최한 서울올림픽 대회는 1976년 제21회 몬트리올올림픽대회 후 12년 만에 동서 양진영이 함께 참가하였으며, 세계 최대 참가국(160개국), 세계최대 참가선수단 인원(13,304명)을 기록하였다.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간 개최된 대회에는 23개 정식종목, 2개 시범종목, 2개 전시종목이 치루어졌다. 또한 서울올림픽은 분단 상황, 개발도상국, 올림픽의 정치적 이용, 상업화 경향 등의 국내외적으로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루어 국제사회에 한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도 개선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국가기록원 공개관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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