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노래 아리랑 표지
목차 목차 민족의 노래 아리랑, 그 탄생과 의미 05 아리랑이란? ㆍ아리랑의 기원 시대에 따른 아리랑의 변천과정 11 ㆍ구한말 ㆍ일제강점기 ㆍ광복 ~ 6.25전쟁기 ㆍ1950년대 후반 ~ 현재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21 ㆍ국내(정선, 밀양, 진도) ㆍ해외(중국, 러시아, 일본) 생활 속에 깃든 아리랑 43 ㆍ기념품류 ㆍ문헌류 . ㆍ음반류 . ㆍ기타 아리랑 기록관 89 ㆍ 문서 . ㆍ동영상 ㆍ사진 ㆍ정부간행물 부록 122 ㆍ 주요 기록물 목록 ㆍ 주요 전승단체 및 홈페이지
일러두기 일러두기 제공 기록물 현황 이 전자책(e-book)은 아리랑 관련 문서, 사진 ㆍ동영상, 정부간행물 등 다양한 유형의 주요 기록물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계 : 95 문서 : 9 시청각 - 녹음ㆍ동영상 : 17 시청각 - 필름 ㆍ사진류 : 19 정부간행물 : 4 정선아리랑연구소 : 46 발간목적 이 전자책은 최근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등으로 관심이 고조된 아리랑 관련 소장기록물을 아리랑의 역사와 함께 소개하여 교육현장, 학술연구 등 다방면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내용집필 이 전자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정선아리랑연구소의 진용선 관장이 집필하 였습니다 기록물 활용 이 전자책에 나오는 기록물 중 소장처가 명기되지 않은 것은 국가기록원 소장 기록물로 국가기록원을 통해 열람ㆍ활용하실 수 있습니다. 기타 소장 처가 타 기관으로 명기된 기록물은 해당 기관에 문의하여 활용하실 수 있습니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 그 탄생과 의미 1. 민족의 노래 아리랑, 그 탄생의 의미
민족의 노래 아리랑 그 탄생과 의미 [동영상1]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의 아리량(연대미상) 아리랑이란? 시대와 이념을 초월한 아리랑은 한민족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노래다. 아리랑에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고민,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 등 삶의 궤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아리랑에는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의 역사가 씨줄과 날줄로 남아있다. 아리랑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언제나 우리 민족과 함께한 노래였다. 사람들은 아리랑을 어떤 형식의 틀에 묶어 두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 내키는 대로 일정한 Soll 가사를 붙여 부르는 동안 삶 SoA 배어나오는 슬픔과 기쁨, 갈등과 대립 등 가슴 속에 품은 정한을 풀어나갔다. 노래를 부르다보면 자기자신도 모르게 술술 풀렸던 것이다. 아리랑은 역사의 거울이자 유산이기도 하다. 아리랑은 일제 침략에 대한 항쟁가로 불리기도 했고, 소박한 삶을 담은 전원의 노래가 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표출하는 서정 가요가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선정적인 내용을 담은 가요로 불리기도 했다. 아리랑은 고통과 슬픔, 설움과 회포를 풀어주는 도구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었다. [동영상1]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의 아리량(연대미상)
민족의 노래 아리랑 그 탄생과 의미 우리 민족의 이주는 전통민요 아리랑의 분포 공간을 한반도뿐만 아니라 해외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해외 동포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동질감을 확인하곤 한다. 마을에서 환갑, 돌잔치, 혼사 등이 있으면 보통 동포들이 모여 동네잔치를 벌인다. 식단에는 떡과 함께 잡채, 콩나물, 개장국, 김치 등의 BHO] 차려지고, 흥이 나면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노래가 아리랑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서로 어우러져 아리랑, 도라지타령 등의 WLS 맘껏 부르고 젊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에 = 익고 귀 익어 아리랑을 배운다. 옛날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풍습을 통해 아리랑은 우리의 정서와는 다른 공간 속에서 녹아 다양성을 담은 또 하나의 줄기를 형성하지만, 부모를 기억하는 노래, 그리움의 MSS 담은 노래로 내면 깊숙이 전해지고 있다. 아리랑에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수많은 삶과 사랑의 긴 긴 그림자가 각인 되어 있어 단순한 민요의 틀에서 벗어나 문학과 역사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은 슬픔과 기쁨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올올이 맺힌 응어리를 풀고 또 풀었다. 그들에게 문법이나 규율이나 억압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삶을 짓누르는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 아리랑과 함께 사랑과 기쁨을 마음껏 표출했다. 아리랑이 지닌 매력은 바로 이러한 은근과 끈기를 통한 현실의 극복에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여기에 상징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리랑 고개다. 아리랑 고개는 넘다가 힘에 부칠 때도 눈물을 흘리며 넘곤 했다. 아리랑 고개는 절망에서 희망의 세계로 넘어가는 고개이자 현실 극복의 상징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민요 가운데 아리랑만큼 온갖 시름을 다 담아낼 수 있는 큰 그릇이 없다는 사실은 음악적인 형식이나 오천여 수가 념는 가사의 내용을 눈여겨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아리라은 단순한 민요를 넘어 민족 저변에 깔린 정서의 가락이며 민족 동질성의 구체적 표현이다. 한국인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은 오늘도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하리랑은 오늘도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 그 탄생과 의미 아리랑의 기원 우리민족은 언제부터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을까. 흔히 아리랑의 역사가 수 천 년은 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문헌적 근거를 통해 드러나는 아리랑의 기원은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다. 조선시대 후기 천주교 신자였던 이승훈의 「만천유고」, '농부사' 에는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이 남아 있다.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 물론 이 말이 우리가 지금 부르는 민요 아리랑의 모태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아리랑과 비슷한 후렴구가 조선 후기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리랑' 은 1865년부터 시작된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 때 전국적인 민요가 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아리랑의 어원도 당시 경복궁 중수를 위해 발행한 원납전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던지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는 '한자들' 하고 탄식하며 읊조린 '아이롱' 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아리랑으로 변했거나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 라고 부른 아이랑이 민요에 붙어 전국으로 확산되어갔다는 데서 찾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전해 내려오는 아리랑은 무슨 뜻일까. 누구에게나 아리랑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으면 설왕설래 한다. 아리랑을 한민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노래로 여기면서도 그 뜻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구전되어온 민요의 기원을 알기란 불가능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아리랑' 은 다양한 분야에서 매혹적인 연구 대상이 되었다. 특히 아리랑의 뜻을 찾기 위해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문헌을 들추어 보았으며, 고어에서 찾아보았고, 비교언어학적으로 접근해 보았고, 전설이나 지명에서 찾아보기도 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아리랑의 의미를 풀어내려고 했으나 아직까지 어느 것 하나 설득력 있는 정설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아리랑의 뜻에 너무 집착을 하다 보니 옛 문헌이나 언어 속에서 보물찾기 식으로 아리랑과 비슷한 말을 찾아 유추해 구구한 설만 나오게 했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 그 탄생과 의미 지금까지 논의된 아리랑의 어원 가운데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01) 김지연의 알영 설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나타난 전설을 근거로 한 학설로 알영정과 알영천에서 유래된 박혁거세의 비 '알영' 의 덕을 찬미하는 것으로 이 말이 후에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02) 김재수의 아랑 설 밀양 아리랑의 배경이 되는 전설의 주인공 '아랑' 이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03) 김덕장의 아이랑 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1865~1872)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 라고 부른 아이랑에서 유추하고 있다. 04) 남도산의 아이롱 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발행한 원납전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은 그 소리에 귀가 멀 정도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는 [한자] 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는데, 여기서 '아이롱' 이 변해 아리랑이 되었다고 한다. 05) 강대호의 아난리 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부역민들이 쉬지도 못하고 혹사당하자 자탄조로 ‘한자’ 라고 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시기에도 부역민들이 이를 모방해 “나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다" 는 뜻인 ‘한자’ 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아난이’ 가 후에 '아라리' 로 되었다고 한다. 06) 권상노의 아이롱 설 한일강제병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서 대항하지 말고 차라리 그들의 만행을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못본 척 하라는 '아이롱' 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 그 탄생과 의미 07) 일본인 학자의 아미일영 설 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 는 풍요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08) 이능화의 이랑위 설 옛날부터 가옥을 신축할 때 상량문에 '아랑위' 란 SS 검은 글씨로 쓴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상운의 설을 이능화가 소개한 것이다. 09) 양주동의 아리령 설 아리랑을 고유어와 한자의 혼합적 해석을 통해 규명한 설로, '광명(붉)을 찾아옴’ 에서 연유한 고개를 '아리령' 이라고 밝히고 아리ㆍ어리ㆍ오리 ㆍ우리에 관한 지명을 전국적으로 분포된 고개로 대동여지도에서 찾아 문헌적으로 고증하고 있다. 10) 이병도의 낙랑 설 역사적 사실에 의한 유추설로 낙랑에서 남하하는 교통로의 관문인 자비령 이름을 '아라' 로 보고 있다. 역사적 변동기에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넘던 고개를 낙랑과 진번의 경계선인 자비령으로 생각해 낙랑-자비령-아리령 관계를 정립시킨 것이다, 11) 최재억의 알랑 설 알랑 설은 고어에 의한 유추적인 방법으로 동남, 동녀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 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심지어 인도의 신인 '아리람 쓰리람' 신에서 나왔다는 설, 중국어에서 나왔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 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구구한 설명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아리랑의 어원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리랑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아리랑의 종류만큼이나 많다. 아리랑의 어원을 찾고자하는 다양한 접근은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시대에 따른 아리랑의 변천과정 2. 시대에 따른 아리랑의 변천과정
시대에 따른 아리랑의 변천과정 구한말 일반적으로 '아리랑' 은 1865년부터 시작된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 때 전국적인 민요가 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아리랑의 어원도 당시 경복궁 중수를 위해 발행한 원납전 의 강제 유통으로 인해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던지 “내 귀가 먹어서 원납전 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는 '한자' 하고 탄식하며 읊조린 '아이롱' 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아리랑으로 변했거나, 전국에서 선발된 부역꾼들이 고향을 떠난 외로움과 사랑하는 아내, 연인과 떨어져 있음을 한탄하면서 “나는 님을 이별하네" 라고 부른 아이랑이 민요에 붙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는 데서 찾기도 한다. [사진] 1890년대 경복궁 앞 거리 19세기 후반부터 아리랑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1894년 일본 「유우빈호우치신분 」,에는 '조선의 유행요' 라는 제목으로 아리랑 가사와 해설이 실려 있다. 이 신문에는 노랫말과 함께 “산간벽지의 아이들이나 포구의 아이들까지도 입에 담고 있다” 고 했다.
시대에 따른 아리랑의 변천과정 [사진2]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서양식 악보로 만든 아리랑(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1896년 당시 선교사로 활동하던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는 _책에 ‘Korea Vocal Music'이란 제목으로 아리랑 영문 가사와 아리랑을 담았다. 이 악보의 끝에는 아리랑이 1883년부터 대중적인 애호를 받게 되었으며, 제각각 다른 내용이지만 후렴은 변하지 않고 쓰인다고 해설을 덧붙여 놓았다. 1900년 황현이 펴낸 「매천야록」에는 아리랑이 궁 안에서까지 불렸다는 기록도 나온다. “Korea Vocal Music“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대궐을 침범한 때는 1894년 6월 21일이다. 이 사실로 볼 때 아리랑은 SHES) 기록에서처럼 1883년부터 1894년까지 서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민요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헐버트와 황현이 기록한 이 무렵의 아리랑은 우리가 지금 흔히 부르고 블을 수 있는 아리랑과는 음악적으로 다르다. 할버트는 이를 'Ararung' 이라고 표기했으며, 음악적으로는 '구아리랑' 이라고 한다. "고종은 밤만 되면 전등을 켜 놓고 배우들을 불러 새로운 노래 를 부르라고 했다. 이번 곡은 '아리랑타령' 이라고 했다. 이 타령이란 말은 곡조를 길게 배는 것을 세 속에서 일컫는 말이다. 민영주는 배우들을 거느리 고 오직 아리랑타령만 전담하고 있으면서 그 우열을 논하여 ... 금은으로 상을 주었다. 이 놀이는 오토리 게이스케가 대궐을 침범한 후에 중지 되었다." - 매천야록 -
시대에 따른 아리랑의 변천과정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에 아리랑은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일제의 조선총독부 청사 준공 기념식이 열리던 날인 1926년 10월 1일 서울 종로 단성사에서 개봉한 무성영화 「아리랑」때문이었다. 나운규가 감독ㆍ주연을 맡은 영화 「아리랑」은 '아리랑' 을 주제가로 하고 있었다. 이 때의 아리랑은 구한말의 '구아리랑' 과는 달리 나운규가 편곡한 '신아리랑' 이었다. 이 노래가 영화와 함께 흥행에 성공함에 따라 우리 민족에게 아리랑을 알리는 큰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영화 주제가 아리랑이 불온한 가사를 담고 있다는 이유로 개봉 첫날부터 선전 전단지를 압수하였으며, 나중에는 아리랑 SP(Standard Play) 음반까지도 판매 금지시켰다. [사진3] 춘사 나운규 (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영화 「아리랑」은 무려 2년 6개월 동안이나 전국 곳곳을 순회 상연하면서 영화 붐을 일으켰고, 주제가 "아리랑 도 일제 치하의 고단함을 달래는 가장 대표적인 노래로 자리매김 하였다. 아리랑이 유명해지자 '밀양아리랑' 이나 '진도아리랑' 과 같은 신민요가 나타났고, '아리랑 낭낭', '강남아리랑'등의 유행가도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했다. 저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풍자와 해학이 깃든 노래들이 지속적으로 샘겨났다. 일제의 수탈을 피해 중국과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은 디아스포라의 삶 속에서도 이러한 아리랑의 전파자가 되어 머무는 곳곳에 팔도아리랑의 씨앗을 뿌리기도 했다. 1930년대 들어 아리랑의 양상은 다양해졌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신문은 80~90%에 달했던 문맹을 없애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려는 계몽운동이자 항일운동 차원에서 대대적인 한글 보급 운동을 펼쳤다. 1931년 1월 7일자 조선일보에는 문자보급가 공모에 가작으로 당선됐던 박봉준 작사, 김형준 편곡의 '문자보급가' 가 '제2유행 아리랑' 이라는 부제로 실렸다. 3절로 이뤄진 이 노래의 후렴은 “아리랑 고개는 별고개라 / 이세상 문맹은 못넘기네” 로 끝나 1930년대 아리랑을 통해 문맹퇴치를 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한편, 아리랑의 인기가 높지 일제가 이를 악용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만주땅의 황무지개간을 위해 만주이주를 독려하는 '만주아리랑'을 만들었던 것이다.
시대에 따른 아리랑의 변천과정 아리랑은 그 특유의 서정적인 멜로디로 일본에서도 빠르게 스며들었다. 1931년부터 일본 콜롬비아, 폴리도로, 기린, 다이헤이, 데이치쿠레코드 등의 회사에서는 아리랑을 담은 SP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조선에 유성기를 판매할 목적으로 조선 가수나 소리꾼들이 취입한 음반과는 달리 1931년 고바야시치오코를 시작으로 요코타료이치 등 대부분 일본 가수들이 부른 아리랑 SP 음반은 1930년대에만 24종이나 나왔다. [사진4] 일제시대 아리랑을 담은 엽서 봉투 (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시대에 따른 아리랑의 변천과정 중년층을 중심으로 아리랑이 유행하자 조선 관광 엽서에도 아리랑이 담겨졌다. '아리랑의 정서’ , '아리랑의 노래' 라는 이름으로 8장씩 한 세트로 된 아리랑 엽서는 채색과 단색 등 무려 7종류로 56장이나 나왔다. 그 가운데 일부는 기생을 배경으로 아리랑을 담아 아리랑이 마치 기생의 노래인 듯 왜곡되기도 했다. 1930년대 중반 일제는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 등 자신들이 AE 전쟁을 미화하기 위해 비상시 아리랑' 을 급조해서 유포하기도 했다. 이 무렵 만주 땅의 통포들은 나라를 잃고 유랑하는 설움을 아리랑으로 달랬고, 잃어버린 조국을 찾자며 '독립군 아리랑' 이나 '광복군 아리랑' 을 불렀다. 무장 투쟁의 와중에 아리랑을 주제로 한 가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사진5] 님 웨일즈의 아리랑 (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반면에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들은 스탈린의 탄압으로 2,500명의 지도자가 총살되고 17만 여 명이 중앙아시아 등지로 강제이주 당하는 민족의 비운을 아리랑에 구구절절 묻어야만 했다. 1940년대 들어 아리랑은 민족말살정치의 희생 대상이었다. 일제가 창씨개명 강요와 조선어교육 폐지, 내선일체 등 민족말살정치를 행함에 따라 아리랑은 침체기를 맞기도 했으나 항일투쟁의 본산인 중국 만주에서는 '기쁨의 아리랑' 과 '새아리랑' 등이 창작되었다. 피눈물과 탄식의 아리랑 고개를 넘 일제를 쳐부수고 승리의 고개를 넘어 온다는 내용이다. 독립운동가 김산의 짧지만 굵은 생애를 님 웨일즈(Nym Walse)가 「Song of Ariran」 으로 출간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시대에 따른 아리랑의 변천과정 광복이후 6.25전쟁기 1945년 광복 이후 아리랑은 좌우 대립과 극도의 혼란 속에서 뿌리를 내렸다. 일제 통치의 암흑 속에서 슬픔과 TMS 담아내던 아리랑은 떠나간 임을 그리는 사랑의 노래로 외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에게 선물하는 실크 손수건에는 아리랑의 정서를 담은 그림과 영어로 쓴 아리랑 가사가 담겼는가 하면 한국을 찾은 기자들은 한국을 소개하면서 아리랑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1950년 6.25전쟁은 우리민요 아리랑이 입에서 입으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해외 언론은 매일 6.25전쟁 AAS 알렸다. [사진6| 광복 이후 제작된 아리랑 손수건 (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전쟁이 유엔군으로 참전한 군인들에게 아리랑은 귀 익은 노래였다. 포연 속에서 틈틈이 듣던 노래가 아리랑이다 보니 기념품으로 아리랑이 새겨진 스카프, 손수건, 라이터, 인형도 나왔다. 그 가운데 용이 휘감은 한국 지도에 참전국가 깃발이 둘러쳐진 모습, 우리나라 지도를 중심으로 색동옷을 입은 가족과 농사국가지본이라는 깃발 아래 춤추는 흥겨운 모습에 아리랑 악보와 가사가 ‘ARIRANG SONG’ 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스카프가 귀국 MSE 인기를 끌었다. 6.25전쟁 통에 톡톡한 재미를 본 일본에서는 참전 군인들이 일본을 거쳐 귀국하게 되자 유성기음반 세트 속에 마치 아리랑이 일본 민요인 양 끼워 넣어 판매하기도 하였다. [사진7] 6.25전쟁 당시 아리랑 스카프 (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시대에 따른 아리랑의 변천과정 태평양을 건너간 아리랑은 1950년대 모던 포크 운동의 여파 속에 미국에서 급격히 퍼져 나갔고,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멜로디로 못사람들 가슴 깊이 자리 잡았다. 그 중심에는 오스카 페티포드(Oscar Pettiford)처럼 위문 공연차 한국에 왔다가 듣게 된 아리랑을 '아디동 블르스(Ah De Dong Blues)라는 재즈로 만들어 1952년 SP음반으로 낸 연주자가 있었다. 또한 엘리 윌리엄즈(Elly Williams)처럼 UP 통신사 기자인 스탠리 리치(Stanley Rich)가 수첩에 기록한 아리랑을 부르고 1954년 EP(Extended Play, 도넛판)에 담아 발매 일주일 만에 '이주의 앨범’ 으로 선정된 가수도 있었다. 당시 엘리 윌리엄즈는 아리랑을 '2,500만 한국인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는 노래' 라고 소개했다. 1951년 경기도 포천과 의정부 지역에서 보병으로 참전했던 가수 피트 시거(Pete Seeger)와 위문공연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아리랑을 듣고 그 선율에 감동한 가수 낫 킹 콜(Nat King Cole)등도 훗날 아리랑을 널리 알렸다. 특히 영국계 미국 가수로 한국에서 복무한 피트 시거가 반소(banjo)를 연주하며 부른 노래 ‘Ariran’ 은 1957년 미국 스틴손(Stinson)레코드에서 10인치 음반으로 발매되고, 독일과 영국에서도 출반되어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피트 시거는 “민요에는 민족을 하나로 묶는 힘이 있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당시 나온 음반에는 그가 아리랑을 부르기 전 아리랑의 역사와 배경에 대해 짧게 소개하고 있다. “한국에는 다양한 멜로디의 아리랑이 있다” 고 운을 뗀 그는 “일본이 지배할 때는 이 노래를 금지하기도 했지만 지금 남북이 분단되어 있어도 남한과 북한이 함께 부르는 노래다” 라고 했다. 피트 시거는 아리랑을 남북이 하나 되는 상징적인 노래로 보았고, 아리랑을 부르는 한 분단국가가 아니라고 했다. [사진8] 1950년대 피트 시거의 음반 (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시대에 따른 아리랑의 변천과정 1950년대 후반 이후 현재까지 6.25 전쟁이 끝난 후 암울했던 시절, 김옥심ㆍ 이은주 등의 명창들은 구성진 목소리의 아리랑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달래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이 무렵 '아리랑' 이라는 제목을 단 대중잡지도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의 감정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민요 아리랑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부터는 단순한 민요를 넘어서 시위가요로 성격이 바뀌기도 했다. 가사 내용은 투쟁에 걸맞지는 않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알고 있다 보니 아리랑은 운동권 가사처럼 저항가와 쟁의가로 불렸다. [사진9] 1955년 창간된 대중잡지 '아리랑' (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가사 내용은 투쟁에 걸맞지는 않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알고 있다 보니 아리랑은 운동권 가사처럼 저항가와 쟁의가로 불렸다. 1968년 ‘Love is blue‘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프랑스의 폴모리아(Paul Mauriat) 악단은 일본에서 '아리랑' 이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내기도 했다. 매혹적인 연주로 유명한 그는 "아리랑 을 ‘Eastern Love Song‘ 이라고 했다. 지역에서도 저마다 아리랑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1971년 12월 정선아리랑이 강원도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었고 곧이어 아리랑제를 열기 시작했다. 이 무렵 무관심과 홀대 속에 사라져간 아리랑도 한 둘이 아니었다.
시대에 따른 아리랑의 변천과정 [동영상2] 제2회 아리랑축제(1989) [동영상2] 제2회 아리랑축제(1989) 1980년대 들어 아리랑은 매스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급속히 확산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경기에서 공식 음악으로 선정된 아리랑은 선수 입장식 때나 시상식 때 연주되어 지구촌 곳곳 안방에까지 울려 퍼졌고, 손에 손을 잡고 석별의 정을 나눈 MSA! 때는 아리랑에 담긴 아름다운 한국의 정서를 한껏 드러냈다, 1990년대 들어서는 탁구, 축구 등의 국제 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의 응원가로 불려지면서 체제와 이념의 두터운 벽을 훌쩍 뛰어 넘는 노래가 되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 이후 아리랑은 세계인의 멜로디, 한국의 상징적인 노래로 세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되었다. 민족의 고난이나 복받쳐 오르는 슬픔 속에서도 잊지 않은 노라, 언제나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며 힘의 원천이 된 노래 아리랑은 70여 종, 5천 수가 넘는 가사를 낳은 삶의 기록이다. 그리고 오늘도 진솔한 삶을 기록하며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3.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국내의 아리랑 아리랑은 지역마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전승된다. 각 지역의 지역명이 붙은 아리랑은 그 지역의 문화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노래로 존재한다. 민요 아리랑은 아리랑이라는 노랫말이 후렴에 들어있는 민요의 총칭으로 남북을 통틀어 약 70여 종 5 천여 수에 이른다. 우리나라에는 평안도에 <서도 아리랑>, 강원도에 <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 <평창아리랑><고성아리랑>, 함경도에 <함경도아리랑> <단천아리랑>, 경상도에 <밀양아리랑> <영천아리랑><경상도아리랑 <문경새재아리랑>, 전라도에 <진도아리랑>, 경기도에는 <긴아리랑>등이 있다. [문서1] 「아리랑 악보 및 녹음테이프 검토의뢰 (문화체육관광부, 1991) 」 중 'US 아리랑의 각 지방 분포도'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동명상3] 원각사 개관 기념공연 중 아리랑(1959) [동명상3] 원각사 개관 기념공연 중 아리랑(1959) 지역에서 전승되는 아리랑은 크게 전문가 집단에 의해 전승되는 아리랑과 일반인들이 생활 속에서 부르는 아리랑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각 지역마다 독특한 정서를 담은 아리랑은 공연, 전시, 문학 등 다양한 장르에서 문화 콘텐츠로 활용되고 있으며, 그 지역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축제나 행사 등에서 빛을 발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아리랑 가운데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을 흔히 3대 아리랑으로 평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아리랑 가운데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미량아리랑을 흔히 3대 아리랑으로 평가하고 있다.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동영상4] '내 강산 좋을 시고' 중 정선아리랑(1957) 1)정선아리랑 정선아리랑은 우리나라 아리랑 가운데 전승 보전이 가장 잘되고 있는 아리랑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정선아라리' 라고도 하는 정선아리랑의 기원은 고려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의 창업에 반대해 개성 두문동에 은거한 72현 가운데 일곱 명의 신하가 송도에서 지금의 정선 거칠현동으로 들어와 살면서 그들의 심정을 한시로 지어 부른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정선아리랑의 정립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문헌적인 근거는 확실치 않다. 정선아리랑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일제강점기이다. 1930년 「조선」 6월호에 김지연이 민요아리랑을 논하면서 다른 민요와 함께 정선아리랑 가사를 소개한 것이 현재까지 문헌으로 드러난 최초의 정선아리랑이다. 그 후 개벽사에서 나온 「별건곤」 에 차상잔이 '정선구아리랑' 이라는 이름으로 가사 6수를 소개했고, 이어 「동아일보」 1937년 11월 21일자에도 강릉에서 염근수가 채록한 '정선어러리' 를 소개하고 있다. [동영상4] '내 강산 좋을 시고' 중 정선아리랑(1957)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오래 전부터 두메산골 정선 사람들은 하루하루 고달프고 쓸쓸한 삶을 정선아리랑 가락에 담아 풀어나갔다. 산비탈에서의 노동의 고통, 첩첩 산골에 묻혀 사는 설움, 시집살이에 대한 버거움, 어리거나 늙은 남편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 등을 구성진 가락으로 불렀고, 잔치와 같은 유희의 공간에서는 풍자와 해학으로 달래며 살아 왔다. 정선아리랑이 오랫동안 구전되면서도 명맥을 잘 이어가는 데는 노래가 이곳 사람들의 정서와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음악적으로도 최고음과 최저음의 폭이 그다지 크지 않고 선율이 늘어지면서 단조로워 누구나 귀 익으면 즉흥적으로 가사를 만들어 무한정 붙일 수 있다. 게다가 가사 자체가 두 줄로 비교적 짧다는 점은 부르는 이들이 쉽게 단어를 바꿔가며 가사를 즉흥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게 했다.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가사에 토씨를 바꾸고 단어를 바꿔가며 제 나름대로 만들어 부르다 보니 정선 사람들도 정선아리랑을 “찍어다 붙이면 되는 소리“라고 한다. 명확한 음계와 가사를 기본으로 하는 서양 음악과는 달리 정선아리랑은 가사 중심의 노래이다. 숱한 세월을 거쳐 오는 동안 시시때때로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가사는 지금 채록된 것만 해도 3천여 수가 넘을 정도로 방대하다. [간행물1] 「민요 이렇게 가르치면 제맛이 나요(국립국악원, 1997)」 중 '정선아라리' 악보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정선아리랑은 '긴 아리랑' 과 '엮음 아리랑' 으로 구성되어 있다, 긴 아리랑을 정선에서 듣는 일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처음 만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소리를 청하면 누구나 못한다고 마다하지만 부르기 시작하면 구구절절 한도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진다. 흔히 정선아리랑의 후렴(Refrain)으로 생각하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는 가사 뒤에 일정하게 따라붙지는 않는다. 소리를 둘이서 메기고 받다가, 또는 여럿이 한마디씩 돌아가며 부르다가 자기 순서가 되어 갑자기 가사가 막힐 경우 노래판을 깨지 않기 위해 모두가 함께 부르며 어울리는 소리였다. 긴 아리랑 가사에 다 담지 못하는 삶의 응어리는 사설을 이야기하듯 촘촘하게 엮는 '엮음 아리랑'으로 불렀다. “우리집의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얽어매고 찍어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노가지나무 지게위에 엽전석냥 걸머지고 강릉 삼척에 소금 사러 가셨는데 백복령 굽이굽이 부디 잘 다녀오세요” 앞부분은 사설로 가사를 촘촘 엮어가다가 뒤에서는 다시 긴 아리랑 가락으로 부르는 엮음 아리랑은 서양음악 장르인 랩(Rap) 유사하다. 엮음아리랑은 긴아리랑으로 풀어내지 못하는 삶의 해학과 흥겨움을 갖추고 있다. 정선아리랑은 오랜 세월을 두고 자연스럽게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갔다. 출가한 남녀, 소리꾼, 장돌뱅이, 화전민, 떼꾼 등등 사람의 이동은 정선아리랑을 자연스럽게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사진10]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정선아리랑(1978)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입에서 입으로 소리가 퍼져 가면서 가락과 가사는 그곳의 문화적인 특성이 더해져 또 다른 이름의 아리랑을 낳았다. 강원도에만 해도 평창아리랑, 태백아라레이, 횡성어러리 등은 정선아리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남한강 물길의 단양 띠뱃노래, 경기도의 여주 아리랑, 경상도의 문경새재아리랑, 영해 별신굿아리랑, 구미아리랑 등의 가락과 가사는 정선아리랑과 같거나 닮은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정선아리랑은 1971년 12월 16일에는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선에서는 정선아리랑을 발전시키기 위해 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정선아리랑을 LP음반으로 제작하고, 가사집 발간과 테이프, CD 등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정선아리랑을 방방곡곡에 알렸다. 정선아리랑의 전승보전을 위해 지난 1976년부터 개최한 정선아리랑제도 어느덧 30년이 넘어섰다. 1970년부터 정선군에서 정선 군민들의 애정과 끈기로 인해 탄탄하고 확고한 전승 기반을 다진 것이다. 정선아리랑은 해외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해마다 많은 일본 고교생들이 국제체험학습지로 정선을 찾아와 정선아리랑을 배우고 있다. 정선아리랑학교에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 미주 등 전 세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아리랑 프로그램을 개최해 정선아리랑의 맛과 멋을 세계 속에 심어가고 있다. [사진11] 정선아리랑을 배우는 일본 호소다 고등학교 학생들 (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정선에서는 현재 명예기능보유자, 기능보유자, 전수조교, 전수교육 이수자, 전수장학생과 많은 전수생들이 정선아리랑전수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전승활동을 펴고 있다. 정선아리랑의 체계적인 연구와 교육을 위해 정선아리랑연구소, 정선아리랑학교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 밀양아리랑 동부지방 민요의 한 축을 이루는 밀양아리랑은 빠른 장단이 많이 쓰여 경쾌하고 흥겨운 민요이다. 흔히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로 시작하는 밀양 아리랑 가락에는 힘찬 세마치장단의 경쾌함이 질게 깔려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씨구 아라리가 났네” 하지만 밀양아리랑은 그 흥겨움에 반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설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옛날 조선 명종 때 밀양 부사에게 아랑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한 관노가 아랑의 미모에 반해 사모하게 되었다. 어느 날 이 관노가 침모를 시켜 아랑을 영남루로 유인했다. 아랑이 루에 올라 달빛에 취해 있을 때 그 관노가 나타나 사랑을 고백하고 말을 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을 했다. 하지만 아랑이 저항을 하자 칼로 찔러 살해하고 암매장해 버렸다. 딸을 찾지 못한 부사가 서울로 올라가고 난 후부터 사로 부임하는 부사가 원인 모르게 급사하는 일이 되풀이 되었다. 그러다가 담력이 큰 부사가 부임하여 아랑귀신을 만나 자초지종을 알게 되고 죄인을 찾아 처벌하여 아랑의 원한을 달래 주었다는 이야기다. 아랑의 정절을 기려 밀양의 부녀들이 부르던 노래가 “아랑가” 였는데, 그것이 변하여 밀양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동영상5] '밀양아랑제' 대한뉴스 제417호(1964) [동영상5] '밀양아랑제' 대한뉴스 제417호(1964) 그러나 밀양아리랑은 밀양이라는 특정 지역의 생활공동체를 중심으로 전승되는 토속적인 아리랑이라기 보다는 1910년 경에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 밀양의 풍류객이던 박남포 주변의 음악가들이 1910년 경 잡가로 불리던 아리랑을 경상도 소리 풍으로 변주해 화류계에 퍼뜨린 노래라고 한다. 이 노래가 때중가요의 황금시대인 1930년대부터 전국화 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힘찬 세마치장단의 경쾌한 가락과 유흥적인 노랫말의 밀양아리랑은 북한과 중국, 일본에도 광범위하게 퍼진 민요가 되었다. 흥겨운 가락의 특성상 흥을 돋우는 ROME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노래이며, 북한과 중국, 일본 재일동포들의 교과서에도 아리랑 하면 빠지지 않고 실리는 노래가 되었다. 밀양시에서는 밀양아리랑을 지역 대표 브랜드로 육성하고 있으며, 다양한 무형문화유산과 접목과 문화컨텐츠 개발을 위해 아리랑 보존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동영상6] '내 강산 좋을 시고' 중 밀양아리랑(1957) 밀양아리랑이 단순한 민요에서 벗어나 광범위하게 전승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경쾌한 가락의 신명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락이 경쾌하다보니 밀양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북만주 일대를 근거로 한 독립군들이 가사를 바꿔 '광복군 아리랑' 으로 부르기도 했다. 지금도 밀양아리랑은 밀양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경상도 출신의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흑룡강성 일대는 물론 연변 지역과 심양 지역에서 널리 불리고 있으며, 연변대학 민족음악학부 등에서 가르치는 아리랑이다. 지역적인 특성을 갖는 아리랑이 쇠퇴하는 것과는 달리 대중 속에 파고들었다, 경남 밀양에서는 밀양아리랑의 근원 설화인 아랑의 넋을 추모하는 아랑제가 매년 음력 4월 16일에 열리고 있다, 근래 들어 밀양시에서도 밀양아리랑을 지역 대표 브랜드로 육성하고 있으며, 다양한 무형문화유산과 접목된 문화컨텐츠 개발을 위해 아리랑 보존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동영상6] '내 강산 좋을 시고' 중 밀양아리랑(1957)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간행물2] 「민요 이렇게 가르치면 제맛이 나요 (국립국악원, 1997)」중 '밀양아리' 악보 [사진12] 아랑사 전경(1965) [사진13] 아랑제 제14회 개막식(1971)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사진14| 제20회 밀양아랑제(1077) [사진15] 제20회 밀양아랑제(1977) 3) 진도아리랑 민요는 보통 음악구조가 단순하고 가락이 서정적이지만 판소리와 산조를 키워낸 남도의 진도 아리랑은 특유의 장중한 맛을 낸다. 진도 아리랑이 주는 정서의 농도와 예술적인 정취는 이미 2백만 관객이 넘게 관람을 한 영화 '서편제' 에서도 잘 드러난 바 있다. 전라도의 산과 들을 배경으로 아버지와 딸과 아들이 장구치고 춤추며 부르던 진도아리랑은 많은 아리랑 중에서 가락이 유연하고 마디마디 넘어가는 면에서 유려함을 느낄 수 있다. 또 표현하기 힘들 만큼의 묘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진도아리랑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유성기음반을 취입하기위해 일본으로 가는 김소희 명창과 동행하던 대금 명인 박종기 배안에서 남도아리량을 소재로 삼아 편곡한데서 진도아리랑이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을 지닌다. 김소희 명창이 일본에서 처음 취입한 음반이 '진도아리랑' 이라는 점은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간행물3] 「전남의 민요(전라남도, 1988)」 중 '진도아리량' 부분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문경새재는 왠 고갠가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난나"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사진16] 진도아리랑비(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진도아리랑은 3박자 세마치장단으로 슬프다 싶으면 한없이 슬프고 구성진 가락 같기도 하고, 멋스럽다 싶으면 한없이 흥겹게 느껴지는 가락이다. 그래서 슬픔에서 기쁨으로, 기쁨에서 슬픔으로 넘나드는 풍부한 인간 감정을 고루 담고 있는 민요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진도 아리랑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 느낌을 달리할 수 있는 무한한 융통성과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남 진도에서는 1985년부터 진도 아리랑타령 보존회가 구성되어 원형 보존 운동을 활발히 펴고 있다. 진도군은 진도아리랑을 향토무형유산 제1호로 지정하고 진도아리랑축제, 진도군립민속예술단 운영, 진도아리랑마을관광지 조성 등 진도아리랑을 남도민요의 대표로 전승 발전시키고 있다.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해외의 아리랑 18세기 중엽 이후 봉건사회의 모순과 기득권층의 횡포에서 벗어나고자 압록강ㆍ두만강을 건너 중국과 연해주 등지로 이주한 우리 핏줄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의든 타의든 일제의 수탈과 탄압을 피해 가족과 마을 단위로 만주땅에 정착해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일자리를 찾아 관부연락선에 몸을 싶기도 했다. 이들은 가급적 같은 고향에서 온 사람들끼리 마을을 이루고 고향 특유의 문화를 간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해방 이후 우리와는 다른 격변기 속에서 '조선족', '고려인', '재일동포' 라는 이름으로 억척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조선 민족이 모여 살던 마을은 와해되고 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흘어지기 시작했다. 삶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 ㆍ구전되어온 전통 민요 등 조선족 문화는 자생력을 점차 잃고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해외동포들은 이주초기부터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낙천적인 노래를 지어 부르고, 희망을 찾으려 했다. 이들에게 아리랑은 시대를 초월해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온 희망의 노래이기도 하다. 이주 1세대가 지켜온 전통민요 아리랑이 사라진 공간에는 귀향의식이 비교적 약한 이주 3세대와 4 세대의 새로운 가치관이 반영된 아리랑이 자리를 메웠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리랑은 오늘날까지 가극, 연극, 문학, 회화 등의 예술 장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넘쳐나고 있다. 해외 동포 아리랑은 이주 초기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비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산의 음악으로 우리 민족이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꽃을 피우는 특수성과 보편성을 드러냈다. 1) 중국 조선족 아리랑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 땅으로 이주한 우리 핏줄들이 있었다. 배고픔과 일제의 수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을 건넌 이들은 황무지에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나갔다.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세워진 뒤에는 조선종독부가 앞장서서 소작민들의 등을 떠밀기도 했다. 가난한 농민들이 대부분인 당시 이주민들이 가져간 것이라고 해야 보따리 한두 개 뿐 이었지만 그 속에는 자기가 살던 지역에서 귀담아 듣고 배운 민요 아리량도 있었다. 이주와 함께 전해진 아리랑은 우리외는 다른 토양 속에서 항일 저항가, 새로운 창작 가요로 뿌리를 내렸다.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사진17] 중국 연변에서 발행된 잡지 아리랑(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1958) 이주 1세대가 부른 아리랑은 입에서 입으로 후손들에게 전승되었다. <아리랑>을 비롯해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강원도아리랑> 등 고향의 노래는 잔치 때나 유희의 공간에서 빠지지 않는 노래였다. 항일투쟁의 근거지에서 아리랑은 일제를 타도하자는 내용과 고향과 조국을 그리는 내용 등 저항가로 뿌리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노래는 '독립군아리랑' 이나 '광복군아리랑' 에서처럼 기존 아리랑 가락에 반일과 저항의 정서를 담은 가사를 붙인 것들이었다. 아리랑은 오랜 세월 동안 전승되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창작되기 마련이다. 조선족 예술가들이 창작한 아리랑은 1950년대 이후부 최근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 종류만도 무려 50여 종에 이른다. 창작 아리랑의 가창 방식은 민요풍의 노래와 트로트 등 대중가요풍의 노래로 다양하다. 이들 가운데 <새아리랑>, <장백의 새아리랑>, <아리랑 연곡), <아리랑 정가>, <내 고향 아리랑 총각>, <연변아리랑>, <청도아리랑> 등은 시대적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주 1세대와 2세대가 세상을 떠나면서 많은 수의 아리랑도 차차 사라져갔다. 이들이 지켜온 전통민요 아리랑이 사라진 공간에는 귀향의식이 비교적 약한 이주 3세대와 4세대의 새로운 가치관이 반영된 아리랑이 음조와 음색, 창법이 변한 채 전승되며 자리를 메우게 되었다. 아리랑이 발전하면서 조선족의 정서는 가극과 연극, 문학, 드라마, 미술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끊이지 않고 나타나고 있다.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사진18] 조선족 가무극 천년아리랑(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아리랑을 통해 중국 조선족 예술의 위상을 드높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1991년 가극 「아리랑」과 2006년 대형음악무용시 「천년 아리랑」 이었다. 특히 2006년 9월 제3회 전국소수민족문예공연에 참가해 최고대상을 받은 연변가무단의 「천년 아리랑」 은 조선족의 삶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가무극으로 북경과 장춘 등 공연하는 곳곳마다 성황을 이루어 조선족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 「천년 아리랑」 이 강열한 인상을 심어주며 SSS 거두자 2007년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천년 아리랑」을 '가무의 고향' 연변의 관광브랜드로 삼고 경제사회발전전략의 하나로 추진하기 위해 '문화강주' 계획 속에 포함했다. 최근까지 논란이 된 중국의 아리랑 국가무형문화유산 지정도 실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최근 들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동북 3성에 주로 거주하던 190만 명의 조선족들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들 가운데 약 50만 명은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떠났고, 남아있는 조선족들은 중국의 경제발전에 따라 남쪽의 해남성까지 점차 분산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비율이 30%대로 떨어지면서 조선족자치주가 폐지된다는 조짐까지 나타났다. 조선족의 분산은 곧 아리랑의 전승 또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2) 러시아 고려인 아리랑 구한말 이후 국경을 넘고 만주 땅을 통해서, 또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러시아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들은 연해주와 사할린 등지에서 살다가 1937 년 9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스탈린은 강제 이주에 대한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한 달 전 지식인과 지도자 등 2천 5백여 BS 간첩혐의로 체포해 총살했고, 나머지 18만 명에 이르는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벌판으로 내몰았다. 이동 도중에 만 명이 넘게 객사했고,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말로 상상할 수 없는 가혹하고 참담한 삶이 요구되었다. 집도 없이 땅굴을 파고 거적을 씌워 추운 겨울을 난 고려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민족적 수모를 삭여가며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했다. [사진19] 러시아 신한촌 한인 어린이들(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고려인들은 강제이주 이후 아리랑에 대해 거의 침묵했다. 일반 창작 가요와는 달리 민족적인 특성이 진하게 드러나는 노래이기에 부르고 싶어도, 입안에서 맴돌아도 표출을 삼가야 했다. 강제이주를 경험한 고려인들은 아리랑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탄압을 받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강제이주 이후 자생적으로 생겨난 가요는 풍부한 데 반해 아리랑은 침체기나 다름없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아리랑의 전승 기반이 무너지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문학의 경우만 보더라도 1930년 ‘빠르라크아르랑이’ 이후 1970년 '치르치크 아리랑' 이 나올 때까지 아리랑을 주제로 하거나 소재로 삼은 작품이나 창작가요 등이 한 편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밖으로 아리랑을 삼갔을 뿐이지 망각과 외면으로 일관하지는 않았다. 스탈린 사망이후 북한과 한국을 통해 흘러 들어온 아리랑을 수용하면서 소인예술단과 가무단, 무용단을 중심으로 아리랑의 맥을 이어갔다. 우리의 정서외는 다른 공간 속에서 녹은 '고려인 아리랑' 은 다양성을 담은 또 하나의 줄기를 형성해 3세대와 4세대,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1992년 소련연방이 무너지고 러시아 등 각 민족별로 독립국가가 탄생하자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중양아시아에 불어 닥친 새로운 민족 차별과 불이익으로 고려인들은 뿔뿔이 흘어져 다시 이산의 길을 떠나거나 강제이주 전 모이살던 연하주로 재이주 했다 1993년 고려인들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고려인들의 고통은 계속되었다. 현재 고려인 사회에서 전승되는 아리량은 아리랑타령,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사할린의 아리랑 등 10여 종이다. 고려인의 아리랑은 중국 조선족의 아리랑처럼 다양하지는 않지만 노래와 문학 등을 통해 이산의 고통과 험난한 삶의 자취, 이민족의 설움 등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여정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사진20] 1953년부터 1974년까지 유주노사할린스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고려악단 단장 전두한씨와 부인 이병옥씨 (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사진21] 1950년대 일본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제작된 아리랑 음반 (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3) 일본에서의 아리랑 아리랑이 일본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90년대를 전후로 일본 외교관의 글과 신문 기사 등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아리랑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레코드 산업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이후 조선을 상품시장으로 여긴 일본 축음기 회사가 조선인의 유행가와 더불어 아리랑을 비롯한 민요 음반을 취입하면서 일본에서도 조선 노래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인 '아리랑' 의 인기가 지속되자 1930년 3월 빅타레코드사는 김연실(숲돌홀)이 부른 영화소패 '아르렁' 을 음반으로 제작해 발매하면서 조선에서 아리랑 음반 시대를 열었다. '아르렁' 음반은 、조선민요' 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었고, 일본에서 다양한 장르의 음반이 쏟아져 나오는 계기를 촉발했다. 일본에서는 1931년 7월에 가수 고바야시 치오코가 금색가면이라는 데뷔 명으로 부른 A 음반이 빅타레코드에서 나왔다. 이 음반이 기대 이상으로 팔려나가자 음반 회사들은 저마다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가수들을 찾아 나섰다. 이때부터 요코타 료이치, 아와야 노리코, 다카미네 미에코, 스가와라 쓰즈코 등 내로라하는 일본 가수들과 연주자들이 아리랑을 취입했다. 또한 조선에서 유명세를 타던 채규엽과 이난영도 각각 하세가와 이치로, 오카 난코 라는 일본 이름으로 음반 취입을 했고, 김용환, 박경희, 임동마 등이 부른 아리랑 음반도 일본에서 나왔다. 1930년 초반부터 1945년까지 '아리랑' 이라는 제목으로 40여종의 민요, 신민요, 가요, 연주곡 등의 음반이 일본에서 발매될 만큼 아리랑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다.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아리랑으로 촉발된 관심은 조선 문화 전반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조선 여행이 유행처럼 번져 음반과 책뿐만 아니라 아리랑이 엽서와 홍보물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 풍속, 기생의 사진이나 그림을 배경으로 아리랑을 담은 엽서만도 50여 종에 이르렀다. 한글과 일본어로 된 아리랑 가사가 실린 이 엽서는 1930년대에 일본에서 아리랑이 얼마나 크게 유행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영화와 음반을 통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아리랑이 있는가 하면 조선인 강제징용 강제노동으로 뿌리를 내린 아리랑도 있다. 식민지치하 조선에서 강제징용으로 일본 땅에 끌려온 조선의 노동자들이나 위안부들이 부른 애절한 정서의 아리랑도 일본인들에게 가사와 가락을 자연스럽게 심어 주었다. 징병과 징용으로 일본에 온 조선인들은 그들의 슬픔을 아리랑으로 달랬고, 일본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귀에 익은 멜로디이자 흥얼거리는 노래가 되기도 했다. [사진22] 동오사카 조선중급학교 학생들이 아리랑을 연주하는 모습(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아리랑의 지역별 분포와 특성 해방 후 6.25전쟁 시기 유엔군의 보급 기지로 산업 전반에 걸쳐 특수를 누리면서 일본에서는 다양한 아리랑 SP음반이 상품으로 나왔다. 일본의 음반 제작자들은 유엔군들의 기호에 맞춰 맞춤형 음반을 제작해 판매했다. 참전 군인들이 한국에서 들은 아리랑을 ‘아디동’ 이나 ‘오디동’ 으로 발음하자 음반 레이블에 '오디동(O Dee Dong)’ 이라는 부제를 달거나 아예 영어로 부른 ‘The Song of Ari— rang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1950년대 이후 일본에서의 아리랑은 민단과 조총련을 중심으로 한 아리랑, 일본 가수들이 부르는 아리랑, 한국과 북한에서 SHE 아리랑 등이 경쟁적으로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한 시기였다. 시대를 달리한 지금도 일본에서는 아리랑이 대중가요나 연주곡으로 끊임없이 창작되고 있다. 아라이 에이치 등 일본에서 태어나 활동하는 가수들도 자신이 창작한 가요에 '아리랑' 의 정서를 담아 부르고 있다. 이들 외에도 1980년대 이후 아리랑이 일본에서 트로트, 록, 재즈 등으로 창작되어 연주된 사례는 일일이 다 찾아 거론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또 아리랑은 ‘아리랑 막걸리’ 나 ‘아리랑 라면’ 처럼 생활 속에서도 한국의 상징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에는 아리랑이 생명을 잃지 않고 꾸준히 이어지며 재일동포들은 물론 일본인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4. 생활속에 깃든 아리랑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기념품류 1930년대부터 그림과 사진을 배경으로 아리랑 노랫말이 담긴 엽서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유통되었다. 여덟 장이 한 MES 구성된 아리랑 AME 모두 9종이다. 이 엽서는 일본 요코하마 다이쇼사진공예소와 경성 히노데상행 등에서 제작해 30~40엔 정도의 가격으로 팔렸다. 봉투만 보더라도 <아리 랑정서>, <아리랑의 노래>, <아리랑 타령> 등으로 다양하다. 아이를 업은 딸과 더불어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의 모습, 벽에 기대선 채 누군가를 기다리듯 상념에 잠긴 여인, 한복을 입고 기타를 치는 여인의 모습이다. 아리랑 엽서 9.6cm × 15cm 정선아리랑연구소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아리랑 가사가 인쇄된 실크 손수건 26.8cm X 26.2cm, 정선아리랑연구소 해방 후인 194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주둔한 UN군에게 선물한 손수건이다 고개를 넘어가는 남자를 손수건을 흔들며 배웅하는 여인의 그림과 그네를 타는 여인의 그림을 배경으로 각각 Korean Ballad Arirang과 Arirang 이 적혀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를 한글 발음 그대로 영어로 적어놓았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아리랑 스카프 57cm×57cm / 정선아리랑연구소 6.25전쟁 때인 1951년 전쟁 기념품(Korean War Souvenir) 으로 만든 스카프다. 6.25전쟁에 HAS! 유엔 참전국 군인들에게 추수감사절을 즈음해 선물한 이 직물 스카프에는 우리나라 지도와 함께 참전국가의 국기와 부대 마크, 그 사이에 아리랑 약보와 가사가 ARIRANG SONG 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우리나라 지도를 배경으로 포효하는 모습과 국기 등 실크를 Ane 한 직물에 그려진 그림도 매우 화려하다. 이 스카프는 1951년 아리랑 악보와 가사가 없는 동일 종류의 스카프 도안을 바탕으로 1953년까지 부대 마크 등 약간씩 변경된 디자인으로 계속 나와 가장 일반적인 아리랑 스카프 로 알려져 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아리랑 스카프 56.3cm×57cm/정선아리랑연구소 6.25전쟁이 한창인 1951년 처음 제작한 실크 스카프다. 아리랑이 영문으로 기록된 스카프는 미국 아리조나주에 사는 제임스 존슨(James Johnson)0| 26 세이던 1951년 6.25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어머니를 위한 선물로 구입했던 것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아리랑 스카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전쟁 당시 격전이 펼쳐진 지형이 표시된 우리나라 지도를 중심으로 색동옷을 입은 가족과 농사국가지본이라는 깃발 아래 흥겨운 모습 등 우리나라 풍습이 양쪽으로 담긴 이 스카프 위쪽에는 아리랑(Arirang)이 영문으로 번역되어 악보와 함께 실려 있다. 1절만 기록된 아리랑 가사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를 ‘A ri rang hign hill | climb'라고 적었고,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를 "You will sick on your toot before you go ten miles"로 표기하고 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아리랑 미니 꽃병 7.2cm×7cm/정선아리랑연구소 6.25전쟁 당시 유엔군들이 기념품으로 구입한 장식용 미니 꽃병이다.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의 그림과 아기를 업고 가는 여인의 그림을 배경으로 아리랑이라는 글씨가 한글과 영어로 적혀 있다. 참전 유엔군들이 한국에서 듣던 아리랑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본국으로 돌아갈 때 구입하는 인기가 높은 기념품이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아리랑 재떨이 16cm×6cm/정선아리랑연구소 6.25전쟁 당시 유엔군들이 귀국할 때 참전 기념품으로 구입한 놋쇠로 만둔 재떨이다. 우리나라 지도에 '아리랑' 이라는 글씨를 한글과 영어, 일어로 양각을 해 놓고 테두리에 아리랑 춤을 추는 여인의 모습을 새겨 놓았다. 조형미가 뛰어난 재떨이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아리랑 뮤직박스 자개앨범 39cm×29cm/정선아리랑연구소 1950년 초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 8사단 군인이 한국을 떠나며 기념품으로 사 갔던 사진앨범이다. 조개껍질을 재료로 원앙 장식을 붙인 이 자개 앨범에는 두툼한 앞표지 안쪽에 Ariran 이라고 쓴 뮤직 박스가 들어있다. 태엽을 돌렸다가 놓으면 맑은 아리랑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들이 기억하는 한국의 노래 아리랑(ariran)이 앨범에 까지 뮤직 박스로 달려있는 매우 귀한 자료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간행물류 Song of Ariran 15cm×22.3cm/정선아리랑연구소 1941년 미국 뉴욕에서 발간된 초판본이다. 표지(Dust Jacket)가 그대로 살아 있는 매우 희귀한 책으로 1937년 신문기자인 님 웨일즈(Nym) Walse)가 조선인 혁명가 이자 사상가, 무정부주의자 김산을 만나 3개월 간 20회의 구술을 통해 신비와 고뇌에 찬 김산의 짧지만 굵은 생애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님 웨일즈가 남편 에드가 스노(Edgar Snow))와 함께 중국 연경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친하게 지낸 펄벅(Pearl Buck)의 남편 리처드 월시(Richard Walsh)가 운영하는 뉴욕의 존데이(John Day) 출판사에서 초판으로 발행되었으나 초판의 판매 부진으로 이내 절판이 되고 말았다. 이 책 이후 1972년에 와서야 비로소 31년 만에 개정 초판이 미국 뉴욕에 있는 램파트(Ramparts)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LIFT EVERY VOICE 9.5cm×17cm/96쪽/정선아리랑연구소 1947년 미국 테네시주의 내슈빌 감리교회(Nashville Methodist Church)에서 펴낸 노래책이다. 찬송가와 크리스마스 노래, 흑인영가, 민요 등 113곡이 약보와 함께 실린 이 노래책에는 민요 아리랑이 'Ahrirang' 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Folk Songs of Korea 21.5cm×27.8cm/28쪽/정선아리랑연구소 1950년 미국 아이오와수 Dobuque의 WM.C.Brown Company에서 펴낸 악보집이다. 해방 전후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던 Mary C. Kimm Joh가 채보하고 번역했으며, Original Folk melodies and NATIONAL ANTHEM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편자는 서문에서 1930년 연구를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도서관에 한국의 선율이 기록된 도서가 없어 안타까워했고, 19년 뒤인 1949년 방문했을 무렵에도 미국 도서관에는 한국 노래집이 없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이 다음 세대를 이어갈 한국 어린이들이 쉽게 사용했으면 하는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한국 지도 (Map of Korea)와 한국 소개(About Korea), 애국가, 노랫말 한글 가사에 이어 아리랑(A-ree-rang), 노다가세(Come and fun) 등 12곡의 대표적인 민요를 악보와 함께 한글ㆍ영문으로 수록하고 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A First Book of Korean 10.5cm×17.5cm/114쪽/정선아리랑연구소 1950년 일본 The Hokuseido Press에서 발간한 한국어교재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들이 전장에 투입되기 전 일본에서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만든 기초 교재다.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R.H. Blyth와 Lee Eun의 공저로 펴낸 이 책은 한국어 발음과 간단한 문법, 일상회화를 수록하고 있다. 특히 부록으로 아리랑 노래를 수록하고 있어 6.25전쟁에 참전하는 군인들이 한국에 오기 전 이미 일본에서 아리랑을 배울 수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책은 1962년에 판형을 바꿔 다시 발간되기도 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아리랑이 실린 북한 추억록 26.5cm×19cm/8쪽/정선아리랑연구소 6.25 전쟁 당시 함경북도 중앙병원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의료단을 떠나보내며 작성한 추억록이다. 함경북도 중앙병원 배송봉 원장이 1950년 6월 25일부터 1954년 4월 10일까지 북한에서 의료단원으 로 봉사한 체코슬로바키아 의료단 대표인 단장 쁘라차코 앞으로 선물한 이 추억록은 모두 8쪽 분량 으로 북한 의사들이 직접 쓴 글과 그림들을 수록하고 있다. “아리랑! 도라지! 등의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들을 회상하여 주시요!” 라는 결핵과 의사의 글에는 체코 의사들이 이미 아리랑이나 도라지 등의 노래를 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너머간다/나를 버리 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는 아리랑 가사를 적어 이별을 아쉬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북한 지역에서 생산되어 동구권으로 흘러들어간 아리랑 기록물로는 처음 확인된 자료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조선족 문예지 아리랑 18.3cm×26cm/정선아리랑연구소 1958년 중국에서 '아리랑'이라는 이름을 달고 처음 나온 문예지다. 『아리랑』은 1951년 6월 창간한 『연변문예』 에서 비롯되었다. 1956년 말에 새로운 제호 공모에서 연변대학 김창걸 선생의 제안으로 『연변문예』 는 『아리랑』으로 바뀌어 1957년 1월부터 58년 12 월까지 2년간 『아리랑』 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조선족 문학의 구심점이 되어온 문예지 『아리랑』은 민족적인 감성이 제목에 담겼다는 이유로 1958년 대약진 운동 때에는 '아리랑은 편협한 민족 산물' 이라고 낙인이 찍혔고 1959년부터는 아예 제호를 「연변문학」으로 바꿔 발행하기 시작했다. 70~90페이지 안팎의 분량으로 나왔던 「아리랑」 은 당시 시, 소설, 민담 등으 문학작품과 민족 풍습등을 다룬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모든 소수민족의 언어를 “까마귀 소리와 같다” 고 해 조선문 책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대부분 불태워졌고, 이 때 『아리랑』도 대부분 사라져 희귀한 책이 되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AH-DEE-DONG 21.9cm×28cm/4쪽/정선아리랑연구소 1954년 미국 뉴욕의 SEQUOIA MUSIC COMPANY에서 제작한 아리랑 악보로 아리랑을 Ah-Dee-Dong(아디동)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악보는 6.25전쟁 당시 UP 통신사 기자로 활동한 스탠리 리치(Stanley Rich)가 가사를 쓰고, 빅 해링턴(Vic Harringlon)이 편곡해 엘리 윌리엄즈(Elly Williams) 부른 아리랑이 실려 있다. 표지는 한국의 시골 마을 정경이, 뒷장에는 아리랑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엘리 윌리엄즈의 사진을 수록하고 있다. 이 악보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행되기도 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Korean Conversation at a glance 123cm ×18cm/164쪽/정선아리랑연구소 6.25전쟁 직후인 1954년 한국에 주둔하는 유엔군들을 위해 일본 World News And Publishing Company에서 펴낸 한국어 기초 교재다. C.H. Shin의 저술로 모두 40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록으로 아리랑과 도라지타령을 수록하고 있다. 한국어와 함께 아리랑이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임을 보여주는 책이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Korean Survey 21.3cm×28.5cm/14쪽/정선아리랑연구소 6.25전쟁 이후 워싱턴의 Korean Research and Information Service 에서 발간한 한국 관련 잡지다. 1953년 10월호로 전쟁이 끝난 후 학교로 돌아가는 어린이들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영문판인 Korean Survey는 6.25전쟁 이후 열악한 한국의 교육, 경제, 문화 등을 매 호마다 특집으로 다루곤 했는데, 이 책에는 한국의 문화와 함께 아리랑과 애국가 악보와 가사가 수록되어 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Pictorial Korea 18.5cm×26.5cm/200쪽/정선아리랑연구소 1954년 한국국제보도연맹이 6.25전쟁 후 한국의 모습과 실상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펴낸 영문 화보집이다. 전쟁 직후 참화 속에서 재건에 열을 올리는 모습과 한국 사람들의 생활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면에는 악보와 함께 영어로 아리랑, 도라지타령을 소개하고 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Glimpse of Korea 18.2cm×28cm/42쪽/정선아리랑연구소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과 1953년 한국국제보도연맹에서 펴낸 영문 화보집이다. 우리나라 곳곳의 모습, 풍속, 문화 등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으며, 악보와 사진을 곁들여 아리랑, 도라지타령과 같은 민요를 소개하고 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KOREAN FORK SONG 21.8cm×33cm/76쪽/정선아리랑연구소 1954년 국민음악연구회에서 펴낸 책이다. 이강염 편저의 이 노래책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요 16곡을 해설과 함께 영문으로 실었다. 아리랑, 밀양아리랑이 실려 있다. 국민음악연구회는 1950년대 당시 대표적인 음악출판사로 우리 민요 보급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기도 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DISK 12월호 10.5cm×14cm/46쪽/정선아리랑연구소 195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DISK Magazine, INC.에서 발행한 작은 크기의 잡지다. 미국에서 아리랑이 'Ah—Dee—Dong'라는 제목으로 극 대본으로 AS 만들어져 소개되었다. Disk Theatre가 제공하는 'Ah—Dee—Dong' 대본은 6.25전쟁 당시 UP통신사 기자로 활동한 스탠 리치 (Stan Rich)가 쓴 것으로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엘리 윌리엄즈(Elly Williams)가 금발의 여가수로 등장하며, 빅 해링턴(Vic Harrington), 도리스 로지맨(Doris Logeman)이 출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Korea—Land of Song 19cm×26cm/15쪽/정선아리랑연구소 1954년 한국어린이합창단 미국공연 악보(Sheet music), 6.25 전쟁이 끝난 후 우리나라 문화를 미국에 알리려는 노력이 음악 등 여러 분야 에서 다양하게 시도되기 시작했다. 이 책은 1954년 우리나라 어린이 합창단이 미국 공연을 할 당시 공연 악보집으로 미국에서 발행되었 다. KOREA 라는 제목에 Land of Song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악보집에는 아리랑을 비롯해 애국가, 도라지타령, 봉선화 등 주옥같은 우리 노래와 악보가 영어로 수록되어 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아리랑 잡지 2.9cm×18.6cm/300쪽 내외/정선아리랑연구소 6.25전쟁 후인 1955년 2월 대중오락지를 표방하고 서재수가 창간한 아리랑 잡지다. 전쟁 후 난세를 즐겁게 헤쳐 나가는 신변잡기를 비롯해 소설과 만화, 아리랑 노래 등 신선한 내용과 기사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아리랑 잡지는 인기가 높았던 가요를 모아 아리랑최신유행가요 곡집, Arirang Song 등의 이름으로 부록을 발간하기도 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MUSIC TIME 18.5cm×23cm/250쪽/정선아리랑연구소 1963년 필리핀 Philippine Book Company 발행한 음악책이다. M. J. Enriquez가 편찬한 이 음악책은 초등학교 고학년 (Upper Primary Grades)을 위한 교과서로 악보와 어우러진 삽화와 함께 우리나라 아리랑을 비롯해 170여곡의 노래를 수록하고 있다. 6.25전쟁에 참전한 필리핀 군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아리랑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자료다. 영화 '아리랑' 대본 18.8cm×25.5cm/정선아리랑연구소 1974년 신성일, 박지영 주연으로 임원식이 감독한 영화 '아리랑'의 대본이다. 이 영화는 1926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시정기념일에 개봉 한 나운규 원작 '아리랑'을 다시 영화로 만들어 시도했다는 점에서 FHS 받았다. 1926년에는 나운규가, 1974년에는 신성일이 주인공 영진의 역을 맡아 열연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음반류 Ah Dee Dong Blues SP 음반 음반번호Royal | Roost 561/정선아리랑연구소 1952년 미국 Royal Roost Record에서 발매한 유성기음반이다. 오스카 페티포드(Oscar Pettiford 1922~1960)가 6.25전쟁 당시 위문공연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화장실 밖에서 통역병이 휘파람으로 부르는 아리랑을 듣고 알게 된 아리랑을 아디동불르스(Ah Dee Dong Blues)라는 재즈곡으로 편곡해 오스카 페티포드의 첼로, 찰스 밍구스(Charies Mingus)의 베이스, 빌리 테일러(Billy Taylor)의 피아노, 찰리 스미스(Chalie Smith)의 드럼으로 연주했다. '아디동' 은 '아리랑' 을 잘못 듣고 표기한 말로, 이 음반은 미국에서 아리랑 레이블로는 처음 나온 명반이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Ah Dee Dong EP 음반 음반번호Rainbow45-253/정선아리랑연구소 1954년 미국 Rainbow Records에서 발매한 7인치 EP (Extended Play) 음반이다. 미국 여가수 엘리 윌리엄즈(Elly Wiliams)가 6.25전쟁 당시 통신사 기자로 활동한 스탠 리치 (Stan Rich)가 수첩에 기록한 아리랑을 바탕으로 부른 아리랑을 수록하고 있다. Ah—Dee—Dong (아디동)이라는 제목과 Arirang이라는 제목을 같이 표기하고 있는 이 음반은 발매 일주일 만에 '이주의 앨범' 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엘리 윌리엄즈는 아리랑을 '2,500만 한국인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는 노래' 라고 소개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Record for Korea Army Exchange SP 음반세트 음반번호N13845-253/정선아리랑연구소 1950년대 초반 일본 이글레코드에서 제작 발매한 음반 세트다. 6.25전쟁 당시 참전했다가 일본을 거쳐 귀국하는 유엔군들에게 판매한 기념 음반 세트로 모두 4 장의 음반이 들어 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Japanese Records SP 음반세트 음반번호A-1228/정선아리랑연구소 1950년대 초반 일본 Columbia and Victor 레코드사에서 제작한 유성기 음반으로 (The Song of Arirang)이 들어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UN군 일본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갈 때 구입하도록 전쟁 기념품으로 제작되었다. UN군들에게 아리랑이 인기 있는 노래였음을 보여주는 앨범이다. 수록곡은 Song of Arirang (Korean)외에 China Night, Nagasaki Butterfly, Tokyo Boogie Woogie, My Dear Little Box, Japanese Rumba, Ginza Kankan Musume, Waga Uma, Waga Uta 등의 일본 노래들이다. 음반 안에는 가사지가 들어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Memories of Japan SP 음반세트 정선아리랑연구소 1950년대 초반 일본 KAWASAKI RECORDS가 제작한 유성기 음반 세트다. 6.25전쟁 당시 참전했던 UN군이 한국과 일본의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제작된 기념품으로 모두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음반들 가운데 ‘SONG OF ARIRANG’ (ODI-DONG)O| 있다. 이 음반은 아리랑이 6.25전쟁 당시 UN군들에게 ‘오디동(ODI-DONG)으로도 알려져 있음을 보여주는 앨범이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아리랑) EP 음반 음반번호 AA-17/정선아리랑연구소 6.25전쟁 후인 1950년대 후반 일본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제작해서 판매한 7인치 EP(Extended Play) 음반이다. 아리랑과 도라지꽃 등 우리민요 2곡과 일본 민요가 실려 있다. 일본에서 발매한 음반이나 한복을 입은 여인의 그림을 표지로 한 점이 특징이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KOREAN CHILDREN CHOIR LP 음반 음반번호 U URLP 7125/정선아리랑연구소 1954년 미국 Urania 레코드에서 제작해 판매한 LP 음반이다. The American—Korean Foundation 지원으로 만든 이 음반은 6.25전쟁 직후 10만 명의 고아들 가운데 25명의 고아들로 조직된 한국 어린이 합창단(Korean Children's Choir)이 부른 Arirang을 비롯해 23곡의 노래가 실려 있다. 전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한국의 고아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을 호소하며 만든 음반이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FOLK SONGS and BALLADS—A Pete Seeger Concert LP 음반 음반번호 SLP-57/정선아리랑연구소 1954년 미국 Stinson 레코드에서 나온 10인치 장시간(Long Play) 음반으로 피트 시거(Pete Seeger1919 ~ )가 부른 Ariran(아리랑)을 수록하고 있다. 1951년 경기도 포천과 의정부 지역에서 보병으로 참전했던 피트 시거는 적으로 싸우는 북한에서조차 아리랑을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복무를 마치고 돌아간 피트 시거는 한국에서 듣던 Ariran 반조(banjo)로 연주하며 구성지게 불렀다. 1950년대부터 조안 바에즈(Joan Baez)와 함께 모던포크운동을 주도한 그는 아리랑을 부르기 전 “지금 남북이 분단되어 있지만 남한과 북한이 하나인 상징적인 노래” 라는 아리랑의 역사와 배경에 대해 소개하는 멘트를 달면서 아리랑을 부르는 한 한국과 북한은 분단국가가 아니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1950년대 모던 포크 운동의 여파 속에서 아리랑은 미국은 물론 유럽까지 급격히 퍼져 나갔으며, 당시 피트 시거가 불렀던 아리랑은 오늘날까지 도 CD등에 담겨 사랑을 받고 있다. 게이트폴드 커버(Gatefold cover) 음반 커버 뒷면에는 Kenneth S. Goldstein과 WOODY GUTHRIE가 쓴 피트 시거에 대한 해설이 실려 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Sound of Korea 소노시트 음반 정선아리랑연구소 1950년대 후반 일본 도쿄에 있는 Asian Film Incorporated Production에서 제작한 아리랑 수록 Sounds of Korea 소노시트(Sono) Sheet) 화보음반이다. 책 가운데에 구멍이 나 있고, 책 사이 사이에 4장의 비닐음반이 붙어있다. 책 사이에 있는 음반은 책에서 분리해 듣도록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접어 음반 면을 그대로 데크에 없어놓으면 돌아가면서 소리를 낸다. 음반이 붙은 이 책 속에는 민요 아리랑과 애국가를 비롯해 유엔군이 한국을 떠나서도 한국의 정서를 오랫동안 기억하도록 한국에서 귀에 익은 모든 소리 - 헬리콥터, 탱크, 경비견, 한국 음악 등이 네 장의 비닐 음반에 해설과 함께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책 속에는 우리나라 여인의 모습과 아리랑 악보가 실려 있기도 하다. 아리랑과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소리와 사진은 켄노일(Ken Noyle)이 수집하고 찍은 것들이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Songs of Korea 12인치 LP 음반 음반번호 RLP-8031/정선아리랑연구소 1950년대 후반 미국의 Request Records에서 제작한 한국민요집 SONGS OF KOREA 12인치 LP음반이다 한평숙이 한국민요를 노래한 이 음반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음반으로 각각의 민요에 대한 영문 해설과 함께 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음반 자켓 뒷면에는 한평숙 선생의 약력이 있고, 꼭목에 대한 Alan Barrody의 영문 해설이 실려 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아리랑 고개 넘어 LP 음반 음반번호 OR 770/정선아리랑연구소 1950년대 후반 76레코드에서 만든 10인치 음반이다. 자켓이 아름다운 음반으로 앞면에는 '아리랑' 이, 뒷면에는 '밀양아리랑' 등 10곡이 수록되어 있는 희귀 음반이다. 이 음반은 1960년대 들어서 오스카레코드공사에서 12인치 음반으로 제작했고, 일본에서도 똑같은 표지그림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GEMS OF KOREAN MUSIC LP 음반 정선아리랑연구소 1960년대 초반 반도레코드에서 제작한 7인치 LP 음반이다. 영어로 표기된 이 음반에는 아리랑, 도라지 애국가, 수제천, 가야금산조, 창부타령, 장고 등이 KBS 심포니오케스트라, 국립국악 연구원의 연주와 이은미, 지화자, 성금연, 이정업 등의 노래와 반주로 실려 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Echo From The Land Of Morning Calm LP 음반 음반번호45-253/정선아리랑연구소 1960년대 초반 ARIRANG 등 4곡이 수록된 7인치 음반이다. 이 음반은 주로 우리나라에 온 외국 인사들에게 선물한 음반으로 아리랑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요 4곡이 수록되어 있다. 노래는 한국 어린이 합창단(Korean Children Choir)O| 불렀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Sound of Korea LP 음반 정선아리랑연구소 1960년대 초반 The Institute of Korean Studies에서 제작한 LP 음반이다. 한국에 주둔한 유엔군들과 외국인들에게 한국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만든 이 음반은 James Wade가 글을 쓰고 편집했고, Fred Hills와 Maurice McClaneO| 나레이션을 했으며, 박성열, 성동만이 편집했다. 이 음반에는 민요 아리랑을 비롯해 서울역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 버스안내양의 소리, 신문 배달부의 외침 소리, 생선장사의 소리 등 한국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비롯해 한국군 군가, 농악, 사찰 의식, 장례식, 한국 음악 등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음반 자켓 뒷면에는 수록 내용 목록과 판문점, 판문점 회담, 농부의 밭가는 모습, 농악 사진을 실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THE KIM SISTERS LP 음반 음반번호SLP-18022/정선아리랑연구소 1962년 미국 Monument 레코드에서 제작한 LP 음반이다. 김씨스터즈(The Kim sisters)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진출 보컬 팀으로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가수 이난영의 자녀인 김애자와 김숙자, 그리고 이난영 오빠의 딸인 김민자 트리오로 구성되었다. 6.25전쟁 후 미 8군부대에서 활동하다가 1959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노래뿐만 아니라 색소폰, 베이스기타,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고, 아리랑, 봄맞이 등을 불러 대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들이 명성에 오른 것은 인기 만화의 주인공 이름인 The Coasters의 곡 Chalie Brown이 1959년 2월 US R&B, Pop Chart 2위, US Signal Chart 2위까지 오르고, 같은 해 9월 모든 스타들의 등용문인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면서 부터다. 김씨스터즈는 Las Vegas 데저트인호텔, 스타더스트호텔 등에서 공연을 했으며 그의 인기는 미국에서도 톱클래스에 속했다. 이 음반 김씨스터즈의 미국 데뷔 음반으로 1964년에는 우리나라 LKL레코드사에서 똑같은 자켓으로 원판을 복사해 발매했다. 이 음반에 실린 아리랑은 우리말로 부른 노래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중국식으로 편곡된 느낌이다. 자켓 뒷면에는 에드 설리번이 김씨스터즈를 알게 된 얘기와 그들의 음악 세계에 대한 글을 실었다. 1966년 밥호프와 함께 월남 장병들을 위문하는 공연에도 참가하기도 했다. 한국을 알리고 한국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THE KIM SISTERS LP 음반 사진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ARIRANG, Korean Song And Dance Spectacular LP 음반 음반번호MFS430/정선아리랑연구소 1960년대 후반 미국뉴욕의 Monitor Records에서 나온 ARIRANG 12인치 LP 음반으로 Korean song and dance spectacular 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1961년 60명의 소리꾼과 24명의 춤꾼으로 구성된 한국가무단이 컬럼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와 모니터레코드의 안무로 아리랑, 경복궁타령 등 한국의 대표적인 소리를 선보이고 있다. 여기에 수록된 아리랑은 아리랑과 밀양아리랑을 바탕으로 편곡, 한국의 전통악기와 서양악기를 혼합 연주해 장중하게 불러 역동적(dynamic)이고 색조를 띤(tonal)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TORAGEE, the romantic music of Asia LP 음반 음반번호 BF19042/정선아리랑연구소 1960년대 후반 미국 Epic records에 서 제작한 Toragee—the romantic music of Asia 12인치 LP 음반이다. 우리나라 민요인 도라지(Toragee)를 제목으로 한 이 음반은 아시아의 대표적인 멜로디를 소개한 것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중국,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민요를 수록해 놓았다. 우리나라 민요로는 Toragee와 함께 ARIRANG이 수록되어 있다. (아리랑의 노래) EP음반 음반번호JP-1382/정선아리랑연구소 1960년대 일본 도시바레코드에서 발매한 7인치 EP 음반. 1921년 평양에서 태어나 1937년 '연락선은 떠난다' 가 히트하며 하롯밤사이 가요계의 신데렐라로 떠오는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와 '아리랑'을 담은 음반이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THE YOUNG REBEL LP음반 음반번호L1946-52/정선아리랑연구소 1952년 미국 Royal Roost Record에서 나온 ‘Ah Dee Dong Blues (아디동불루스)’ SP 음반을 이탈리아 밀라노의 Contact Records 에서 복각한 LP 음반이다. 오스카 페티포드(Oscar Pettiford 1922~1960)가 6.25전쟁 당시 위문공연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화장실 밖에서 통역병이 휘파람으로 부르는 아리랑을 듣고 알게 된 아리랑을 재즈곡으로 편곡해 오스카 페티포드의 첼로, 찰스 밍구스(Charles Mingus)의 베이스, 빌리 테일러(Billy Taylor)의 피아노, 찰리 스미스(Chalie Smith)의 드럼으로 연주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진도아리랑 LP음반 정선아리랑연구소 1971년 지구레코드에서 발매한 12인치 LP음반이다. 박춘석이 작곡해 음반으로 '진도아리랑' (이미자)과 '밤하늘의 부르스' (진송남,권혜경) 등 12곡이 수록되어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가수 이미자가 부른 진도아리랑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대중 가요의 범주에서 다룬 진도아리랑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음반이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기타 아리랑표 사각 통성냥 정선아리랑연구소 1972년 조양성냥공업사에 제작 판매한 사각 통성냥으로 숭례문을 배경으로 장구를 치는 여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아리랑이 담배 상표 SO 알려지면서 다양한 종류의 성냥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활속의 깃든 아리랑 아리랑 담배 정선아리랑연구소 우리나라에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나온 아리랑 상표의 담배들이다. 1958년 1월 아리랑이라는 SHE 나온 최초의 필터담배 '아리랑' 은 200환으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끽연시 흡인력이 좋지 않다고 해서 불만도 많았다. 1960년 디자인이 바뀐 '아리랑' 이 나왔으며, 1970년대 들어 다시 디자인을 바꿔 아리랑 담배가 나왔고, 그 후 1984년에 출시한 '아리랑' 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끝날 무렵 생산이 중단되었다.
아리랑 기록관 5. 아리랑 기록관
아리랑 기록관 문서 전한 단일팀 로잔회담 결과보고서 기록물명 전한 단일팀 로잔회담 결과보고 생산기관 외무부 생산년도 1963 철번호 BA0084356 건번호 1-1 기록유형 문서 면 수 12 소장처 국가기록원 1963년 외무부가 동경올림픽(1964)에 남북단일팀으로 출전하는 문제에 관한 국제올림픽위원회의 회의내용을 국무회의에 보고한 문서이다. 회담장소는 스위스 내용 로잔이었다, 주요내용은 한국이 동경올림픽에 남북단일팀으로 나갈 경우, 국기, 국가, 선수구성 등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이다. 이에 의하면 선수구성은 동독과 서독의 예를 따른다는 점, 국가는 아리랑으로 한다는 점 등은 합의가 되었지만, 국기 문제 등 다른 제반문제들은 합의가 되지 못했다.
아리랑 기록관 기록물명 : 무형문화재 조사보고(민요 외) 생산기관 : 강원도 교육위원회 생산년도 1967 철번호 BA0120088 건번호 25-1 기록유형 문서 면 수 5 소장처 : 국가기록원 내용 1967년 강원도 교육위원회에서 관내 무형문화재를 조사하여 문화재 관리국에 보고한 문서이다. 문서에는 평창군 민요와 정선아리랑이 당시 문화재로 조사 되었다. 이 중 정선아리랑은 남녀노소들이 산과 들에서 부르던 것으로, 당시 유행가요의 보급으로 원곡을 변형하여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아리랑 기록관 정선아리랑제 협조요청 기록물명 정선아리랑제 추진위원회 생산기관 정선아리량제 추진위원회 생산년도 1976 철번호 BA0120047 건번호 4-1 기록유형 문서 면 수 17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19764 정선아리랑제 추진위원회가 문화재관리국에 정선아리랑제의 협조요청을 위해 보낸 문서이다. 추진위원회는 도내 1호 무형문화재인 정선아리랑을 알리고 후대에 전승, 보존 하여 향토문화로 토착화하고자 1976년 9월 정선아리랑제를 개최하고자 하며, 이에 앞서 정선아리랑 의 보급을 위해 음반을 제작할 계획으로 이에 협조를 요청한다는 내용이다.
아리랑 기록관 아리랑 제작관련 기록물명 : 아리랑 제작관련 생산기관 : 국정홍보처 생산년도 : 1990 철번호 : BA0793892 건번호 : 1-1 기록유청 : 문서 면 수 : 19 소장처 : 국가기록원 내용 국립영화제작소가 민요 아리랑을 해외에 홍보하기 위해 제작계획을 보고한 문서이다. 주요 내용은 아리랑 제작계획, 대본, 구성안, 소요예산 등이다. 이 영화는 국어, 영어, 일어,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6개국어로 제작될 계획으로 뗏목아리랑과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과 밀양의 팔경, 나운규의 아리랑, 모내기 장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리랑 기록관 기록물명 아리랑 악보 및 녹음테이프 검토의뢰 생산기관 문화체육관광부 생산년도 1990 철번호 DA0348133 건번호 | 1-1 기록유형 문서 면 수 42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체육청소년부가 1991년 세계 청소년축구 및 탁구대회의 남북단일팀 참가를 위해 단가인 아리랑의 AES 문화체육관광부에 요청한 문서이다. 주요 내용은 남북한이 제시한 아리랑의 악보를 비교, 검토해 본 결과 1920년대 아리랑을 단가로 사용한다는 점, 아리랑이 오랜 역사의 산물로 민속통일에 기여하는 점 등이다.
아리랑 기록관 아리랑 악보 검토 기록물명 * 아리랑 악보 검토 생산기관 문화체육관광부 생산년도 1990 철번호 DA0348133 ㅣ 건번호 2-1 기록유형 문서 면 수 15 소장처 : 국가기록원 내용 문화부가 1991년 세계 청소년축구 및 탁구대회의 남북단일팀 참가를 위해 단가인 아리랑의 검토를 공연윤리위원회 음악전문심의회에 요청한 문서이다. 주요 내용은 남북한이 제시한 아리랑의 악보를 비교, 전통적인 3/4박자의 1920 년대 아리랑과 행진곡풍으로 편곡된 4/4박자의 아리랑을 탄력적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기타 단일팀 관련 보도자료, 검토대상이 된 아리랑 악보 등도 수록되어 있다.
아리랑 기록관 영상산책 아리랑 기록물명 영상산책 아리랑 생산기관 국정홍보처 생산년도 1995 철번호 BA0794236 건번호 | 3-1 기록유형 문서 면 수 1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국립영상제작소가 1995년 '영상산책 아리랑' 이라는 동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만든 제작지시서이다. 기획서와 제작대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각 지역의 아리랑과 아리랑에 얽힌 한민족의 애환을 담은 30분 분량의 비디오를 제작한다는 것이다.
아리랑 기록관 정선아리랑 전수관 기본계획안 기록물명 정선아리랑 전수관 기본계획안 생산기관 문화재청 생산년도 1998 철번호 DA0271106 건번호 | 1-1 기록유형 문서 면 수 11 소장처 ㅣ 국가기록원 내용 1998년 정선아리랑 전수관의 기본계획안을 시공사에서 문화재청에 제출한 문서이다. 주요 내용은 정선군 북면 아우라지(정선아리랑의 발생지)에 정선아리랑 전수관을 짓는다는 것과 유사건물사례, 건축재료 등에 대한 설명이다.
아리랑 기록관 기록물명 진도아리랑 마을 조성계획을 위한 국토이용계획 변경협의 요청서 전달 생산기관 전라남도 생산년도 2002 철번호 DA0320829 건번호 2-4 기록유형 문서 면 수 | 132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2002년 전라남도가 진도아리랑 마을 조성을 위해 국토이용계획을 변경하겠다는 내용의 요청문서이다. 주요 내용은 진도군 임회면 석성마을 일대에 진도아리랑 마을을 조성, 지역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SAIS 준도시지역으로 변경하고자 요청한다는 것이다.
아리랑 기록관 동영상 내고장 좋을시고(3-1) 동영상 내고장 좋을시고(3-1) 기록물명 내 강산 좋을시고(3-1) 생산기관 국립영화제작소 생산년도 1957 철번호 CEN0002033 건번호 1-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1957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공연영상으로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을 바탕 으로 우리나라의 고전음악과 민속무용을 소개하고 있다. 위 동영상은 공연내용의 일부로 어린이들이 율동과 함께 밀양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이다.
아리랑 기록관 내고장 좋을시고(3-2) 기록물명 내고장 좋을시고(3-2) 생산기관 국립영화제작소 생산년도 1957 철번호 CEN0002034 건번호 1-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1957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공연영상으로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을 바탕 으로 우리나라의 고전음악과 민속무용을 소개하고 있다. 위 동영상은 공연내용의 일부로 인간문화재 이은관이 농촌청년으로 분장하여 정선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이다.
아리랑 기록관 무궁화 새로피네(3-3) 무궁화 새로피네(3-3) 기록물명 무궁화 새로피네(3-3) 생산기관 국립영화제작소 생산년도 1958 철번호 . CEN0002096 건번호 1-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1958년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영상으로 가수 송민도 서울중앙방송국 합창단 등이 당시의 현대음악과 고전음악을 부르는 동영상이다. 위 동영상은 공연내용의 일부로 출연진들이 다 같이 아리랑을 합창하는 모습이다.
아리랑 기록관 원각사 개관 예술제 원각사 개관 예술제 기록물명 원각사 개관 예술제 생산기관 국립영화제작소 생산년도 1959 철번호 CEN0002220 건번호 1-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1959년 민속예술 공연장 원각사의 개관 기념공연 동영상이다. 위 동영상은 공연내용의 일부로 아리랑을 합창하는 모습이다.
아리랑 기록관 알레그리아스 스페인 무용단 기록물명 알레그리아스 스페인 무용단 생산기관 국립영화제작소 생산년도 1960 철번호 CEN0002279 건번호 1-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ㅣ 국가기록원 내용 1960년 내한한 스페인 알레그리아스 무용단의 공연 영상이다. 위 동영상은 공연내용의 일부로 무용단원이 한복을 입고 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이다.
아리랑 기록관 흘러간 옛노래2 기록물명 흘러간 옛노래2 생산기관 국립영화제작소 생산년도 1960 철번호 CEN0O02317 건번호 2-4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1960년 제작된 흘러간 옛노래 공연영상이다. 위 동영상은 공연내용의 일부로 가수 백난아가 아리랑낭낭을 부르는 모습이다.
아리랑 기록관 밀양아랑제 기록물명 밀양아랑제 생산기관 국립명화제작소 생산년도 1964 철번호 CEN0000388 건번호 5-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대한뉴스 제471호에 소개된 1964년 밀양아랑제 동영상이다. 밀양 영남루에서 열린 아랑제 기념공연과 백일장 So] 모습을 담고 있다.
아리랑 기록관 파월장병위문단 기록물명 파월장병위문단 생산기관 국립영상제작소 생산년도 1965 철번호 CEQ0000648 건번호 1-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1965년 파월 비둘기 부대 위문공연단의 베트남 여정과 공연모습을 담은 동영상이다. 위 동영상은 공연내용의 첫 장면으로 파월장병들과 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이다.
아리랑 기록관 방학을 보람있게 방학을 보람있게 기록물명 방학을 보람있게 생산기관 국립영화제작소 생산년도 1974 철번호 CENOO00911 건번호 2-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ㅣ 국가기록원 내용 대한뉴스 제994호에 소개된 '방학을 보람있게' 라는 제목의 동영상 이다. 위 동영상은 전체내용의 일부로 방학을 맞이하여 상명여대 사범대학 봉사단이 정선을 방문, 정선아리랑 보급발표회 및 농촌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아리랑 기록관 정선아리랑 기록물명 정선아리랑 생산기관 국립영화제작소 생산년도 1987 철번호 CEN0001621 건번호 5-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대한뉴스 제1651호에 소개된 정선아리랑 동영상 이다. 이 동영상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정선아리랑을 부르는 여고생들의 모습 등을 담고 있다.
아리랑 기록관 아리랑축제(서울올림픽공원, 88마당) 기록물명 아리랑축제(서울올림픽공원, 88마당) 생산기관 국립영화제작소 생산년도 1989 철번호 CEN0001723 건번호 | 7-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대한뉴스 제1753호에 소개된 제2회 아리랑축제 동영상이다. 이 축제는 서울올림픽공원 88마당에서 열렸으며 아리랑 합창과 무용 등으로 구성되었다.
아리랑 기록관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기록물명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생산기관 국립영화제작소 생산년도 1991 철번호 CEN0001821 건번호 2-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대한뉴스 제1851호에 소개된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동영상이다. 우리나라는 이 대회에 남북단일팀 코리아로 출전하여 여자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위 동영상은 당시 시상식에서 한반도기가 올라가고 아리랑이 연주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아리랑 기록관 세계 한민족의 삶 - 제3부 일본 기록물명 세계 한민족의 삶 - 제3부 일본 생산기관 통일원 생산년도 1996 철번호 CEQ0000491 건번호 1-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세계 한민족의 삶 시리즈 중 일본편을 담은 동영상이다. 위 동영상은 전체 내용의 일부분으로 1991년 제41회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 남북단일팀 코리아가 여자 단체전 에서 우승하여 시상식에 한반도기가 올라가고 아리랑이 울려퍼지는 장면을 담고 있다
아리랑 기록관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의 아리 기록물명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의 아리랑 생산기관 국립영화제작소 생산년도 1960-70년대 철번호 CEN0006891 건번호 1-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의 공연모습을 해외에 소개하는 영상이다.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은 1960년 고아들 중 음악적 재질이 뛰어난 아이들을 선발하여 꾸려진 합창단이다. 세계 20여 개국에서 850여 회가 넘는 공연을 가졌으며 현재는 월드비전 어린이합창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위 동영상은 공연 내용의 일부로 아리랑을 부르는 모습을 담고 있다.
아리랑 기록관 사진 기록물명 밀양문화제 및 아랑사 중건 준공식 생산기관 공보처홍보국 생산년도 1965 철번호 CET0047054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1965년 밀양문화제 및 아랑사 중건 준공식 사진으로 왼쪽이 밀양문화제 모습, 오른쪽이 아랑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아리랑 기록관 제14회 밀양아랑제 서막식(개막식) 기록물명 제14희 밀양아랑제 서막식 생산기관 공보처홍보국 생산년도 1971 철번호 CET006093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1971년 열린 제14회 밀양아랑제의 서막식(개막식) 사진이다. 개막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모습과 아랑사 전경(좌상), 개관식 기념공연(우하), 대관식 장면(좌하, 우상) SS 담고 있다.
아리랑 기록관 기록물명 제20회 밀양아랑제 생산기관 공보처홍보국 생산년도 1977 철번호 CET0052054-056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1977년 열린 제20회 밀양아랑제 관련 사진이다. 개막식에 공연된 가야금연주와 풍물놀이(상), 성화채화 및 이동(하) 모습이다.
아리랑 기록관 기록물명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정선아리랑, 한국인간문화재 종합예술제 정선아리랑 생산기관 공보처홍보국 생산년도 1978 철번호 CET0047187, CETO054321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1978년 열린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와 한국인간문화재 종합예술제의 정선아리랑 공연 사진이다. 왼쪽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모습이고 오른쪽이 한국인간문화재 종합예술제 모습이다.
아리랑 기록관 기록물명 뮤지컬 아리랑 생산기관 국정홍보처 생산년도 1988 철번호 CET0044096 기록유형 시청각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1988년 88서울예술단이 서울올림픽문화축전에 참가하여 선보인 뮤지컬이다. 러시아 교포3세가 서울올림픽 취재차 한국에 와서 혈육친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아리랑과 함께 보여주는 공연이다.
아리랑 기록관 정부간행물 기록물명 한국민속종합보고서 : 농악, 풍어제, 민요편 생산기관 문화공보부 생산년도 1982 철번호 C11M18384 건번호 1-1 기록유형 간행물 면수 416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문화공보부가 1968~1981년까지 연구, 간행된 각 지역의 '민속 종합 조사 보고서' 를 바탕으로 1982년 발간한 책이다. 농악, 풍어제, 민요 등 3편으로 구성되었으며 민요편에 각 지역 아리랑에 관한 구술채록 등의 자료가 실려 있다.
아리랑 기록관 전남의 민요 기록물명 전남의 민요 생산기관 전라남도 생산년도 1988 철번호 C11M10751 건번호 1-1 기록유형 간행물 면 수 749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전라남도가 1988년 도내 민요를 집대성하여 발간한 책이다. 전남의 자연환경 및 역사적 배경, 강강수월래, 진도아리랑을 비롯한 도내 주요 민요에 관한 구술과 악보의 채록 등으로 구성되었다. 진도아리랑에 대한 다양한 가사와 악보가 채록되어 있다.
아리랑 기록관 기록물명 정선아리랑 생산기관 강원도 정선군 생신년도 1992 철번호 C12M16495 결번호 | 1-1 기록유형 간행물 면수 223 소장처 국가기록원 내용 강원도 정선군이 1992년 다양한 정선아리랑의 가사를 채집하여 수록한 책이다. 수심편, 산수편, 애정편, 엮음편 SOR 가사를 분류하여 수록하였으며 책자의 말미에 정선아리랑의 연혁, 약사, 명창, 자료제공자 명단 등이 실려 있다.
아리랑 기록관 기록물명 민요 이렇게 가르치면 제맛이 나요 생산기관 국립국악원 신년도 1997 철번호 C12M02286 건번호 1-1 기록유형 간행물 면수 | 254 소장처 ㅣ 국가기록원 내용 국립국어원이 1997년 3대 아리랑을 비롯한 각 지역 민요의 의미, 표준악보, 민요 지도내용, 지도방법 등에 대해 수록한 책이다. 부록으로 향토민요표준악보가 담겨 있다
부록 부록 1. 아리랑 관련 주요 기록물 목록 2. 주요 아리랑 전승단체 및 홈페이지
부록 1. 주요 기록물 목록 주요 기록물 현황(95건) 계 : 95 문서 : 9 시청각 - 녹음ㆍ동영상 : 17 시청각 - 필름 ㆍ사진류 : 19 정부간행물 : 4 정선아리랑연구소 : 46 번호 기록물건명 철번호 건번호 생산년도 생산기관 1 전한 단일팀 구성 로잔회담 결과보고 BA0084356 1-1 1963 외무부 2 무형문화재 조사보고(민요외) BA0120088 25-1 1967 문화재관리국 3 아리랑제 BALA 640120047 4-1 1976 문화재관리국 4 아리랑 제작관련 BA0793892 1-1 1990 국정홍보처 5 아리랑 악보 및 녹음 테이프 검토의뢰 DA0348133 11 1991 문화체육관광부 6 아리랑 악보 검토 DA0348133 2-1 1991 문화체육관광부 7 영상산책 아리랑 BA0794236 3-1 1995 국정홍보처 8 정선아리랑 전수관 기본계획안 DA0271106 1-1 1998 문화재청 9 진도아리랑마을 조성을 위한 국토이용계획 변경협의 요청서 진달 DA0320829 2-1 2002 농림부
부록 시청각 기록물(36건) 녹음 ㆍ동영상류(17건) 번호 기록물건명 철번호 건번호 생산년도 생산기관 1 내 강산 좋을시고(3-1) 0640002033 = 1-1 1957 국립영화제작소 2 내 강산 좋을시고(3-2) CEN0002034 1-1 1957) 국립영화제작소 3 무궁화 새로피네(3-3) 0640002096 = 1-1 1958 국립영화제작소 4 원각사 개관 예술제 0640002220 1-1 1959 국립영화제작소 5 알레그리아스 스페인 무용단1 CENO002279 1-1 1960 국립영화제작소 6 흘러간 옛노래2 CENO002317 2-1 1960 국립영화제작소 7 밀양아랑제(대한뉴스 제471호) CENO000388 5-1 1964 국립영화제작소 8 파월장병위문단 CEQ0000648 = 1-1 1965 국립영상제작소 9 방학을 보람있게(대한뉴스 제994호) ㅣ CENOOOO911 2-1 1974 국립영화제작소 10 정선아리랭(대한뉴스 제1651호) CENOOO1621 5-1 1987 국립영화제작소 11 아리랑축제(대한뉴스 제1753호) CENO001723. 7-1 1989 국립영화제작소 12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대한뉴스제1851호) 0640001821 . 2-1 1991 국립영화제작소 13 세계 한민족의 삶-제3부 일본 CEQO000491 1-1 1996 통일원 14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의 아리랑 0640006891 1-1 . 2004 국립영화제작소 15 새재아리랑(작사/이제현,작곡/홍정희) 타0000016 10-1 1995 국립국악원 16 정선아리랑 CEA0001404 8-1 1998 제4회 동계아시아 경기대회 17 강원도아리랑 CEH000002 11-1 | 1999 제4회 동계아시아 경기대회
부록 사진ㆍ필름류(19건) 번호 기록물건명 점번호 건번호 생산년도 생산기관 1 제9회 밀양문화제 CET0047054 ㅣ 4-1 1965 공보처홍보국 2 아량사 전경 CET0047054 ㅣ 7-1 1965 공보처홍보국 9 밀양아랑제 서막식2 0510060931 : 2-1 1971 공보처홍보국 4 밀양아랑제 서막식 기념공연 CET0060931 3-1 1971 공보처홍보국 5 밀양아랑제 서막식3 CET0060931 9-1 1971 공보처홍보국 6 제14회 밀양아랑제 대관식 0510060931 : 11-1 1971 공보처홍보국 7 밀양 영남루 전경 CET0060931 12-1 1971 공보처홍보국 8 제14희 밀양아랑제 서막식 기념공연 0510060931 14-1 1971 공보처홍보국 9 제14회 밀양아랑제 서막식 관계자 기념찰영 , (ㄷ10060931 16-1 1971 공보처홍보국 10 제14회 밀양아랑제 서막식 관계자 참석 CETO060931 20-1 1971 공보처홍보국 11 제14회 밀양아랑제 서막식4 CETOO60931 22-1 1971 공보처홍보국 12 제20회 밀양아랑제 가야금 연주 CET0052054 1-1 1977 공보처홍보국 13 밀양아랑제 CETO052056 1-1 1977 공보처홍보국 14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정선아리랑1 CET0047187 1-1 1978 공보처홍보국 15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정선아리랑2 CET0047187 2-1 1978 공보처홍보국 16 한국인간문화재 종합예술제 정선아리랑 CET0054321 11-1 1978 공보처홍보국 17 뮤지컬 아리랑, 아리랑4 0ㄷ10044096 4-1 1988 국정홍보처 18 뮤지컬 아리랑, 아리랑5 DETOO44096 5-1 1988 국정홍보처 19 뮤지컬 아리랑, 아리랑6 DETO044096 6-1 1988 국정홍보처
부록 간행물(4건) 번호 기록물건명 철번호 건번호 생산년도 생산기관 1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농악,풍어제,민요편 C11Mi8384 1-1 1982 문화공보부 2 전남의 민요 C11M10751 = 1-1 1988 전라남도 3 정선아리랑 C12M16495 1-1 1992 강원도정선군 4 민요 이렇게 가르치면 제맛이 나요 C12M02286 1-1 1997 국립국악원 정선아리랑연구소 제공 기록물(46건) 번호 기록물건명 유혼 생산년도 1 아리랑엽서 기념품류 1930년대 2 아리랑 가사가 인쇄된 실크 손수건 기념품류 1940년대 3 아리랑 스카프1 기념품류 1951년 4 아리랑 스카프2 기념품류 1951년 5 아리랑 미니 꽃병 기념품류 1950년대 6 아리랑 제떨이 기념품류 1950년대 7 아리랑 뮤직박스 자개앨범 기념품류 1950년대 8 님웨일즈의 아리랑 문헌류 평전 1941년 9 LIFT EVERY VOICE 문헌류 악보집 1947년 10 Folk Song of Korea 문헌류 악보집 1950년 11 A First Book of Korean 문헌류 악보집 1950년 12 아리랑이 실린 북한 추억록 문헌류 주억록 1950년대 13 조선족 문예지 아리랑 문헌류 잡지 1958년
부록 14 AH-DEE-DONG 문헌류 악보집 1954년 15 Korean Conversation at a glance 문헌류 악보집 1954년 16 Korean Survey 문헌류 잡지 1953년 17 Pictorial Korea 문헌류 화보집 1954년 18 Glimpse of Korea 문헌류 화보집 1952년 19 KOREAN FORK SONG 문헌류 악보집 1954년 20 DISK 12월호 문헌류 잡지 1954년 21 Korea-Land fo Song 문헌류 악보집 1954년 22 아리랑 문헌류 잡지 1955년 23 MUSIC TIME 문헌류 음악책 1963년 24 영화 '아리랑' 대본 문헌류 대본 1974년 25 Ah Dee Dong Blues SP 음반 음반 1952년 26 Ah Dee Dong EP 음반 음반 1954년 27 Record For Korea Army Exchange SP 음반세트 음반 1950년대 28 Japanese Records SP 음반세트 음반 1950년대 29 Memories of Japan SP 음반세트 음반 1950년대 30 (아리랑) EP 음반 음반 1950년대
부록 31 KOREAN CHILDREN CHOIR LP 음반 음반 1954년 32 FOLK SONG and BALLADS-A Pete Seeger Concert LP 음반 음반 1954년 33 Sound of Korea ALAIE 음반 음반 1950년대 34 Songs of Korea 12인치 LP 음반 음반 1950년대 35 아리랑 고개 넘어 LP 음반 음반 1950년대 36 GEMS OF KOREAN MUSIC LP 음반 음반 1960년대 37 Echo From The Land Of Morning Calm LP 음반 음반 1960년대 39 Sound of Korea LP 음반 음반 1960년대 39 THE KIM SISTERS LP 음반 음반 1962년 40 ARIRANG, Korean Song And Dance Spectacular LP 음반 음반 1960년대 41 TORAGEE, the romantic music of Asia LP 음반 음반 1960년대 42 PYF YOO e/A2| 노래) 음반 음반 1960년대 43 THE YOUNG REBEL 음반 음반 1960년대 44 진도아리랑 음반 음반 1971년 45 아리랑 담배 기타 1950^~~1980년대 46 아리랑표 사각 통성냥 기타 1972년
부록 1. 주요 전승단체 및 웹사이트 단체명 남도잡가보존회 홈페이지 - 설립연도 2001 남도잡가가 도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결성된 단체이다. 진도 관내 내 용 SES 위한 강습과 진도아리랑, 남도민요 전반에 관한 보존활동을 하고 있다. 단체명 문경새재아리랑 보존연구회 홈페이지 - 2 설럽연도 2011 문경아리랑의 보존, ASS 위해 설립되었다. 매달 문경새재 야외 내 용 공연장에서 열리는 정기공연과 문경문화원을 통한 민요강습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단체명 밀양민속예술보존협회 홈페이지 - 3 설립연도 1980 향토민요의 발굴과 보존, 전승을 위해 Mele! 단체이다. 내 용 19824 첫 SHS 시작으로 약 60회가 넘는 공연을 벌였으며 일반인을 대상으로한 전승활동, 밀양아리랑 노래 부르기 경연대회 SS 열고 있다. 단체명 영남민요아리랑보존회 홈페이지 htto://cafe.naver.com/arirang21 4 설립연도 = 영남민요와 OAS 발굴, 보존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이다. 국내 12개 내 용 지부와 중국, 일본, 미국의 3개 해외지부를 두고 있다. 단체명 정선아리랑문화재단 홈페이지 http://www. jacf.or. kr 5 설립연도 1991 정선아라리의 UST 보존, 창조적인 HSS 통해 정선아리량을 진흥 내 용 시키고자 설립된 단체이다. 학생 및 일반인, 외국인등을 대상으로 다양한 전수활동을 하고 있다.
부록 10 단체명 홈페이지 설립연도 내 용 단체명 홈페이지 설립연도 내 용 단체명 홈페이지 설립연도 내 용 단체명 홈페이지 설립연도 내 용 단체명 홈페이지 설립연도 내 용 정선아리랑연구소, 학교 htto://www.arirang.re.kr, htto://www.arirangschool.or,.kr 1991, 1993 정선아리랑의 전승, HED 연구, WSS 위한 설립한 연구소와 학교이다. 아리랑과 정선아리랑의 이해, 정선아리랑 배우기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진도아리랑 보존회 1985 진도아리랑의 유래와 잊혀진 가사를 발굴, 수집, 전승하기 위해 ABE! 단체이다. 진도아리랑타령 가사집 발간, 진도아리랑비 건립, 200여회의 국내외 공연활동 Se 하였다. 1993년 진도군립민속예술단이 창단되어 진도아리랑 보존회의 역할을 일부 흡수하였다. 청주아리랑보존회 http: //cafe.daum.net/cjarirang 2004 청주아리랑의 보존과 전승, 연구활동을 위해 결성된 단체이다. 태백아라레이보존회 http://cafe.naver.com/tbarri 2005 태백아리랑의 보존과 MSS 위해 설립된 단체이다. 정기공연과 가사집 발간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평양민속예술단 http: //bhp.or.kr 2001 남북의 문화적 이질감 해소와 남북이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의 창작을 위해 새터민 예술인들을 중심으로 AME 단체이다. 여러 아리랑을 섞어 부르는 아리랑 연곡 SS 공연한다. National Archives of korea 130
부록 단체명 평창아라리보존회 홈페이지 http: //www.24210}242I.com 11 == 2005 평창아리랑의 HST} 보존을 목표로 평찬군 미탄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내 용 결성하였다. 최근 미탄면을 중심으로 전승과 현재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단체명 한겨레아리랑연합회 홈페이지 http://www.arirangsong.com 12 ane 1983 19834 ‘me} 아리랑' 을 창립하였고, 1994년 한민족아리랑연합회로 내 용 재창립하였다. 아리랑 학회의 설립 등 연구사업, 영화 아리랑 제작, 아리랑 학교개설, 박물관 건립, 한민족 아리랑 축제, 아리랑 예술단 운영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국내외 지부를 갖고 있다. Bae 한국전통민요협회 홈페이지 htto://www.koreansori.co.kr 13 설립연도 =, 아리랑을 포함한 한국의 전통민요 조사ㆍ연구, 한국 전통민요의 전승 ㆍ = 보급 ㆍ발굴ㆍ해외교류증진 SS 목표로 설립된 단체이다. 300] 개의 국내지부와 해외지부가 있다. BAS 횡성회다지소리전승보존회(정금민속보존회) 홈페이지 _ 14 설립연도 주 횡성회다지소리를 전승, 보존하기 위해 1986년 결성되었다. 2009년 mS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는데 보존회에서 주관하는 어러리 경창대회가 있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 뒷면 국가기록원 National Archives of Korea 302-701 대전광역시 서구 청사로 189(둔산동 920번지) 정부대전청사 25 TEL 042-481-6390 / FAX 042-481-6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