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급 기관 및 지방 행정시설편

경성부 부민관

경성부 부민관(府民館)은 경성부가 1933년 6월 경성전기주식회사로부터 공공사업 시설비로 기부 받은 100만 엔(圓) 중 절반인 50만 엔을 들여 태평통 1정목(현재의 태평로 1가)에 지은 복합문화공간으로, 일본에 세워진 문화시설 등을 바탕으로 하기와라 코이치(萩原孝一)와 경성부 영선과의 건축기사인 츠치야 츠모루(土屋積)에 의해 계획되었다. 면적 1,780평의 부지에 세워진 부민관은 건축면적 584평, 연면적 1,717평의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건물로, 옥탑(시계탑)의 높이는 9층에 달했으며, 1934년 7월에 착공되어 1935년 12월에 완공되었다. 완공 후 부민관은 경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로 소개될 정도로 당시 최고의 규모와 시설을 갖춘 근대식 다목적 홀이었으며, 음악회, 연극 등 각종 공연과 좌담회, 총회, 기념식 등의 행사 개최 장소로 활용되었다. 해방 후 부민관은 1950년부터 국립극장으로 쓰이다가 1954년부터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으며, 1975년 국회가 여의도로 옮겨지면서 시민회관 별관으로 사용되다가, 1976년부터 1990년까지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쓰였다. 이후 1991년부터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2002년에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이라는 명칭으로 ‘등록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국가기록원에는 경성부 부민관과 관련된 도면 79매가 소장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성부 부민관 관련 정보안내
명칭 연도 도면수
경성부 부민관 1935-1945 79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부민관 관련 도면들은 조선총독부의 영선(營繕) 조직에서 계획한 건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또, 다른 도면에서는 볼 수 없는 결제를 위한 직인을 찍는 스탬프가 다수의 도면에서 확인된다. 스탬프는 국화 모양으로 크게 4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상단에는 ‘감사(監査)’와 ‘계장(係長)’, 하단에는 ‘사도(寫圖)’와 ‘설계(設計)’ 란이 있다. 확인되는 도면에서 ‘감사(監査)’와 ‘계장(係長)’의 직인은 모두 동일하며, ‘설계(設計)’에 찍힌 도장은 여러 종류가 있어, 도면마다 다른 사람이 설계를 담당했음을 알 수 있고, 도면을 옮겨 그린 사람의 직인이 들어가는 ‘사도(寫圖)’은 도장이 없는 경우도 있다. ‘설계(設計)’에 가장 많이 찍혀 있는 도장은 “츠치야(土屋)”로 확인되며, 문헌에 기록되어 있듯이 경성부 영선과의 건축기사인 츠치야 츠모루(土屋積)가 대부분의 설계를 담당했음이 확인된다.

부민관이 세워진 태평통은 일제강점기에 개수된 주요 간선도로로, 당시 문화와 행정의 중심 시설들이 도열한 장소였다. 1936년에 제작된 「대경성정도(大京城精圖)」를 살펴보면, 부민관의 북쪽으로 1935년 박동진이 설계한 조선일보사 사옥, 남쪽으로 1937년에 완공된 체신국사업회관, 태평통 건너 동쪽으로 경성일보사와 경성부청 등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민관 부지인 태평통 1정목 60-3번지는 태평통과, 태평통에서 서쪽으로 분기하는 소로 사이에 위치하여 부지의 동, 남, 남서쪽 면이 도로와 면했으며, 부민관의 전체 평면은 부지의 형상에 맞춰 ㄴ자 형태로 계획되었다. 특히, 건물 내 대강당은 태평통과 직교하여 동서축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도판1], [도판2], [도판3] 참조) 또한 [도판2]에 기재된 배수배치도(排水配置圖)를 통해, 건물 주출입구는 태평통에서 대강당으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위치에 계획되었고, 출입구 앞으로 계단과 차량 출입이 가능한 슬로프가 설치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부민관 내부에는 가장 중요한 시설인 대강당을 비롯하여 다양한 공간들이 계획되었다. 강연회, 연극, 음악회, 영화상영 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계획된 대강당은 1,8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지상 3층 높이의 대공간으로 설계되었는데, 각 층 좌석에서 무대로의 시선을 고려한 1층과 발코니층의 각도 계획과, 무대에서 좌석까지의 음향을 고려한 공간 계획, 무대장치 계획 등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졌다. [도판4], [도판5], [도판6], [도판7]은 이 대강당에 대한 설계도면으로 현재의 공연장과 다를 바 없이 매우 현대적으로 계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연회, 강연회, 정동(町洞)총회 등의 행사 개최가 가능한 중·소강당과 특별실, 사교실, 다다미방(疊の間), 부속실, 담화실(談話室), 집회실, 식당, 공중(公衆)식당 등이 함께 계획되었다.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부민관 관련 도면 중 건물의 전체 평면도는 [도판3]의 지하1층 평면도가 유일하나, 대강당의 단면도인 [도판4], 전체 건물의 횡단면도인 [도판8], 각 층의 철근콘크리트 들보 계획도인 [도판9] 등을 통해 전체 건물 내에 다양한 실들의 존재를 가늠해볼 수 있으며, 대강당과 각종 실들은 내부 복도로 연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도판10]은 ‘일본간설계도(日本間設計圖)’로, 건물 내에 일본 전통식의 화실(和室)도 계획되었음을 보여준다.

부민관은 전체적으로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설계되었으며, 넓은 무주 공간을 형성하기 위하여 대강당은 철골 트러스를 사용한 경사지붕으로 계획되었다.( [도판4], [도판11] 참조) 또한 1년 5개월이라는 단기간 동안 공사를 완성하기 위하여, 건물 시공 과정 중 동절기에 콘크리트의 보온양생 공법을 시행하는 등의 시도가 이루어졌다.

부민관의 입면 계획은 [도판12], [도판13], [도판14]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20년대 후반 이후 보편화된 모더니즘 건축 양식의 영향으로 부민관 역시 직선을 강조하는 장식없는 입면으로 계획되었다. 특히, 건물 남동쪽 모서리에 위치한 높이 약 44m(144척)의 옥탑과, 건물 정면의 창문부 입면 계획을 통해 수직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근대식 시설로서의 권위를 표현하고 있다. 또, 공간별로 메스를 분절하여 돌출시키거나 감입시킴으로써, 반복 패턴에서 오는 지루함을 덜어내고 있다. 한편, 외벽은 백색 타일로 마감되었는데, 전체적으로는 장식 없이 계획되었지만, [도판15]와 같이 정면 중앙부의 창문이나 그 주위에 세밀하게 장식을 덧붙이는 등 부분적으로 변화를 주고 있기도 하다.

[참고도판]

  • 도판1. 경성부부민관신축공사설계도/문급병상세도지이/52, 1934-35년 추정 (Q03600011) 상세보기
  • 도판2. 경성부부민관신축공사설계도/부지배수도/50, 1934-35년 추정 (Q03600014) 상세보기
  • 도판3. 경성부부민관신축공사설계도/평면도, 1934-35년 추정 (Q03600016) 상세보기
  • 도판4. (미상)/(제목유실)/11, 1934-35년 추정 (Q03600013) 상세보기
  • 도판5. 경성부부민관신축공사설계도/대강당상구배급가시선도/1, 1934-35년 추정 (Q03600078) 상세보기
  • 도판6. 경성부부민관신축공사설계도/대강당음향도, 1934-35년 추정 (Q03600007) 상세보기
  • 도판7. 대도구조장치급박상장치, 1934-35년 추정 (Q03600038) 상세보기
  • 도판8. 경성부부민관신축공사설계도/단면도지이/12, 1934-35년 추정 (Q03600022) 상세보기
  • 도판9. 경성부부민관신축공사설계도/각계상복도/57, 1934-35년 추정 (Q03600079) 상세보기
  • 도판10. 경성부부민관신축공사설계도/일본간상세도기지일/41, 1934-35년 추정 (Q03600044) 상세보기
  • 도판11. 경성부부민관신축공사설계도/대강당축할도/58, 1934-35년 추정 (Q03600010) 상세보기
  • 도판12. 경성부부민관신축공사설계도/입면도/7, 1934-35년 추정 (Q03600019) 상세보기
  • 도판13. 경성부부민관신축공사설계도/입면도/8, 1934-35년 추정 (Q03600017) 상세보기
  • 도판14. 경성부부민관신축공사설계도/입면도/10, 1934-35년 추정 (Q03600020) 상세보기
  • 도판15. 경성부부민관신축공사설계도/정면상세도지이/14, 1934-35년 추정 (Q03600018) 상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