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늘 푸른색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산이 내뿜는 청명함이 가장 가깝게 우리에게 다가드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한그루 한그루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푸른색 한가지로 어울려서 우리 삶의 지키고 우리에게 온갖 안식을 베풀고 그래서 산은 우리와 떨어져 있으되 빼놓을 수 없는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이때쯤 이면은 토사가 풀풀 일고 기계충 앓던 우리 소년기의 까까머리처럼 흉한 몰골을 하고 있던 산에 메아리를 살게 하자면서 온 나라가 법석을 떨며 나무심기를 하던 시절이 불과 10년 20년 전 어름에 우리들 4월이었습니다. 산에 나무가 있어야 하는 까닭은 알았지만 당장 하루의 끼니를 위해 소나무 껍질을 벗겨 허기를 달랬고 곡식을 가꿀 밭떼기조차 없어 산간을 태워 화전으로 영유하던 우리 삶들. 배는 고프더라도 춥게는 살수 없다며 나무를 베어 땔감을 삼던 그 때. 우리의 민둥산 그 애처로운 산에는 끝내 메아리 한 울림도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나무 베던 일이 나쁜 일인 줄은 알아 높은 사람 순시라도 나올라 치면은 그 민둥산 바위에 초록색 페인트를 칠해 눈가림하면서도 돌아서면은 베기만 할 뿐 나무 한포기 제대로 심어본 적이 없던 시절. 그리해서 드디어는 모든 산에 철책을 두르고 입산금지 팻말을 내걸어야 했던 그 때. 우리들은 그저 메아리가 살게 산에 나무를 심자라는 노래만 불렀습니다. 그 머물지 않던 민둥산에 메아리. 봄이 와도 피어날 진달래조차 없던 그 때. 그 때를 아십니까?
전쟁은 모든 것들을 거칠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도 거칠어졌고 산하도 허기진 몰골이었습니다. 땅심은 여려져 약한 볕에도 푹푹 갈라졌고 탄피가 박혀있는 냇가에도 물이 말라 누런 녹물이 배어나던 그 때. 내일은 없는 것이라고 아예 젖혀놓던 사람들에게 간절한 것은 오늘 하루만이라도 등 따스하고 배불리 먹었으면 하는 바램이었습니다. 그래 그 당시 웅크라니 오이씨니 피엘480이니 하는 원조기관에서 주는 구호물자가 우리들의 큰 관심사였는데 그 때 들여온 밀가루는 후에 특별한 용도로 쓰여졌습니다. 땅심 여려진 논밭뿐 아니라 산에서도 토사가 부서져 내려 작은 빗물에도 물난리가 꼬리를 물자 정부는 보다 못해 사방사업을 시작했습니다. 5개년 계획이니 10개년 계획이니 해서 사방사업을 시작하던 그 때. 정부는 구호물자로 들여온 밀가루를 풀어 사람들을 동원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이때쯤 이면은 논에 모심기하듯 아카시아다 오리목이다 해서 묘목을 심게 하고 밀가루를 나누어주었지만 밀가루 됫박이나 타먹고 심을 때만 그 뿐. 채 그해가 가기도 전 어린 묘목까지 몰래 잘라다 아궁이 쏘시개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닌 말로 밀가루 타먹고 말았대서 밀가루 사방. 얼렁뚱땅 해치웠대서 나일롱 사방이라는 말이 그 때에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그런 저런 사방사업도 시찰할 겸 높은 양반이 나올라 치면은 다른 곳에 있는 생나무 밑동을 잘라 옮겨 꽂거나 바위에다 그 때 구하기도 힘들었던 초록색 페인트를 칠해 눈속임을 하는 웃지 못 할 일화도 심심치 않게 들어야했습니다.
“이 사방사업은 국가에서 시행하도록 되어있습니다만은 당시에 우리 재정이 부족해가지고 정부에서도 물론 사업비를 댔습니다. 댔는데 전량이 다 안되고 외국 원조도 뭐 받아가지고 하고 심지어는 밀가루 뭐 보리쌀 이런 것도 주고 서방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에 저희가 그 산에 나무가 없어지는 주원인이 뭐냐면 연료채취입니다. 국민생활에 그 연료가 없으면은 사람이 살 수가 없으니까. 50년대 그 때에는 한 그루 심고 한 그루 베고 뭐 참 질서가 없었다고 봐야되죠.”
봄 나기가 저승길 가기만큼이나 어렵고 서럽다 했습니다. 지금도 소설책 몇 권을 써도 모자랐다고 어른들이 되돌아보는 고생은 굶주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산이 무슨 업보를 졌길래 사람들은 산에서만 먹을 것을 구했습니다. 모두들 가난에 배고픔에 짓눌린 것 같은 걸음으로 산을 오르면 거기엔 몇 그루 소나무가 덩그마니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물이 오를락 내릴락 한 소나무 밑동을 쳐내고는 낫으로 조심스레이 겉껍질을 벗겨내 송기를 훑었습니다. 덩달아 산에 따라 오른 아이들은 곁에서 입안이 얼얼해질 때까지 솔 막대기를 요즘 그 흔한 무슨 무슨 아이스바처럼 빨아댔지만 향긋하고 달착지근한 맛도 잠시 뿐. 이내 더 큰 허기로 어지럼증을 느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벗겨낸 소나무 속껍질 송기를 잿물에 우려서 말린 다음 보릿가루를 넣고 빻아 죽도 쑤고 떡도 만들어 허기를 달랬는데 송기죽이나 송기떡을 몇 날이고 계속 먹어서 지독한 변비에 시달리곤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송기에는 타닌산이 배어있기 때문이었는데 송기 먹고 고통스러운 변비 때문에 뭐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뭐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세월을 잃고 말았습니다. 보리야 보리야 어서나오너라라고 아직 벨 생각조차 없는 보리밭에 대고 원망 꽤나 해 대던 이 맘 때면은 사그러지지 않는 한기와 굶기로 몸과 마음이 들쑤시듯 저려왔습니다. 그러면 늙지도 않아 허리가 휜 어머니는 부엌으로 내려서 생솔가지를 지펴 연기를 내면서 밥 짓는 시늉을 했고 살림 내 몰라라 할 수 없던 가장은 산에 가면은 뭐가 해결이라도 되는 듯 산을 올랐습니다. 그러기를 봄, 여름, 가을 내내 논밭일 틈틈이 짬을 내 시오리 작은제 할미산은 말할 것도 없고 3, 40리 병풍산 꼬깔봉까지 땔나무를 하러 다니는 게 예사였고 그렇게 우리의 가난에 산에 가난까지 보태곤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덧 겨울이면은 삭정이를 꺾고 죽은 나무 등걸 잔목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진달래 뿌리까지 뜯어내듯 캐내다가 방고래를 덮이곤 해서 아 우리들의 봄 그 기다리던 봄이 와도 피어날 진달래조차 없었던 그 황량하던 산. 우리 시인들이 봄을 노래할 진달래조차 없던 그 때
“나무 없어서 고사한 얘기는 뭐 이루 얘기할 수도 없어요.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양식도 없지. 나무도 없지. 그 남자들은 이제 가서 남의 일 다니면서 해서 쌀되박이나 얻어다 끓여 먹고 또 나무 해가며 이러니까 아주 없는 사람은 더 죽었지요 뭐. 여기서 저기 저 검은산 그 너머에가 그 가금령인데요. 거기가서 한 짐 하면은 해가 Err_Code(9:44) 이렇게 넘어가요. 짊어지고 오면 여기 오면 밤 그러니까는 7시나 8시 언제든지 됐어요. 그렇게 해서 하는데 아이고 죽을 지경이죠 뭐. 나무를 뭐 날마다는 할 수 없고 또 먹을 거 가서 이제 또 벌어와야 식구가 먹고 사니까요.”
봄이 와도 얻어 부칠 한 뼘 밭떼기도 여의치 않았던 없는 사람들은 땔감 걱정이라도 덜어보자고 아직 총성이 채 멎지도 않은 산 속으로 들어갔고 좀 깊다 싶은 산마다 흩어져 화전을 쪼았습니다. 가파르지 않고 기름질만한 땅을 골라 다북솔이건 아름드리 굴참나무건 되는 대로 베내고는 불을 지른 다음에 땅을 대강 헤집어놓고 수수나 조 감자 메밀 콩 따위를 심었습니다. 여름에 김매기야 해주는 듯 마는 듯 가을걷이를 하고 나면은 알곡보다 잡초가 많기 마련이었습니다. 이름 해서 화전민. 요즘 시세로야 기껏 조 몇 섬 얻자고 몇 백 몇천 배 값나가는 나무를 태우곤 한 꼴이었지만은 그래도 없는 사람한테는 그 화전갈이 만큼 먹고사는 데 도움 주는 곳이 없어 화전일구는 사람들이 자꾸 불어나 강원도, 충청도는 말할 것도 없고 경상도, 전라도까지 많을 때는 무려 30만가구가 넘는 화전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전 이제 화전을 처음에 사람을 많이 해가지고 가서 그 산 편한데 가서 보고 나무를 굵고 살고 없이 모조리 베어버린거에요. 베어가지고 깔아놨다가 그게 마르면 거기다 불을 질러가지고 이제 그 뒷날 요걸 또 해가지고 가서 수수씨를 뿌리고 수수씨가 올라와가지고 하면 이제 풀 매러가는겁니다. 가서 이제 풀 올려 좋은 풀은 손으로 뜯어버리고 그래 이제 두 번 내지 세 번 가서 뜯어주거든. 뜯어주고 이제 가을에 가서 추수를 하는거야. 추수를 하러 가보면 뭐 Err_Code(12:05)손가락도 정도 되고 안 그러면은 이 Err_Code(12:08) 안 그러면 생전 못 베고 그냥 버리는 거야. 이래가지고 막 떨어봐야 그저 한 반마지기 Err_Code(12:18) 한 닷마지기 정도 했다하면 수수 잘 먹으면 그저 두가마 반 내지 세가마 그러니 그걸 가지고 연명하기도 바쁘지요.”
그 화전민의 모습은 9년 전인 1978년에야 비로소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지만 그런 대신 도회나 읍내 땔감 사정이 우리들 산에 나무를 그냥 있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장터마다 빠지지 않는 게 장작 시장이어서 산판 꽤나 갖은 사람들이나 도벌꾼들이 달구지에 몇 바리씩 싣고 온 장작을 풀어 넣고 대신 제상에 올릴 마른 민어 두어 손, 검정고무신과 보습 몇 짝 쌀 몇 말 바꿔 가면은 장작마련한 사람들의 그 해의 겨울은 그런대로 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나마 산판 장작이라도 살 형편이 되는 사람들의 경우고 쌀 됫박 팔기도 급했던 보통사람들의 겨울나기는 남산이나 관악산, 구봉산에 땔감하기로 끝도 밑도 없었습니다. 철도 침목도 전봇대도 나무 아니곤 어쩌지 못하던 그 때. 그래서 손바닥 만한 널빤지도 곧 돈이었고 전쟁 통에 얼기설기 지어오는 판자 집이 헐릴 때도 송판 한쪽, 각목 한 토막도 세간 챙기듯 챙겨야만 했고 집 한 칸 늘리거나 없는 살림에 자식 분가라도 시킬라치면은 나무 아니고는 차양 한 조각 마련할 수 없었는데도 우리 아이들은 그저 풀 한포기 살 수 없는 산에 메아리를 살게 나무를 심자 라는 나무심기 노래로 고무줄뛰기를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민둥산은 늘어갔습니다. 해방당시에만도 풀 한포기 없던 이른바 황폐임야가 44만 정보였던 것이 50년대를 마감하던 1959년에는 67만 정보로 늘어났고 나무씀씀이는 더 늘어나 산은 더 헐벗어만 갔습니다. 게다가 밀가루 사방이니 나일론 사방이니 해서 사방사업이 겉치레에 맴돌았고 때문에 해마다 물난리와 가뭄난리가 심해갔지만은 우리들 생활은 10년 100년 앞을 내다보고 가뭄과 물난리 겪으면서도 나무를 심어야한다는 여유조차 가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민둥산마저 더 헐벗게 한 것이 도벌이었습니다. 냉이 풀과 쑥 죽을 견디다 못해 수십리 산길을 몰래 올라가 그나마 남아있는 나무를 베다 판 우리들의 생계. 그리고 나라 전체를 봐서도 60년대 초까지도 우리 수출액이라야 1억 달러가 고작이어서 종이 만드는 데 또 광산 갱목 만들 나무까지 사다 쓸 형편이 아니어서 나무도 모두 국내에서 조달해야 했기 때문에 목상들 가운데는 가난한 이들이 도벌한 나무를 사들이는 사람도 생겨났고 심지어는 보릿고개 때 농민들에게 돈 얼마를 주고 이른바 선대청부도벌까지 성행시켰습니다. 그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가난 앞에서 영락없이 꼼짝 못하는 농민들은 벌 받을 일인지 알면서도 나무를 벴고 걔 중에는 생나무를 자르는 죄까지 저지르는 게 뭣해서 봄날 나무 밑동 껍질을 벗겨 나무를 말라 죽게 한 뒤에 죽은 나무 간벌하듯 도벌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산이란 산마다 입산금지 팻말이 나붙고 낙엽채취마저 못하게 해 제 산에도 마음대로 오르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 때 서슬이 시퍼렇던 산림간수 도청, 군청 산림께 직원과 산림청 직원들로 구성된 이들 산감으로 불렸던 산림간수들은 밀주단속반원과 함께 농촌사람들에게는 암행어사만큼이나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제 산에서 생솔가지 몇 가지 쳐내다가 들킨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가가호호 수색을 해 솔가지를 찾아내고 적발된 사람은 벌금을 물리거나 징역살이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새로운 4월의 두 번째 밤을 보내고 더 푸르른 산 그 식목의 날을 또 맞습니다. 삶의 성장을 피부로 느끼면서 어느 날 산에 오르고 보면 가까이서도 메아리는 머문 듯 소리를 하고 있고 오냐 내 새끼 니가 이만큼 컸구나 하고 훌쩍 커버린 손주 키에 새삼 놀라워하는 할머니처럼 새록새록 몰라보게 푸르러진 산내음에 탄성을 쏟게 됩니다. 그것은 식목 못지 않게 나무 기르는 정성을 기르기 위해 육림의 날을 재정하는 등 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한 데 묶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67만 정보에 달하던 황폐임야가 지난 80년 초3만 정보까지 줄어들었고 그 후로는 경이적으로 줄어들어 올 들어서는 겨우 1500정보로 우리들 산야는 이제 완전 푸른색으로 살아 숨쉬는 자연의 장원으로 탈바꿈해 이제 울창한 수목 그 숲속에서 산림욕까지 즐기게 된 오늘. 그러나 휴일이 되면은 원색의 등산객이 넘쳐나는 그 산길이 땔감 한 줌 구하기 위해 우리 아버지들이 남몰래 오르내렸던 그 길이고 이제는 늘씬하게 뻗어 오른 잣나무나 밤나무 등 경제수종의 그루터기는 바로 우리 어머니들이 원조 밀가루 타내기 위해 모심듯 심어대든 아카시아가 꽃 한번 못 피우고 잘려버린 곳인데 그 어느 비탈에서도 화전을 가난처럼 일구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오늘. 나무가 많으니 산이고 산이니까 으레이 숲이려니 생각하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그 때 그 민둥산 메아리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세월의 강물이 돼 어디선가 흐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