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는 1진 1패를 거듭했다. 맥아더 원수는 중공 폭격발언을 했고 미트루만 대통령은 국지전을 고집했고 결국 맥아더는 51년 4월 11일자로 해임되었다. 해독불가(13:20~13:32)영어 맥아더는 미 의회에서 노령은 죽지 않고 오직 사라질 뿐이라고 명연설을 마치고 미국시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군복을 벗었다. 1951년 7월 10일의 처음으로 수령을 전제로 한 유엔 측과 북괴 측의 접촉이 있었다. 당시의 유엔군 총 사령관은 미찌웨이 장군이었다. 본격적인 휴전회담 한국 측은 백승엽 장군 유엔 측은 조의제도 북괴측은 남일이였다. 유엔군 측은 1개월 정도면 휴전협정에 조인할 수 있으리라 낙관했다. 그러나 북괴측은 처음부터 회담을 정치 판견장으로 이용하며 미국군의 철수문제부터 제의했다. 한국 측에는 이 회담으로 비관과 좌절을 안겨 주었다. 전국이 초토화되고 수많은 국민이 희생된 채 6.25이전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남북병사의 마주보고 사진 찍는 기자들 순수하게 응해온 유엔군 측도 이 회담이 오래 갈 것을 예측했다. 회담 중에는 이런 사례도 있었다. 원칙으로 휴전회담장에는 무기를 지니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기를 숨겨오고 회담장 주변에서 침입해 오려는 무장한 북괴군 도 있었다. 국제적인 관례도 모르는 북괴군의 실상이 아닐 수 없었다. 회담장은 아이들의 구경거리도 되었다. 유엔군은 북괴에 압력을 가하고자 계속 화력을 퍼 부었다. 원산에 함포 사격 여름이가고 겨울이 왔다. 회담장은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옮겨졌다. 그해 겨울 휴전선과 비무장지대 설정에 관한 협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휴전선은 협정조인 때의 전선을 기준으로 하기고 합의했다.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전선은 치열했다. 전선은 제자리걸음에 5대 쟁탈전으로 변했다. 해독불가(17:22) 껌꺼실 피해 능선 펀치볼 등등 사투를 다한 전투는 수 없이 많았고 백마고지의 전투에서는 한차례 출격에서 60만 톤의 포탄이 떨어진다. 22만 발의 포탄세례를 퍼 부었다. 고지의 투입도 무려 20번씩이나 한국군이 차지했다. 전선의 황야는 풀 한포기 살아남은 것이 없이 포화 되었다. 귀순하는 북괴 병사도 많았다. 유엔군이 살포한 삐라를 들고 사지를 넘었다. 여기는 거제도 포로수용소다 이곳에는 17만의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반이 넘는 10만 명이 북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한 반공포로들이었다. 유엔군 측은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그림그리기 조각 등 특기를 살리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제봉일 인쇄 작업 선반공작 등 기술 조예까지 시켜 주었다. 그런데도 공산포로들은 북괴기와 스탈린 화상을 들고 다니며 시위를 벌이는 등 소란을 피웠다. 목총을 만들어 수용소 내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동료들을 고문 암살 학살 하는 만행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더욱이 폭동이 사건을 유발해서 수용소 소장을 납치하는가 하면 칼 곡괭이 등으로 무장해서 반공포로의 막사를 습격해 수용소를 온통 피바다로 바꾸어 놓기도 했다. 유엔군 측의 인도적 대우를 역으로 이용한 악랄한 공산포로의 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