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1945년 8월 15일 미국 항공모함 미주리호에서 있었던 일본의 무조건 항복 조인으로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은 그 종말을 고했습니다.
일제 36년간의 압제에서 해방된 조국 그러나 3천만 국민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 민족의 앞날에는 천추의 한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했습니다. 그리고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슴마다 원한을 심은 이 38선, 한반도 분단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1946년 1월 서울의 덕수궁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습니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의한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논의하기 위해 이 회의가 개최됐던 것입니다. 조국의 독립을 갈망해온 온 겨레에게 크나큰 노여움과 충격을 준 이 신탁통치 안을 모두가 맹렬히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다 같이 이를 반대했던 남북의 공산당들이 갑자기 이를 지지하고 나섰으니 공산당의 음모는 이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한국문제는 유엔 총회로 넘어가 유엔 감시 하에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도록 의결했습니다. 이에 유엔 한국위원단이 조직돼 한국에 파견됐으나 소련 수상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의 방해로 가능한 지역에서만 선거를 하도록 다시 의결 돼 우리나라 사상 처음으로 선거가 실시됐으며 공산당의 맹렬한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1948년 8월 15일 수도 서울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습니다.
여기는 그 당시의 평양, 소련군은 이북 땅에 진주하자 그동안 항일 애국운동을 하던 민족적 신망이 두터운 인사를 제외하고 소련군 첩보원으로 있던 젊은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가장 그에게 정권을 맞길 준비 작업을 서둘렀습니다. 전설적인 항일투사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훔친 30대의 김성주 그 철부지 같은 자를 수상으로 하여 1948년 9월 9일 평양에는 국제공산당의 괴뢰정권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북쪽 괴뢰군의 지상목표는 전 한반도의 적화였습니다. 그들은 해방직후부터 시도해온 폭력혁명의 수단을 더 한층 발전시켜 무력으로 적화통일 할 것을 결정하고 전시체제를 갖추어 전쟁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농업위주인 남한에 비해 북한 땅에는 일본이 대륙침공을 위해 세운 전략적인 공업시설이 많았습니다. 그 설비와 장비는 그대로 북한 괴뢰군의 군수기지로 이용됐던 것입니다. 그리고 재빨리 징병제도가 실시되어 소위 조선인민군대라는 정규군이 크게 조직되고 이른바 빨치산 부대라는 게릴라 군대까지 조직된 것입니다.
1948년 말 모스크바에서는 소련 및 중공 그리고 북한 괴뢰 대표들이 모여 극동침략에 관한 전략회의를 열고 1950년 6월 이전에 괴뢰군의 군비 증강을 완료하도록 했습니다. 이 회의가 있은 직후 소련군은 북한에서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지상군 전문 지휘자들은 민간사절단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북한 땅에 대거 투입, 파견 됐던 것입니다. 이 무렵 중국과 만주 땅에서 오랜 전투경험을 쌓아온 소위 중공군 팔로군의 최무정을 비롯한 수만 명의 한인계 병력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옴으로써 북한 괴뢰군은 22개 전투사단을 편성 38선 배치를 완료했던 것입니다.
1949년 3월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고 중요한 요청을 했던 것입니다.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다녀간 후 여기 시베리아 철도 동쪽으로 가는 기차에는 탱크를 비롯한 각종 중장비들이 계속 만개되어 북한으로 수송됐습니다. 드디어 1949년 말에 이르자 북녘 땅 곳곳에서는 소위 인문군대 연습이 대규모로 실시됐습니다. 이 연습의 특징은 어디까지나 남한 땅의 지형을 가상하고 기습하는 훈련이었습니다. 이 무렵 남한 땅에서는 공산당의 지하공작으로 혼란이 거듭되고 있었습니다. 여수 순천의 국군 반란 사건과 제주도의 군경비대 반란 사건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파괴와 살상으로 만행을 저지른 일부 추모자들은 체포됐으나 나머지 무리들은 산으로 숨어들어 공비로 변했고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군경은 공비토벌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소위 남로당 지하조직은 국회에도 침투되어 혼란을 야기 시켰으며 김약수 부의장 등의 프락치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국회에서 주한미군 철수의 제안을 선동하고 간첩활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미모의 여간첩 김수임으로 하여금 주한미군의 군사기밀을 탐지해서 북쪽에 보냈던 것입니다. 그 무렵 톨레스 미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 38선을 시찰했습니다. 당시 한국에 있던 미국 요인들은 북한에는 야포나 탱크 같은 무기가 없다고 했으나 톨레스 장관은 38선의 긴장상태를 직접 목격한 후에 미국의 소극적인 대 한국정책을 고려해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의 철수는 완료되었습니다. 미국은 이른바 마샬플랜이라 해서 구라파 재건 중심의 대외정책을 썼기 때문에 극동 특히 한국 같은 작은 지역은 별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1950년 1월에 미국은 이른바 에치슨라인이라는 극동방위선을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 지도에서처럼 일본과 필리핀으로 연결되는 선이 방위선이고 보면 한국과 대만은 그 방위선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북한 괴뢰는 새로운 술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남한 땅에서의 공비활동을 중지시키고 지하에 숨었던 공산당을 자수시키는 한편 남북한의 총 선거를 제의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평화공세는 요인 교환이라는 이름으로 또 펼쳐졌습니다. 남로당의 거물 김삼룡과 이규하를 북한에 있는 조만식 선생과 맞바꾸자는 제의였습니다. 우리가 교환 날짜를 잡은 것이 6.25 이틀 전인 6월 23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 북한 괴뢰는 38선 5킬로미터 이내에 모든 주민을 소개시키고 남침을 위한 전투준비를 완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6월 18일 북한 괴뢰 인민군 최고사령관이던 김일성은 전방 각 사단장에게 국군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라는 정찰명령 제1호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작전 침투명령 제1호를 또 내렸습니다. 이 명령은 전 북한 괴뢰군을 38선으로 이동 6월 23일 12시까지 공격준비를 완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북한 괴뢰군은 지체 없이 공격준비를 완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남한의 안팎은 허점 투성이었습니다. 우리 국군의 병력이라고 해야 겨우 단발식 장총으로 장비한 7개 보병사단을 주축으로 38선 일대의 경비와 후방 치안에 치중하고 있었으므로 병력의 규모는 10만 미만이었고 박격포와 경비행기 몇 대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국군의 일부에서는 북쪽의 심상치 않은 사태를 예고했으나 고위층에서는 아무도 귀담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남북의 충돌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해 6월 초에 사단장급 이상의 국군 고급지휘관에 대한 인사이동을 단행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38선을 경비하는 부대까지 이동 배치했고 천5백대 가량의 군 차량 중 천 대 가량이 후방에서 정비 중이었습니다.
38선 인근 옹진반도에서는 간간히 도발하는 괴뢰군과 대응하기 위해 주민들은 죽창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을 비롯한 온 남한 땅은 태평세월 속에 잠겨있었습니다.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공비들이 자취를 감추자 정말 이 땅에는 참된 자유와 평화가 온 것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때마침 일어 닥친 마카오 선풍으로 신사 숙녀는 사치와 유행을 따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나라의 운명을 걱정해 주는 이 없이 오직 자유만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해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전후해서 남한의 방방곳곳은 선거분위기에 들떠 있었습니다. 정치인들은 저마다 득표 공작에 여념이 없었으며 유권자들도 일손을 놓고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술과 놀이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자유가 좋고 민주주의가 좋은 줄만 알고 즐기기만 했지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설마 전쟁이 나랴? 1950년 6월 24일 대부분의 장병들은 외출과 휴가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특히 농촌출신 사병들에게는 15일 간의 농번기 휴가를 주어 모심기를 돕게 했던 것입니다. 6월 24일 토요일 밤 서울의 번화가에서는 그 당시 불어 닥친 서양 춤바람과 주말의 술집이 흥청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헤이 된 남쪽 사람들의 사정을 알리는 공산 간첩들의 무전은 북으로 북으로 통신되는 가운데 1950년 6월 24일 서울의 밤은 깊어만 갔던 것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의 공격준비를 완료했던 북한 괴뢰군들은 일제히 포문을 열고 파죽지세로 남쪽 땅을 기습 공격했던 것입니다. 안식의 그날 새벽 설마 하던 남한 땅은 단숨에 붉은 침략군에 짓밟히게 돼 서울은 3일 만에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탄 피난 열차 기적소리까지 이 땅의 산천을 울렸습니다.
이렇게 남한 땅은 3개월 만에 대구 부산 지방을 제외한 전 지역이 놈들에게 강점당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잃게 되고 이 강산은 초토로 변해버렸습니다. 세월의 흐름속에 그 처절했던 전쟁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이제 6.25의 포성이 멎은 지 25년 그런데 이 휴전선 북쪽에서는 또 다시 남침 전쟁의 준비가 6.25 이전보다도 더 철저하게 진행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분단의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른바 4대 군사노선으로 6.25 남침의 경험을 살려 단숨에 남쪽을 쳐 내려 오겠다는 북한 괴뢰의 전쟁미치광이들 그들은 철모르는 어린아이까지도 군대조직을 해 놓았습니다.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바친다는 이 가공할 생활구호 세계 굴지의 신문 뉴욕 타임즈가 최근 보도했듯이 북한 괴뢰군은 휴전선 일대 병력을 재배치하고 공격형 신예 무기들을 휴전선 근처에 집결 시켰습니다. 이렇게 전쟁준비를 다 해놓은 북한 괴뢰는 70년대에 접어들자 또 평화공세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주도한 남북대화에 북한 괴뢰는 잠시나마 응했습니다. 손을 잡으면서도 평화를 가장했던 그네들의 위장된 평화 그것은 6.25 직전에 평화를 부르짖던 수작과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6.25 전쟁은 남로당을 동원해서 남쪽의 혼란을 선동하더니 이제는 소위 통일혁명당이라는 간첩조직을 펴 놓고 남한 땅에서 폭동을 일으키려는 수작 그것은 6.25전 남로당이 6.25 남침을 방조한 사실과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세워 학생들의 불평불만을 선동했던 사실과 지금의 공산간첩이 학원의 자의를 내세워 학생의 데모로써 폭동을 일으켜 남침을 유도하려는 것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가 자유 민주사회 국민이라는 입장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 북쪽에서는 한반도의 자유민주주의를 없애버리려는 전투태세로 뭉쳐있습니다.
우리의 어린이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 북의 어린이들은 공산당의 총알이 되는 교육을 받고 있으며 6.25를 모르고 자란 우리의 젊은이들이 북한 괴뢰의 도발을 예사로 알고 있을 때 북의 젊은이들은 총 화기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스러운 학원의 우리 여대생들 그러나 공부보다는 군사훈련에 청춘을 바치고 있는 북의 여인들 예나 지금이나 진솔한 우리의 예술 무대 그러나 북의 예술무대는 무력혁명을 조장하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산과 들에서 봄을 즐기고 있을 때 북에서는 6.25 직전처럼 총 쏘기에 광분하고 있고 설마 전쟁이 나랴? 하고 우리가 방심하고 있을 때 북의 박격포 탄이 남으로 날아오지 않는다고 그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우리가 북한 괴뢰의 남침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거를 잊은 채 환상적인 평화 속에 살아간다면 또 다시 6.25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될 것입니다. 내 부모, 내 형제, 그리고 내 자식의 시체를 찾아 헤맸던 어제의 기억들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설마 하다 당한 이 비극 지금 북한 괴뢰의 흉계 앞에서 우리가 또 다시 설마에 속아 이러한 비극을 당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또 다시 닥칠 지도 모르는 이 비극을 막는 길 그것은 지금의 우리 모두가 하나로 뭉쳐 북한 괴뢰와 대결하는 인정태세를 굳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의 자유와 번영을 지켜나가는 유일한 길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