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어느 농촌이든 대개는 대를 물려오는 밭떼기에 매달리는 가난한 삶이 고작이었다. 여기 전라남도 장성군 월성리에 대를 잇고 살아온 임종국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뭔가 새로운 일을 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있었을 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식들에게 만이라도 이 등을 짓누르는 가난의 멍에를 벗겨 주어야겠는데 그저 가슴이 메었다. 들일에서 돌아올 때면 언제나 지나가는 둑길. 나날이 황폐해 가는 고장의 산야인데도 저기 숲만은 울을 창창 대견스럽기만 했다. 어떤 생각이 가슴에 스르르 스며들어왔다. 메마른 저 산을 푸르름으로 온통 뒤덮여야겠다는 푸른 꿈.

온 산을 푸르름으로 뒤덮게 하자. 분명 그 곳에 나의 살길이 있을 것이다. 조림에 투신할 결심은 굳혔으나 막상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몰랐다. 알만한 사람들에게 참고 서적을 빌려다 보기 시작했다. 산림계에 들러 이 고장의 기후와 토질에 알맞은 수종을 알아보았다. 먼저 자란 삼나무 모수에서 종자를 따다 묘목을 만드는 일 금싸라기를 모으는 심정으로 한 알 두 알 씨앗을 모았다. 곧 마을 앞에 시험 육묘장을 마련하고 삼나무, 편백 씨앗을 심었다. 공부하는 학생으로 돌아가 조림 공부도 계속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부자는 육묘장에 들러 싹이 트는 모양을 살폈다. 조바심에 밤잠을 설치면서 종자를 뿌린지 엿새째 땅을 비집고 솟은 생명의 기적 무한한 가능성을 안고 솟아나는 묘목들 여기서 다시는 떨어질 수 없는 나무에 대한 애착은 비롯됐다. 조림에 대한 자신을 굳힌 임씨는 이제 나무밖에 몰랐다. 묘목이 자라는 만큼 그의 조림 지식도 자랐다. 2년째 되는 봄 삼나무 묘목을 그의 소유인 3천 평 야산에 옮겨 심었다. 책에서 배운 대로 넓이 30센티미터 깊이30센티미터의 구덩이를 파고 복합비료를 흙과 섞어 넣은 다음 묘목이 굽거나 뿌리가 구부러지지 않도록 약간 묘목을 뽑는 듯 당겼다 놓는다. 그리고 비탈진 곳은 수평으로 깎아 평탄하게 해서 심었다. 이듬해 나무가 탈 없이 잘 자라자. 더 넓은 산야에 심어보겠다는 의욕이 생겼다. 조상 대대로 물려온 옥답을 팔아서 헐벗은 야산을 또 사 들였다. 아버지의 처사를 원망하여 가족들의 모습은 산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됐다. 7월 초순에 밑 풀을 베어주고 8월 하순에 또, 한번 그러니 산에서 살다시피 됐다. 이렇게 혼자 막막한 산의 도전에도 꺾일 수 없는 신념이 있기에 외롭지도 않았다. 그러나 3년 자란나무가 무참히 베어져 버린 걸 볼 때는 참지 못할 울분이 솟구쳤다. 밤이 되어도 나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갖가지 생각에 잠 못 이루는 야영. 오늘 저녁만 해도 마을 어른들을 찾아가 산의 나무가 우리들 생활과 얼마나 깊은 관계가 있으며 앞으로의 유산으로서 가치를 역설했는데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우리의 산야를 그대로 후손에게 물려준다고 해서 우리의 할 일을 다 한 것은 아니다. 메마르고 홍수지고 가난을 재촉하는 땅을 그대로 넘겨주는 것은 큰 죄악이다. 가꾸고 심어 풍성한 국토를 만들어 보존하는 것이 우리 당대의 살길이며 후손에 떳떳이 물려줄 유산이 아니겠는가. 그래 나무를 소중히 여기고 심는 버릇을 우리 마을부터 해보자고 설득했으나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다. 그러나 임종국씨는 안타까움만 더할 뿐 결코 꿈은 퇴색되지 않았다. 조림사업은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한 것이란 이제 낡은 상식이었다. 얼마든지 당대에 거둘 있는 수익성 있는 사업이었다. 이제 이 어린놈이 대학에 다닐 때 지금 심은 묘목을 울창한 수목으로 키워서 그 놈 학자금으로 쓸 수 있도록 입증해 보리라. 말보다 현실로서 마을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을 혼자 다짐하는 임씨였다. 평생을 걸고 내기를 하겠다는 이 결심을 그러나 당장에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뽕나무를 심어 곧 양잠을 하기로 했다. 집안 식구들은 누에치기에 매달렸다. 살림 걱정을 덜게 되자 더욱 조림에 열중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