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월에 방영된 대한뉴스는 첫 소식으로 수출목표 10억불 달성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올해 들어 첫 수출 진흥 확대회의를 추진했습니다. 1970년대는 우리 사회가 후진국을 벗어나 산업사회로 들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정부 주도 아래 경제개발이 강력히 추진됐고 수출만이 살 길이라며 수출증대에 모두가 나섰습니다. 인삼차를 비롯해서 도자기 등 수출이 가능한 모든 품목을 해외시장에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수출에는 도시와 농촌이 따로 없었습니다. 가눈썹 수출 현장. 이 당시 우리나라 부녀자들의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만든 가발이나 속눈썹 등은 해외시장에서 환영을 받았습니다. 머리카락을 저울에 달아서 사고파는 모습이 지금 와서 보면 격세지감이 듭니다. 이 당시 농촌에서 농촌 부녀자들의 섬세한 수공으로 만든 가발이나 가눈썹은 전량 수출돼 우리의 수출증대에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수출 선적현장. 현대화된 컨테이너 부두에서 선적하는 요즘과는 큰 대조를 보여줍니다. 농촌에서는 농한기인 겨울철에도 가마니 짜기 등으로 쉴 틈이 없었습니다. 1971년에는 강남지역 개발에 발판이 된 잠실지구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보면 대수롭지 않을 5층 맨션아파트의 등장이 그 때는 화젯거리가 됐습니다. 새로 지은 아파트를 정일권 당시 총리가 돌아보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남쪽 카나리아 군도에 있는 이 라스팔마스호와 테네리프항은 우리나라 원양어업의 주요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올해 원양어업 참치어선……. 원양어업 현장에도 대한 뉴스는 찾아가서 땀 흘려 조업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도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행정부에 처음으로 전자계산기가 도입된 것이 뉴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행정능률을 높이기 위해 각 부처에서는 타자교습을 실시했습니다. 진주 진양 축산협동조합이……. 제천 예술제를 맞아 경상남도 진주에서 열린 한우챔피언 대회입니다. 비록 짐승이지만은 승부에서 이겨야겠다는 본능만은 대단합니다. 문패달기 운동. 한 집에 여러 세대가 살거나 지번이 명확치 않아 우편물 배달이 어려워져서 체신부 등 관계 기관에서는 문패달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제 1회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입니다. 한 때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어린이가 튼튼한 어린이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됨으로써 3선 개헌을 통한 집권에 성공했습니다. 그 이듬해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됐습니다. 그 당시에 대한 뉴스 보도입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우리 대표단의 행렬에 무관심한 듯 보였습니다. 대한 적십자사의 이범석 수석대표는 이념은 변해도 민족은 영원하다고 전제하고 적십자인의 슬기로써 남북 적십자회담을 성실히 진행하자고 강조했습니다. 본 회담을 끝낸 남북 적십자 대표단은 대동강변에 있는 옥루관에서 만찬회에 참석했습니다.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북한의 가곡 꽃 파는 소녀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17일 특별 선언을 통해 10월 유신을 선포함으로써 헌정을 중단하고 유신헌법에 따른 종신집권의 길을 터놓았습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습니다. 26년 만에 무더위로써 동물원의 동물들도 더위를 참지 못해 허둥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얼음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즐겨 찾은 피서용품이였습니다. 만 원권 지폐가 처음 나온 것도 1972년의 일입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만원은 고액으로써 자기앞 수표로만 사용해왔습니다. 전라남도 진도. 진돗개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른 봄에 보리를 밟아주면 더 잘 자라기 때문에 보리밟기는 농촌의 큰 행사였습니다. 공무원과 학생들까지 보리밟기에 참여하던 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보릿고개가 살아있던 그 때 그 시절. 잡곡 혼식과 분식을 장려하며 쌀 절약 운동에 온 국민이 참여해야 했습니다. 월남 전선에 파병돼 용감무쌍한 이름을 떨쳤던 맹호부대가 개선했습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비극인 월남 전쟁에 파견된 국군장병들이 돌아왔을 때 온 국민의 열렬한 환영이 있었습니다. 1973년 여름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우리나라를 찾아 여의도 광장에서 집회를 가졌습니다.5월말 이화여자대학 메이퀸 대관식은 당시 장안의 화제를 모았습니다. 70년 중반 젊은이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던 장발. 한 때 심각한 사회문제로 단속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1973년은 우리나라 중공업 발전에 초석을 놓은 포항 종합 제철이 고로 화입식에 이어 준공을 본 해였습니다. 포항 제철의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공업입국의 기틀을 마련하게 됐습니다. 1974년 대한뉴스는 이 때부터 본격적인 천연색 뉴스를 선보였습니다. 같은 해 광복절을 기해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 지하철 1호선 9km가 개통돼 지하철 시대가 막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같은 날 국립극장 광복절 경축식장 북한의 사주를 받은 재일동포 문세광에 의해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서거했습니다. 서울 근교 용인에 한국 민속촌이 문을 연 것도 1974년의 일입니다.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 고분 천마총을 발굴함으로써 금관을 비롯한 각종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찬란했던 신라왕조 천년의 모습을 온 국민이 볼 수 있었습니다. 1974년 말 휴전선 부근에서 발견된 북한의 남침 땅굴. 그 후 제 2, 제 3 땅굴이 잇따라 발견돼 우리 국민은 물론 온 세계가 경악했습니다. 영동 고속도로가 준공 개통됐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준공식에 참석하고 시승했습니다.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한 우리나라는 1976년 포니 승용차를 수출해 자동차 수출국으로써의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온 국민의 성원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힘입어서 1977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쌀 증산과 함께 쌀막걸리가 처음 시중에 판매됐습니다. 플라스틱 쌀 막걸리 병도 이때 선보였습니다. 사과의 명산지인 대구에서 해마다 개최한 사과먹기 대회입니다. 유신헌법에 따라 1978년 7월 6일 장충 체육관에서 열린 제 2기 통일 주체 국민 회의 대의원 대회에서 박정희 후보는 제 9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이듬해 1979년 초 미국의 카터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습니다. 방한 기간 중 우리나라의 인권문제 등이 거론됐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제방 공사 준공식장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육성입니다. 박정희 : 친애하는 국민여러분 이 무한한 방조제와 호수는 우리가 지난 1년 10개월 동안 불철주야 산을 깎고 바다를 막아 쌓아올린 땀의 결정이요. 그 날 밤. 궁정동 안전 가옥에서 현직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됨으로써 유신시대의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그날의 대한뉴스 보도내용입니다. 영부인을 여의신지 5년 남짓 만에 당신마저 떠나시니 세 유자녀의 통함은 이루말할 수가 없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비통함도 더없이 크기만 합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두 영애는 16년간 살던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옛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두 영애는 청와대 직원들의 전송을 받으며 이 곳을 떠났습니다. 서울 신당동 62번지 43호 옛집 이 집은 고 박대통령 일가족이 1958년 5월부터 3년 3개월간 살던 집으로 유자녀들은 아버지가 나라의 최고책임자가 돼서 함께 이 집을 떠난지 18년 만에 양친을 모두 여읜 채 외롭게 돌아온 것입니다. 1980년 3월 대한뉴스는 제호를 카메라 순보로 개칭해 보름간격으로 제작 배포했습니다. 카메라 순보 제 3호는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중동순방을 보도했습니다. 당시 광주사태로 보도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전국은 긴박한 소용돌이 속에서 민주화항쟁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모든 대학이 임시 휴교에 들어갔습니다. 카메라 순보라는 이름으로 제작 배포된 지 3개월 만에 원래 이름을 되찾은 대한뉴스는 다시 주 단위로 내보내게 됐습니다. 비상계엄 하에 국가 보위 대책 위원회가 발족됐고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했습니다. 이어 전두환 국보위 상임 위원장이 제 11대 대통령에 당선 취임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981년 3월에는 제 12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한 정부는 대구를 대구직할시로 인천을 인천직할시로 각각 승격시켰습니다. 또한 교복자율화와 과외 금지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 해방 후 40여 년간 지켜져 왔던 통행금지가 해제 되는 등 국민생활면에서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대한 뉴스는 1981년부터 기획시리즈 길 따라 풍물 따라 코너를 신설해 각 지방의 풍물을 집중 소개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화면은 울릉도의 자연경광과 그 당시 울릉도 연안에서 많이 행해지던 손으로 꽁치를 잡는 모습입니다. 추억과 낭만의 협궤선 열차 수원과 인천을 하루에 세 차례씩 오가던 이 협궤열차는 이 지역 서민들의 소중한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옛부터 전해오는 제주도의 해녀춤 입니다. 또 국보순례 코너도 신설. 남대문을 비롯한 우리나라 주요 국보들을 소개했습니다. 제 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민속스포츠인 씨름이 인기스포츠 종목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1983년 여름. 온 국민의 밤잠을 설치게 하고 울음바다로 몰아넣었던 KBS의 이산가족 찾기 운동.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혈육의 정과 민족 분단에 따른 이산가족들의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새삼 일깨워준 순간들이였습니다. 같은 해인 9월 1일, 탑승자 전원이 희생된 대한항공 여객기 참사사건. 10월 9일에는 버마 랑군의 아웅산 묘소에서 북한 공작원이 장치한 폭탄이 폭발해 대통령을 수행해서 참배 중이던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이 순국하는 참사가 빚어졌습니다. 이범석 외무부 장관과 한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등 고위 공직자와 수행기자 등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해가 바뀐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리나라를 방문 국민들에게 희망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5공화국 정부가 영호남 화합의 상징으로 추진한 대구 광주간 88고속도로가 개통됐습니다. 그 해 여름 전국을 강타한 폭우와 홍수. 수많은 이재민을 낸 수해현장에도 대한뉴스 카메라는 찾아가서 민관군이 합심해 구조 활동과 복구 작업을 벌이는 모습을 담아 보도했습니다. 삼남 지방의 재난에 대해 북한 측이 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해 와서 우리 측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북한 쌀과 의약품이 이재민들에게 전해졌습니다. 1985년에는 다시 남북 적십자회담이 열려 양측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예술단 교환 공연과 이산가족들의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 평양을 방문한 이산가족 중 천주교 원주 교부장 지학순 주교는 35년 만에 누이를 상봉했습니다. 1986년 한 때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가운데 성금이 줄을 이은 평화의 댐. 198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은 헌법 고수를 선언 온 국민을 분노케 했고 마침내 6월 10일 서울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민주화 항쟁의 불길이 전국으로 확산돼 나갔습니다. 이어 6.29 선언을 계기로 직선제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습니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당선자가 제 13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 6공화국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선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이어 국회에서는 제 5공화국 당시의 비리와 광주민주화 운동의 진상을 캐기 위한 청문회가 국내외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88 서울 올림픽. 대회 기간중 국립 영화제작소의 모든 인력이 총동원돼 올림픽 전 과정을 촬영해 대한뉴스 수록과 함께 올림픽 공식 기록영화를 제작했습니다. 1990년 5월 일본에서 거행된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으로 출전한 우리 젊은이들이 여자 단체전에서 우승해 7천만 겨레가 함께 감격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했고 또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 제주도에서 역사적인 한소정상회담이 이루어졌습니다. 남북 고위급 회담 대표로 평양을 방문한 강영훈 당시 총리가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나는 모습도 대한뉴스는 대형 화면으로 선명하게 국민들에게 전했습니다. 1991년 9월 남북한이 동시에 UN에 가입함으로써 남북한 화해시대의 막을 올렸습니다. 1948년 남북한이 서로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한지 43년만에 서로의 깃발을 UN 하늘에 휘날리면서 회원국이 된 것입니다. 대한 뉴스 카메라는 각종 사건 외에도 전국 곳곳을 누비며 우리 국민의 생활상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이 화면은 뉴스에 수록한 가리비 양식장면입니다. 경주에서 열린 열기구 대회. 경제성장에 따른 다양한 레저스포츠의 확산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매년 벌어지는 조랑말 경주 대회입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유행의 물결.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이르는 각종 패션쇼의 모습입니다. 대통령 선거 유세현장. 마지막까지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접전이 전개됐으나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가 당선됐습니다. 1993년 2월 25일 제 14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습니다. 선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함에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드디어 1961년 5.16 이후 30여년만에 군사정권을 마감하고 문민정부가 출범해 우리 정치사에 새로운 장이 펼쳐졌습니다. 1948년 조선시보로 출발한 대한뉴스는 그동안 몇차례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정부의 홍보매체로써 뿐만 아니라 역사의 기록자로서의 소명과 사명을 다해왔습니다. 특히 텔레비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이전까지 대한뉴스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영상매체로써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후 정부의 기록매체로써 역사적인 사건기록과 화제의 현장을 찾았습니다. 대한뉴스 그 발자취 2집은 지난번 제 1집에 이어서 1970년 이후부터 문민정부 출범까지의 사건과 화제를 모아 선보였습니다. 감사합니다.